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74)
  • 49.

    걱정하는 듯한 아니,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그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신경을 쓰기 싫었다.

    “내가 한국에서 만난 남자는 부장들과 박 실장, 강무진 사장을 만나러 온 투자 관계자들뿐인데, 다 조사해 봐요.”

    “시현아.”

    “내가 뭘 하든 무진 씨는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우리 계약이 정리되면 결혼도 깰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는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간섭할 생각하지 말라고요!”

    시현이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내자 무진도 격해졌다.

    “누구라도 만났으니까 그런 소문이 나는 거잖아!”

    “그러니까! 소문의 출처는 알아봤냐고요! 내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지 직접 봤다는 사람 있으면 대면하죠.”

    인수 합병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빠르게 안정된 회사에서 잡음이 생긴 게 누구 탓일까.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사생활을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시현은 그걸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꽉 물고는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커피 잔을 들었다.

    “한 달 동안 호텔에만 있었던 거 확실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네가 할머니하고 뭘 작당했는지 몰라. 내 편인 것처럼 옆에 있으면서 더 큰 걸 바라는지 모르지.”

    시현은 기가 막혔다.

    주는 돈은 다 받고 계약대로 하라며 옴짝달싹 못 하게 한 게 누구였지?

    시현은 자신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정도로 회사에서 추문이 도는데도 무진이 냉정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시현은 허튼돈과 남자에게 관심이 없을뿐더러 허영과 사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누구보다 아는 무진이 헛소문을 듣고 그녀를 비난하며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무진 씨한테 추궁당하고 싶지 않아요. 커피 마셨으면 나가요.”

    “문제를 피하면 해결돼?”

    “이 문제는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니까요. 회사를 생각해서 사장님이 해결하면 되잖아요.”

    “소문이 날 만큼 네가 뭔가 했다면…….”

    시현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소문이 날 만큼 말조차 나누지 않은 직원이 얼마나 많은데.

    더구나 자신을 더 잘 안다는 사람의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소문이 문제인지, 소문 속에 남자와 연관된 것에 화가 났는지 무진의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뭘 감춘다고 생각하지 마요. 왕 할머니하고 작당이요? 그걸 내가 왜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돈을 돌려줄게요. 다 필요 없으니까 무진 씨 마음대로 해요. 나한테 계약 불이행으로 위약금을 받아 내는 것도 다 알아서 하라고요!”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과 살면서 힘들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해서 무시와 모멸감에 미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돈이 있다고 사람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도 참았다. 하필 취업에 성공한 회사가 그의 회사여도 받아들였다.

    시현은 스스로 이만큼 해 온 것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짐작되는 사람이 있어도 사실 확인도 안 하고 헛소문을 듣고 따지려는 그에게 실망만 커졌다.

    할 말이 겨우 이것뿐인가.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데 회사 내에 추잡한 말까지 돌고 있었다.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까.

    얼마 전에도 모르는 남자가 아는 척하며 길에서 무섭게 굴어서 놀랐는데.

    회사 안에서의 자신을 둘러싼 추문은 단순히 놀라움을 넘어 소름이 끼쳤다.

    자신과 무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의 짓일까.

    그렇다면 왕 할머니의 지시로 움직이는 사람뿐일 텐데.

    백혜련을 찾았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피해망상에 빠질 무렵, 시현은 좁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무진을 쳐다보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당해야 하지?

    수십 번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왕 할머니의 짓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굳이 회사에 꽃바구니와 간식을 보내야 할까? 그렇게까지 해서 왕 할머니가 얻는 것은 고작 무진이 이혼남이 되는 거였다.

    정확히는 그들만의 결혼 시장에 팔려도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

    겨우 그런 일로 사람을 미치게 할 것까지 있을까.

    소문과 왕 할머니를 따로 생각할 수 없었던 시현은 한발 뒤로 물러나 오해를 풀려고 머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무진하고 다투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해결하든, 완벽히 계약 끝에 결혼을 정리한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시간이 해결할 거라고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게 나았다.

    “헛소문이에요. 믿든 안 믿든 투자 회사에 악영향이 생길 거 같으면 알아봐요.”

    “알아봐야겠지.”

    “나하고 상관없는, 어쩌면 무진 씨를 겨냥한 건지도 모르잖아요. 내 탓만 하지 말라고요.”

    시현은 그가 한 말을 곱씹어서 돌려주었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처한 상황을 변명하듯 말해 봤자 자신만을 탓할 테니까.

    돈과 힘이 있는 그가 뒷조사라도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문을 둘러싼 자신의 결백을 밝혀 주기를 바랐다.

    “소문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른 채 날 비난하지는 말아요. 소문처럼 누구를 만날 만큼 여유가 없다는 건 무진 씨 말고는 다 알아요.”

    “…….”

    “차고 넘치는 증거가 진짜인지 언제 진위 파악이라도 해 봤나요?”

    “시현아.”

    “강무진만큼! 왕 할머니도 나쁜 사람이에요. 날 비난할 생각하지 말아요.”

    시현의 말에 어이없어서 혹은 황당한지 그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시현을 원했다.

    단 한 가지 그녀의 사랑을 영원히 갖기를 바랐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삐걱대는지.

    할머니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망가뜨리는지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랐다. 그걸 알기에 시현을 보호하려고 가족하고 거리를 두었다.

    결혼이 뭐라고.

    자신이 뛰어난 종마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 여자를 붙이는 할머니한테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더욱더 시현이 사라졌을 때 두려움에 온전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문득, 시현이 자신을 팔아넘긴 것 같은 비뚤어진 생각이 그를 잠식했다.

    “알아볼게.”

    나직이 한 마디 툭.

    “할머니부터 인수 합병 후 입사한 직원 위주로 알아볼게. 널 의심한 건 아니야.”

    “…….”

    “눈에 띄는 사람을 찾다가 직원들 사기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조심했어. 그리고 나도 아는 소문을 넌 무시하는 듯했고.”

    “내가 뭘 어쨌다고요?”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잖아. 오히려 소문에 편승해서 나와 끝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

    전부 그녀 탓이란다.

    남자하고의 추문을 왜 믿는 건지 그녀는 무진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인 중에 맞선이나 보는 인간과 자신이 같단 말인가?

    시현은 그가 자신에게 애정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 할머니를 의심하고 더 파헤쳤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한 게 없고 머리를 숙일 이유는 더욱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그에게 들키기 싫어 눈길을 외면했다.

    “회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우리 계약을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난 왕 할머니한테 맞설 힘이 없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무진 씨는 날 지키지 못해요. 그리고 세현이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를 만나게 된 원인은 동생 때문이었다.

    돈 때문에 계약 애인이라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평생 모를 사랑이라는 걸 해 봤다.

    사랑만 하기에는 자신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현실, 동생하고 잘 살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절대 꿈도 꿔서는 안 되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사랑이었다.

    시현은 그걸 또다시 깨달으니 마시던 커피가 입 안에 쓰게 번지는 듯했다.

    그가 왜 헛소문에 기복이 심한 감정을 드러내는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 않았다.

    계약과 결혼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몇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현은 진정 왕 할머니가 두 사람 사이의 문제인지 고민했다.

    천륜을 저버린 엄마한테는 존재만으로 미움을 받을지라도 왕 할머니 이전에는 적의를 품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악의적으로 헐뜯는 것에 면역이 없었다.

    “할머니나 우리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시현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계약과 결혼은 둘이서 합의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어렵고 힘겨운지 감정적으로 지쳐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난 돈을 받고 한 달 동안 숨은 것밖에 없어요.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

    “그 잘못 때문에 왕 할머니가 포기할 때까지 계약대로 하는 거잖아요.”

    “누가 뭐래?”

    무진의 짜증스러운 말투에 시현은 깊숙이 묻었던 정말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이시현은 강무진이 괴롭히고 싶은 장난감 같은 거예요? 놀다가 팔다리 찢고, 낙서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은 그런 존재냐고요!”

    시현과 무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미쳐 버리라고 버려두고 말도 없이 도망쳤잖아!”

    “무진 씨는 모든 걸 숨겼잖아요! 겨우 도망친 거로 이러는 거예요?”

    “왜! 할머니가 찾아왔다는 말을 안 하고 숨어? 내가 널 장난감 취급한 적이 있어?”

    “난 무진 씨한테 그 어떤 비난도 들을 이유가 없어. 그만 가요. 부탁이에요.”

    시현은 화를 꾹꾹 누르며 억눌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시현은 왕 할머니의 존재가, 무진이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로 유력하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자존감이 낮아졌다.

    버림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사람은 없었다.

    왕 할머니가 백혜련을 찾아낸 것부터 동생의 안위를 겁박한 것까지 겁이 났다.

    한국에서 살지 않으면 되는데, 정착하고 싶어 하는 동생만 두고 미국으로 갈 수 없었다.

    또한, 사생활이 드러나서 남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알 수 없는 시선이 두려워 비밀을 지키기를 바랐다.

    계약과 결혼, 비서로 무진의 곁에 잠깐이라도 있는 게 나름대로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뭐라고 비난하든 왕 할머니로부터 그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주며 참으려고 했는데.

    회사 안에 퍼진 소문을 그대로 믿고 따지려 드는 그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제발 가요. 제발…….”

    시현은 억울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잠겼다.

    이런 일을 당할 만큼 자신이 뭘 잘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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