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74)
  • 48.

    잠에서 깨지 않으면서 흐느끼는 시현을 강인한 팔로 세게 품에 끌어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진은 시현 앞에서 늘 무너지고 흔들려서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자신을 보았다.

    시현이 흘리는 눈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시현의 눈물만 봐도 그는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왜 이렇게 미련스럽게 이러고 있을까.’

    무진은 품으로 파고드는 시현을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할머니 때문에 뭘 하고 있는지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시현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무진의 밤은 다시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 

    가볍게 한두 잔 마시려던 게 달콤한 맛에 정신없이 마셔 술에 취해 무진의 집에서 자고 출근한 시현.

    오전 8시에 회의가 있는 그가 먼저 출근하고 시현은 비서로서도 꽝이라며 꼬인 상황에 자신을 탓했다.

    그렇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정신없던 날 이후,

    시현은 주변 상황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인 대행이라는 계약의 의무에는 침대를 공유하는 것뿐이었다. 감시자가 다 알고 왕 할머니한테 보고 하게끔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잠자리를 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데이트를 잘 지키고 있었다.

    주말에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하면서 사무실 외에 개인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분명하게 다른 뜻이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그리고 무진은 사랑 타령 외에 묘하게 달라진 말투와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둔한 그녀가 바로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달라졌으니 그 의도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끝을 달리는 건가.

    마지막 만찬 같이 좋은 사람, 좋았던 날로 힘들었던 기억을 덮어 두고 싶은 걸까.

    왕 할머니가 백기를 들고, 나올 조짐이 보이는 걸까.

    퇴근 무렵 그가 다정하게 물어본다.

    “전처럼 뮤지컬이라도 보겠어?”

    “주말은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너무하네요.”

    “안 쉬고 말없이 출근하거나 몸을 혹사하려는지 술에 찌들어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비꼬지 말아요.”

    “비꼬는 거 아니야. 박 실장 눈치 볼 거 없어. 이젠 순리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굳이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힐 필요 없이 물이 흐르듯, 시간이 약이 되는 것 같았다.

    시현은 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경력을 쌓고 부서 이동으로 그와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부부인데 사장과 신입 비서인 게 불편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런 건 데이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비서한테 휴식다운 것을 알려 주는 거지. 술에 찌드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그러면 박 실장하고도 같이 가야겠네요.”

    이번에는 시현이 그의 말을 비꼬았다.

    “넌 박 실장이 알차게 시간을 쓰는 걸 모르는군. 조금만 신경 써서 박 실장의 옷을 보면 짐작할 텐데 말이야.”

    “박 실장한테 관심이 많은가 보네요. 난 알지도 못하는 걸 알아채고.”

    “비서의 사생활을 간섭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일에 지장을 주면 골치 아프니까 조금 아는 것뿐이지.”

    무진과 박 실장은 오랜 세월 같이 일해 와서 아는 게 많은 사이였다.

    사소한 것도 말할 수 있어서 시현하고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뮤지컬 공연이나 영화나 드라마 방영 등을 물었다.

    박 실장은 사무실에서 시현하고 일 외에도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요즘 즐길 만한 것을 무진에게 알려 준 것이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에 할 만한 것을.

    그리고 운전기사가 없는 날엔 시현은 무진하고 데이트하고 말았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은 채.

    퇴근 후,

    웅장한 노래와 음악, 멋진 무대의 뮤지컬을 보는 동안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시현은 소문이 무성한 사장하고 밖에서 문화생활에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게 괜찮은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현은 그의 미묘한 변화가 두렵고 신경 쓰였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게 미국에서 계약과 결혼하던 루트 같아서 심란했다.

    손을 놓고 다가오는 이별 이후의 일과 삶을 고민해야 할 때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니 헛짓거리인지,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긋났다는 걸 애써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진솔한 대화는 의미가 없다며 삐걱거리는데도 정신이 나간 듯이 행동했다.

    뮤지컬을 보고 나와 차에 타자 그녀는 웃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회사에 소문이 부풀려 별의별 사람하고도 엮이자 시현의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결혼 직후 왕 할머니로부터 겁박을 당하고, 돈을 받고 무진을 버려야 했다.

    도대체 이상한 일이 자꾸 생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강무진하고 연관이 있는 찜찜함을 털어 낼 수 없을까.

    “할 말 있어?”

    “없어요.”

    “사람 설레게 뜨겁게 쳐다보고 나서 용건이 없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어? 오늘은 오피스텔에서 커피 한잔할 수 있겠지?”

    오히려 할 말은 그가 있는 듯해서 시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은 왕 할머니한테 받은 돈, 정 비서가 찾았다는 백혜련으로 두통이 생겼다.

    진작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지금처럼 남보다 못한 어정쩡한 관계는 아니었을까.

    계약 관계에 부부라니.

    이렇게 웃기는 관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현은 무진의 모습을 훑듯이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는 소문과 관련이 있을까.

    사내에서 퍼진 소문을 그는 알까.

    이번에 먼저 말해 본다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그가 매듭지어 줄까.

    온갖 생각으로 두통이 몰려왔다.

    시현은 오피스텔 문을 열면서도 평탄하지 않은 인생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 

    그는 시현의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려 잔에 옮기고 시현에게는 각설탕 한 개를 넣은 걸 건넸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죠?”

    시현은 커피 잔을 받아 들고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없다면 넌 할머니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말할 건가?”

    “묻는 말에 되묻는 거 나쁜 습관이에요. 할 말이 있어서 조용한 곳이 필요했던 거잖아요.”

    시현도 하고픈 말은 있지만, 뮤지컬을 보자고 할 때부터 그의 변화만큼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눈치가 빤해서.

    둔하지만, 이럴 때 눈치가 빨랐다.

    커피 잔을 내려놓은 채 신경질적인 시현의 대꾸에 무진이 입을 열었다.

    “인수 합병으로 바쁜 와중에 회사에서 비서에 관련한 이야기가 도는 거 알고 있어?”

    “…….”

    “나를 겨냥한 건지, 널 뭉개 버리려고 악의를 품은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뜸을 들이다 시현이 그에게 물었다.

    “사장으로서 물어보는 건가요?”

    “복합적인 거지. 비서의 행실이 투자처에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지만 넌 내 아내니까.”

    “그래서요?”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 없어.”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냐고 나에게 묻는 거예요?”

    그는 현재 추진하는 일이 무결점이기를 바랐다.

    이 상황에서 할머니가 시현에게 한 짓도 거론되면 해결 방법을 달리할 생각이었다.

    시현을 탓할 생각에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진과 달리 시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손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멈칫하더니,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알아봤어요?”

    “그게 중요한 건가?”

    “누굴 겨냥한지 모른다면서 날 탓하고 있잖아요.”

    “그냥 소문의 내용을 아냐고 물었어.”

    “강무진 사장을 겨냥한 것인지 궁금했더라면 진작 알아봤을 텐데, 사내에 퍼진 소문을 제일 늦게 접한 나한테 이런 걸 물어보는 건 내 행실을 꼬집고 싶은 거잖아요.”

    시현의 음성에 무진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화가 난 게 느껴져서 시현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식의 대화는 둘 사이에 절대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 그렇죠. 계약을 이행하는 중이어서 간 보는 거니까요. 남자 문제가 있었더라면 무진 씨 할머니가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

    “한 달 동안 무진 씨를 피해 호텔에서 살았고,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입사해서는 밤낮없이 일만 했는데 뭐가 궁금해요?”

    고운 말은 나오지 않고 짜증이 섞인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헛소문이라는 거지?”

    그가 되묻는 말에 시현은 다시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말해 봤자 믿지 않잖아요.”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허영심에 사치로 남자 직원들 등골을 빼먹는다는 유치한 말을 믿는 사람들이 웃기는 거죠. 그게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어이없지는 않던가요?”

    무진은 시현의 물음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왕 할머니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긴 해요? 회사에서 신입 비서를 아는 직원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결재받으러 오는 부장급 인사도 인사만 할 뿐이었다.

    시현은 차가운 음성으로 딱딱하게 말하며 심호흡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했다.

    회사 내에 퍼진 소문에 상처받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실이 아닌 것은 언제나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믿고 싶었으니까.

    조용히 살아도 이런 일이 생기는 것에 의심하지 않는다면 바보일 것이다.

    딱히 떠오를 만큼 누군가에게 나쁜 짓은커녕 악의적인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누구든 벽을 치며 살아서 아무도 없었다.

    그게 시현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남자하고 얽힌 지저분한 소문이 그가 추진하는 일과 연관이 없다고 소리치려다가 멈칫했다.

    반박해 봐야 자기 가족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할 테니까.

    끝낼 때가 확실히 온 것 같았다.

    시현은 그가 잘해 주고 다정하게 군다고 기대도 되는 남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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