소설리스트

50화 (50/74)
  • 50.

    “널 비난하려는 게 아니야. 할머니는.”

    “더는 듣기 싫어요. 우리는 계약 관계이고 조만간 남이 될 사이라고요!”

    무진은 할머니로부터 시현을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으면서 시현에게 가시를 세웠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처럼 다그쳤다.

    그녀의 말대로 한국에 와서 호텔에 숨어 있었고, 입사해서 적응하는데 바빴을 텐데.

    계약과 결혼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문처럼 헛짓거리하고 다녔을 리 없었다.

    시현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입에 담기에 더러운 추문.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지만, 결혼한 사람의 내면을 이토록 몰랐을까.

    겨우 떨어진 시간이 한 달이었다.

    무진은 그녀를 혼자 독차지하려는 소유욕이라는 걸, 집착이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발 가라고요!”

    같은 말만 하며 제발 가라고 말하는 시현한테 그는 무언가 끝장내려는지 꿈쩍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널 괴롭히는지 알잖아!”

    “모른다고! 몰라! 왕 할머니 외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대답하기 전까지는 안 가. 그러니까 말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진짜 안 갈 거 같아서 흠칫했다.

    그렇다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지금 상황도 알리면 나아질 건지…….

    머릿속은 복잡한데, 마음은 터질 듯했다.

    그가 믿지 않더라도 다시 한번 시현은 입을 열었다.

    “……진보라 본부장? 장소연 비서? 정 비서? 그리고 백혜련.”

    정말 하기 싫은 말을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시현은 경악스러워하는 무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한국에 아는 사람 없어요. 진보라 본부장은 나보고 무진 씨를 놓아주래요.”

    “뭐라고?”

    시현은 무진의 놀란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백야 그룹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놓아주래요. 내가 무진 씨를 붙들고 있었던가요?”

    그는 말없이 한숨만 내쉬며 시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장소연 비서는 수시로 사무실에 와서 염탐하는 것처럼 굴어요. 박 실장이 없는 시간만 골라서요. 나와 박 실장의 일정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시간을 맞출 수 없어요.”

    “…….”

    “정 비서는 몇 주째 나타나지 않아요. 분식집에서도 보고 주차장으로 불러서 원하는 액수를 말하라고 윽박질렀어요.”

    시현은 단숨에 말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짐작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미쳐 가는 것은 당한 사람뿐.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하고 무진까지 소문만 듣고 다그치니까 시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감시자가 붙었어도 정 비서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어요. 희한하게 우리가 데이트를 적게 하니까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

    “백혜련은 찾은 거 확실해요?”

    “백혜련? 아, 정 비서가 찾는 사람이지. 정보에 의하면 정 비서가 접촉하는 50대 여성이 있어.”

    시현은 눈치 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에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지만, 더러운 추문까지 그녀를 공격하고 있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까지 정 비서가 접촉하고 있었다.

    그를 신뢰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다 털어놓고 소문을 잠재워야 했다.

    “백혜련은…… 나와 세현이를 낳은 여자예요. 왕 할머니가 그 여자를 찾아서 뭘 하려는지 알 수 없네요.”

    “뭐?”

    “저번에 식당에서 본 여성을 떠올려 봐요. 50대 중후반으로 보이지 않겠지만, 나와 세현이를 낳은 여자가 맞아요.”

    시현의 오피스텔에 숨소리만 들렸다.

    그는 시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현은 무진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덧붙였다.

    “꽃바구니,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배달되어요. 한국에 가깝게 지낸 친구는커녕 아는 사람도 없는데 웃기죠? 이런 것들이 소문하고 묘하게 맞물리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차분하던 시현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 있었다.

    깊이 숨을 내쉬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가라앉히려 했다.

    고개를 숙인 채 시현은 분노에 바들바들 떨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헛소문을 듣고 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건 부당한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에요. 그러니까 소문에 관해서는 무진 씨가 알아봐야죠. 이게 날 겨냥한 것은 아닐 테니까요.”

    “미안해. 이 정도일 줄은…….”

    무진의 목소리도 떨렸다.

    짜증 난 감정이 섞인 듯하나 시현에게 다그치며 큰소리를 친 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 같았다.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널 이렇게까지 괴롭힐 거라고…… 미안해.”

    “그래서요?”

    “제대로 알아볼게. 할머니가 벌인 일이라도 가만히 안 있어.”

    “누가 했든 경력을 쌓아야 하는 회사에서의 소문은 깔끔하게 정리해 줘요.”

    그는 시현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우리의 문제는 천천히 풀어보고 생각할 시간을 줘. 내가 실수하고 잘못한 일이면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게.”

    “그것보다 계약이랑 결혼 문제…….”

    “시간을 줘. 알아보고 나서 정리해도 늦지 않아.”

    주고받은 말은 많았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맴돌고 있었다.

    누군가의 농간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믿지 않는 그에게 역시나 푸념 섞인 말은 그녀의 심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심할 사람이 없는데 왕 할머니를 지적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동생을 버린 백혜련을 찾아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갑갑한 속내는 여기까지였다.

    착각과 오해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도 신뢰가 깨진 부부에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 않은 행동, 말을 어떻게든 조작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투고 화해는커녕 곪은 것을 덮어 둔 채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 시현.

    부디 동생에게까지 백혜련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 

    시현이 속 시원하게 터놓은 것인데도 무진의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진보라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에 경악할 새도 없이, 장소연이라는 이름에 눈이 번뜩였다.

    언젠간 자신을 찾는 전화라고 시현이 말을 전했을 때, 들었던 이름이 장소연이었다.

    무진은 진보라 본부장한테 임시로 비서가 있는 것만 알고 있었다.

    진보라 본부장은 돈에 회유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장소연은 또 뭐냐는 말이다.

    고모의 비서실장한테 받은 자료를 아직 열어 보지 않았다.

    무진은 회사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게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웃옷이 필요한 계절이 왔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회사의 소문은 그새 누그러졌지만, 구내식당에도 못 가는 시현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명절 연휴도 반납하고 일할 만큼 바빴기에 조금은 쉬고 싶었는데 그가 퇴근하는 시현을 붙잡았다.

    “회사예요.”

    “박 실장은 백야 그룹에 있으니까 밖에 나가지 않겠어?”

    “다른 직원 눈에 띄기 싫어요.”

    “그러면 멀리 가지.”

    밖을 나오자 금요일 밤이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날 이후 너무나 조용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은 그에게 기대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희망 없는, 곧 계약과 결혼이 정리될 사이였다.

    그런데 회사를 나와 운전하면서도 손을 잡는 무진의 행동에 즐겁게 데이트하던 날이 떠올렸다.

    시현은 심장이 뛰고 독하게 마음먹었던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어딘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는 도심을 벗어나 외곽 도로를 달려 서해로 갔다.

    지난번에 강원도 강릉에 갔던 것과 다른 방향이었다.

    도심은 금요일 밤이어서 화려한 불빛이 가득했지만, 도로는 한적하고 날이 쌀쌀해서 도착한

    태안 안면도 바닷가에는 파도치는 소리만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바다를 보고 있으니 복잡한 감정이 요동치는 듯했다.

    “밤이어서 바다에 보이는 건 얕은 파도뿐이네요.”

    “푸른색을 못 봐서 별로인가?”

    “밤바다도 좋은데요. 사무실에서 하루의 반 이상은 있으니까 바다를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일만 한 건가.

    무진은 시현의 말을 들으면서도 아직 풀지 않은 정보를 떠올렸다.

    소문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조만간 결과를 받아볼 거라서 가만히 시현만 바라보았다.

    그는 빠져들어 가듯 검푸른 밤바다를 바라보는 시현의 뺨을 감싸고 삐죽이는 입술을 키스로 막았다.

    거센 파도만 보이는 바다에서 서로에게 각인되고 싶었다.

    무진과 시현은 살랑이는 바닷바람에 차가워진 얼굴을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술 한잔할까요?”

    “마실 때가 있던가.”

    “포장마차에 가 본 적 없죠? 회사 근처에 달걀말이랑 잔치국수 잘 마는 곳이 있는데 무진 씨는 안 가 봤을 거예요.”

    시현은 술 얘기하면서 정말 술꾼이 된 듯했다.

    직원들이 하는 말이 주워들었고 딱 한 번 가 봤는데, 잘 아는 것처럼 설명하니까 웃음이 났다.

    “포장마차는 안 가 봤어.”

    “국수에 소주 한잔해요.”

    돌을 밟고 바닷가를 벗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현은 줄지어 있는 포장마차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휴가철이 아니어서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정겨운 기분마저 들었다.

    시현은 아버지한테 자주 들었던 포장마차하고 같은지, 다른지 모르지만 울적한 기분이 나아졌다.

    삐걱거리는 파란색 테이블에 앉아 시현은 손을 번쩍 들고 주문했다.

    “잔치국수 두 개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저녁도 안 먹었는데 더 먹지.”

    “그럴까요?”

    매콤한 오징어볶음, 달걀말이에 꼬치도 여러 종류로 주문하고, 얼음을 소주잔에 넣었다.

    “희한하게 먹는 거 알아줘야 해.”

    “콜라나 오렌지 주스를 넣는 것보다 깔끔하게 먹고 싶을 때는 얼음이 좋아요.”

    얼음을 넣은 잔에 소주를 찰랑거리게 채우고 앞에 앉은 무진의 잔에도 따랐다.

    쓴 술이 싫은 시현은 소주에 얼음에 조금 녹아 투명한 칵테일처럼 쭉 들이켜고 국수를 호로록 먹었다.

    쓴맛이 싫어서 술도 달짝지근한 걸 마시는 시현은 소주를 콜라나 오렌지 주스, 딸기, 오이 등을 넣어 과일주처럼 마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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