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74)

44.

“제대로 밑바닥으로 끌어내려야 해.”

장소연이 목소리에 힘을 주고 기태에게 말했다.

“안다니까. 그 여자가 정색하면서 밀어냈지만, 계속해서 접근하면 없던 일도 만들 수 있어.”

“난 김기태만 믿고 느긋하게 강무진과 이시현의 틈을 만들게.”

소연은 기태와 얘기하면서 시현하고 친해질 방법을 생각했다.

점심시간조차 틈을 주지 않아서 강무진을 마주할 일이 적었지만, 시현이 곤란한 일을 겪으면 틈이 생길 듯했다.

정 비서한테 도움까지 받았는데, 진척이 없던 차에 기태가 일을 제대로 해 주고 있었다.

불륜 조장으로 이시현을 확실히 떼어 놓는 것이 수월해질 것 같아서 입술이 자꾸 실룩거렸다.

왕 할머니가 준 돈으로 뭔 짓을 해도 목표인 강무진한테는 도통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치워 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김기태가 예전에 망신을 주는 방법을 구현하는 바람에 목표에 접근하는 게 쉬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비서 일은 언제까지 할 거지? 회사에 소문은 없어?”

“없어. 새로운 사장에 신입 비서라서 걸려들 만한 게 없다니까. 뭐 이상한 말을 듣긴 했어.”

“뭔데?”

“본부장 말로는 미국에서 이시현이 강무진의 애인 대행을 했다는 거야. 남편의 애인 대행을 아내가 했다는 게 웃기지 않아?”

“그건 또 뭐야.”

기태는 놀란 척하면서 키득거렸다.

소연이 하는 말에는 늘 숨은 의도가 있었다.

불건전한 관계라고 소문을 내도 다치는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람 사이에 말이 걸쳐 가니 악화하는 듯했다.

아주 좋은 시기에 재미까지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사실 확인은 안 된 거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것 같았어. 그동안 품행이 어떠했는지 안 봐도 뻔하잖아요.”

“놀랍네. 강무진과 이시현은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불륜 조장으로 돈을 벌었지만, 아내가 애인 대행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렇지? 희한한 인간들이야. 손주한테 불명예를 주라며 돈을 주는 할머니도 이상하고.”

“돈 많은 인간들이 이상한 짓을 한 게 한두 번인가. 우리는 주는 돈만 받으면 되지.”

아무것도 모르는 시현을 이용하는 행위지만, 돈을 받는 만큼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소연과 기태는 재미있는 일이라며 웃었다.

“우리가 뭘 하든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으니까 잘 좀 하자.”

“기태 씨만 잘하면 돼. 이번에 성과를 내지 않으면 그 무시무시한 마귀할멈이 난리를 칠 거 같아.”

“마귀할멈? 하하. 네가 그 할머니를 만나고 겁이 나긴 했구나.”

“돈을 받을 때 그 서늘한 느낌이 흡사 마귀를 만나는 느낌이었어. 그러니까 성공해서 돈 받고 다시는 안 보고 싶어.”

생각보다 기태가 한 짓이 순식간에 퍼져 나갈 것 같았다.

소연은 힘든 일이 생기면 실수하거나 틈이 생기니까 그때 이시현을 통해 강무진을 엮을 생각이었다.

*** 

진보라는 퇴근하고 근처 식당에서 무진을 기다렸다.

친구의 위치는 무엇보다 접근이 쉽고, 시현을 떼어 놓을 만한 스캔들을 터뜨리기 전에 상황을 파악하기도 좋았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라 무진이 거절하지 않아 미리 약속 장소에 왔다.

동화 같은 느낌에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은 곳이었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피자와 파스타를 즐겼던 무진의 입맛을 고려한 장소였다.

오래된 식당이지만 깔끔한 실내에 와인 저장고도 갖춘 이탈리안 식당이었다.

진보라는 비서가 예약한 식당에 와서 만족한

20여 분 뒤, 무진이 식당에서 보라를 보자마자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할 말이 있으면 사무실에서 해도 되는데. 이런 식당은 어떻게 알았어?”

“사무실에서는 일하는 느낌이잖아. 여기는 비서가 예약해 줬어.”

“미국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한국에서 이런 식당을 알아?”

“외모만 미국인이지. 한국에서 맛집은 자기를 통해야 한다고 하던걸.”

마주 앉은 진보라한테 의미 없는 말을 하며 무진이 웃어 보였다.

친구이고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기에 정 없이 굴 정도가 아니었다.

무진은 이전에 시현에게도 이런 식으로 음식을 대접하려고 했던 것 같아서 가벼운 마음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먹이를 뜯어 먹을 듯한 보라의 비서, 장소연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복잡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진보라하고는 전과 다르게 편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회사 얘기는 밖에서 안 하고 싶은데, 투자는 잘 되는 거지?”

“진보라 본부장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돌아가.”

“본인 사업만 할 거야? 백야 그룹으로는 안 가고?”

보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쳐다보는 무진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보라가 사업의 기대치가 무진에게 있다는 듯 뉘앙스를 풍겼다.

“무거운 얘기하려는 거 아니야. 이타적인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에 관한 얘기가 돌기에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나 싶어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무진은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보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 갔다.

보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갑자기 저녁을 사겠다고 해서 뭔 중요한 말이 있는 줄 알았잖아.”

“네가 일만 하니까.”

“일만 하는 건 아니지. 그래도 네가 와서 숨통이 조금 트였어. 월가의 능력자가 위기관리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미국하고 달라서 여기서는 비서나 직원들 눈치를 보느라 사장실에도 약속 없이 갈 수 없으니 무섭던데.”

“뭐가 무서워. 지금처럼만 해.”

무진은 보라의 묘한 뉘앙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이성적으로 보지 않은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시현하고의 관계를 알아도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물론 이런 자리를 만든 게 의아하지만, 진보라가 할머니의 사주를 받았다는 정보가 없었다.

무진은 시현을 붙들어 놓고, 할머니를 포기시키는 일에 몰두해서 주변의 변화에 무감각해졌다.

그래서 독점욕이 있는 무진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이 없으니 진보라의 이상한 행동도 단순하게 넘어갔다.

보통은 백야 그룹을 입에 올리면 자신을 차지하고 욕심을 부릴 텐데, 보라한테는 그런 욕심이 보이지 않았다.

무진은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성이 다른 욕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시현을 곁에 남겨 두는 것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대화가 잠시 중단되고 파스타를 먹다가 보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결혼하려고 귀국한 거 아니야?”

“…….”

“아, 오해하지 마. 구내식당에 갔다가 강무진 사장의 결혼 얘기에 직원들의 관심도가 높아서 듣게 된 거니까.”

대뜸 묻고 말하는 보라를 빤히 바라보며 무진이 피식 웃었다.

“나보다 네가 결혼이 급한 거 아니야?”

“난 일이 우선이야. 겨우 삼십 대 초반인데 벌써 결혼이라니 끔찍한걸.”

“나도 그래.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결혼식이 급한 게 아니잖아.”

“이시현 씨는 젊고 결혼식을 바라지 않겠어? 강무진이 투자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로 거론되는데?”

무진의 표정이 사늘하게 변했다.

별말을 안 하는 무진의 반응에 다시 입을 여는 보라.

“구내식당에서 사장에 관해 떠드는 것은 자유지만, 이게 위기가 돼서 문제 키울 수 있어서 물어보는 거야.”

“밖이니까 회사 얘기는 그만하지.”

“아, 그렇게 해.”

보라는 소소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지만, 무진의 말투에 살짝 얼굴만 붉히고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걸 빼면 아무것도 없던 시현은 누구에게도 적수가 아니었다.

애인 대행 같은 것으로 묶였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아내라고 소개받은 보잘것없는 이시현.

진보라는 백야 그룹의 입성을 위해 왕 할머니가 바라는 걸 단번에 성공하고 싶었다.

시현은 무시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신이 마련한 자리에서 무진의 생각을 알아내려고 했다. 무진의 눈치를 살피던 진보라가 무진에게 술을 권했다.

“와인 저장고가 있다는데 뭐로 마실래?”

“운전기사를 퇴근시켜서 운전해야 해.”

“기사는 부르면 되잖아.”

“한잔하지. 와인은 네가 골라.”

무진은 시간을 끄는 진보라의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감시자가 시현에게만 붙어 있어서 자신은 행동반경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투자 회사를 인수하는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할머니와 연관이 없는 대학 친구이기에 진보라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는데, 왜 이렇게 찜찜한 것일까.

이 모든 게 이시현 탓인가.

무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1년은 같이 일해야 하는 진보라 본부장하고 껄끄러워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문한 와인을 테이스팅하고 잔을 부딪쳤다.

“다 잘되길.”

보라는 상황을 조금 더 말해 보려다가 무진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결혼에 무슨 미련이 있는지 몰라도 아무렇지 않게 비서로 이시현하고 일할 수 있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보라는 기껏 만든 자리에서 친구 관계마저 나빠지는 걸 바라지 않아서 한 발 물러났다.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는 보라는 인간적으로 시현에 관해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구내식당에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 보면 왕 할머니가 아니어도 강무진은 이시현을 곁에 두면 안 되는 것이니까.

한번 고민해 볼 문제이기는 하나, 보라는 왕 할머니가 장소연을 비서로 데리고 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소연도 무진에게서 시현만 치우는 일을 맡았을 게 뻔했다.

보라는 제 생각만 하느라 눈치가 없었다.

식사 후 와인에 디저트까지 먹은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식사는 내가 사지.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내가 저녁 먹자고 한 건데 네가 사면 안 돼.”

“맛있는 거 먹었으니까 내가 살게. 회사에서 봐.”

무진을 식당 밖까지 배웅한 보라는 자리로 돌아와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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