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74)

45.

보라는 친구라는 위치에서 질 좋은 정보를 얻어 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이시현이라는 존재가 무진에게 강렬한 것 같았다.

악의 없는 대화여도 상대에 따라 분위기가 고조되고 막지 않았으면 이시현 얘기까지 나올 뻔한 걸 모르지 않았다.

“까닥했으면 이시현 얘기도 할 뻔했어.”

도대체 아무것도 없고, 왕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싫다고 진저리를 치는데. 무진이 이시현을 버리지 않은 게 정말 이상해 보였다.

보라는 사랑 같은 걸 믿지 않았다.

성공에 관한 열망이 강할 뿐,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무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도 버릴 생각인가? 백야 그룹은 어쩌려고?”

친구하고 한 끼 식사한 거지만, 보라는 무진을 꽉 잡은 이시현을 떠올렸다.

여자의 얼굴이나 재력을 보는 건 아니겠지만, 무진의 취향이 그런 쪽이면 따라 하기 싫어도 시현의 스타일을 고민해 볼 문제였다.

“백야 그룹을 포기하지 않으면 돼. 난 그걸로 충분해.”

보라는 비릿하게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 

한편 장소연의 지시를 받은 남자는 기태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나선 것은 기태였고, 기태가 서너 명 더 고용해서 이시현을 망신 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허접하고 돈만 밝히는 동네 백수건달부터 번듯한 직업이 있는 남자까지 돈으로 매수해서 시현을 괴롭혔다.

오피스텔 주변을 맴도는 사람부터 매일 핸드폰에 메시지를 보내고, 사무실로 꽃과 간식을 보내는 행위까지 끝이 없었다.

꽃바구니와 과일이 도착한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

받는 사람은 시현을 대신해 자리에 있던 박 실장이었다.

“이게 뭡니까? 보낸 사람이 없군요.”

“…….”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카드도 없는데 이거 먹고 탈 나는 거 아닙니까? 시현 씨 앞으로 온 건데 한 번 봐요.”

박 실장의 말에 시현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꽃바구니 속과 과일을 하나씩 꺼내서 살폈다.

“먹고 탈 나는 물건인 거 같아요. 나한테 이런 걸 보낼 사람이 없거든요.”

“뭐 축하받을 일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일은 전혀 없어요. 생일도 한참 멀었어요.”

시현은 불쾌감을 넘어 이제는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낸 간식거리를 버리는 것도 일이 되어 버렸다.

시현은 꽃바구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간 겁을 먹은 듯한 시현의 표정을 본 박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보안 팀에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어디서 오는 물건인지 알아봐 달라고 하면 최소한 출처 정도는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마도 모른다는 답변이 올 것 같아요.”

“시현 씨,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시현은 박 실장의 물음에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박 실장이 무진의 최측근이지만,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지 몰랐다.

햄버거 가게에서 존이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부터 메시지를 받았기에 일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좋지 않다고 대답해도 되겠지만, 이것 또한 무진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 같았다.

시현은 받을 수 없는 물건 오면 사진만 찍어두고 버릴 생각이었다.

모름지기 선물은 상대가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데 보낸 사람이 불분명한 건 꺼림칙하니까.

“내가 보안 팀에는 알아보라고 할 테니까 시현 씨도 누가 보냈는지 고민해 봐요.”

“알겠습니다.”

새로운 방법인가?

시현은 주변에서 생긴 악의적인 일에 어리둥절했다.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하게 할 수 있게 회사에까지 침투한 감시자를 어떤 식으로 잡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단순히 사무실에 와서 물건을 건드리는 짓하고 괴롭히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회사는 무진과 자신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박 실장까지 괴상한 일이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감시자가 이상한 짓을 한다는 것을 무진이 알면 어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시현 씨. 문제가 있으면 말해요. 사장님이 불편하면 나한테라도.”

“알겠습니다.”

누구의 장난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지만, 박 실장한테 다 털어놓을 수 없었다.

보고하는 박 실장한테 무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으니까.

“혼자서 감당하면 안 됩니다.”

“실장님이 걱정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속이 썩어도 말하지 않을 텐데.

박 실장의 진심 어린 걱정에 짧게 대답하고 시현은 웃어 보였다.

무진한테 말하지 않는 건 공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의 행동이 변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였다.

사랑 타령하며 마음을 열어 보이는 무진을 놓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현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게 불안했다.

집 근처에 나타나는 사람이 문제이고, 상대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포와 불안을 반복적으로 주는 거라 특정할 사람이 없었다.

왕 할머니가 이렇게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으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는 할머니가 포기하는 게 쉽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불안함에 신경쇠약에 걸릴 거 같아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일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당하는 게 꼭 자신의 잘못 같았고 감시자가 어디까지 지켜보는지 알 수 없어서 애써 평온한 척하고 있었다.

무진에게는 제 입으로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괴롭히는 목적이 무진의 곁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만 더 버텨 보려고 했다.

경력이 있어야 이직이라도 수월할 테니까 말이다.

*** 

무진은 투자처 관계자를 회의실에서 만나고 사무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박 실장과 시현이 마실 음료수를 몇 개 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살짝 눈인사하고 스쳐 가는 직원들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놓친 것처럼 멀뚱멀뚱 서 있었다.

“비싼 밥만 얻어먹고 남자를 고른대.”

“미국에서 왔다는데 채용 과정에도 문제가 있나 보더라.”

“우리 회사가 낙동강 오리알을 거두는 데는 아니잖아. 채용 과정에서 문제라니.”

“사장님도 미국에 있다가 온 거 아니야? 백야 그룹하고 관계가 있지만.”

“뭐야? 사장님하고 관련이 있나 봐.”

“근데 인수 합병 전에 채용 공고가 났잖아.”

“아무튼, 구내식당에서도 엄청나게 거들먹거렸잖아. 사람이 한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알지.”

“그러니까 사람 속을 모른다는 거지. 남자 고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잖아.”

무진은 직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데도 직원들이 하는 말이 무진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말도 마. 이번에는 사장님을 유혹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소문만이 아니래. 사장실에서 대놓고 이상한 짓을 하다가 사장님한테 혼이 난 적도 있고 여기서 남자를 한두 명 낚은 게 아니라서 품위 손상에 말이 많아.”

“그거 정말일까? 그런 사람이면 진작 쫓겨나거나 말이 나왔을 텐데 너무 갑자기 이러니까 이상해.”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다가 문제가 이제야 터진 거 아닐까?”

“신입 비서인데 좀 이상하다.”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보다 소문에 편승하는 직원이 많아 보였다.

시현의 이름이 거론되자 일일이 반응하는 자신이 싫었던 무진은 못 들은 척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머리와 다르게 몸은 달랐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소문의 진상을 빨리 알아보고 싶었다.

한국에 가까운 친인척도 없고 학교 친구조차 없는 시현의 소문이라는 게 어이없었다.

‘할머니가 회사 내에 사람을 둔 건가.’

짐작할 뿐, 수많은 직원을 의심하며 할머니의 사람을 찾아내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자신의 회사이고

직원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무진을 보지 못했는지, 쉴 새 없이 말하며 험담에 재미를 붙였다.

소문의 출처를 어디서 알아봐야 할지.

그의 수행 비서는 박 실장이고 일정, 자료 정리만 하는 비서는 이시현이었다.

박 실장도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채용 문제를 들먹이는 걸 보면 이시현을 저격하는 게 맞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은 무진은 주먹을 쥔 손을 풀지 못하고 시현이 왜 그런 말을 듣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미국에서 시현을 처음 봤을 때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친구도 많지 않았다.

온갖 아르바이트 하며 간신히 버티며 사는 것 같았는데.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입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험한 소문이 돌고 있을까.

‘어디서 알아봐야 하나.’

회사에 직원의 소문이 도는 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장의 최측근이자 비서는 품위뿐만 아니라 주요 정보를 관리하고 있어서 좋지 않은 말이 도는 건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박 실장이 하는 일이 많아 개인적인 일까지 넘길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무진은 전화기를 들었다.

조용히 알아봐 줄 사람으로 고모의 비서한테 연락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화란 백화점 사장인 강복희의 비서실장에게 시현에게 붙은 추문과 출처 등을  부탁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는 비밀에 부치며.

-사장님께도 말씀드리면 곤란한 겁니까?

“고모는 별말은 안 하겠지만, 할머니가 알면 안 됩니다. 나중에 고모한테는 따로 말하겠습니다.”

-강무진 사장님이 부탁하는 거니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더 감사하고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조사 마치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짧은 설명에도 할 일이 뭔지 아는 최 실장하고 전화 통화를 끝내고 무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라고 보기에 뭔가 꺼림칙한데, 쓸모 있는 조사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별것 없는 일에 고모의 비서실장까지 동원한 게 괜찮은 건지 계속해서 곱씹었다.

소문의 실체가 궁금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파서 없는 말도 지껄이는 게 인간의 습성이라도, 이건 좀 이상했다.

한국에 기반이 전혀 없고 이제 입사한 신입 비서가 소문에 휘둘리는 게 꺼림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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