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74)
  • 43.

    위협적인 남자는 폭력을 쓰지 않았지만, 황당한 말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설마, 너! 새로운 물주, 남자라도 잡은 거냐?”

    “저기요. 진짜 이러면 신고합니다.”

    “신고해. 네가 나한테 받은 거 다 뱉어내기 전까지는 하려던 거 해야지. 너 나 모른 척하면 회사에 알려서라도 너 가만두지 않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일까.

    가는 사람 뒤에서 욕설을 퍼붓고 씩씩대는데 무서웠다.

    시현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연락은커녕 얼굴도 처음 보는 남자가 욕을 하는데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사무실에서 사소하게 거울, 볼펜, 개인 컵 같은 게 없어지기 시작했고 책상을 누가 건드리는 듯했다.

    자신의 주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간과할 수 없었다.

    왕 할머니가 어디까지 괴롭히려고 작정했는지 몰라도 이렇게 위험한 사람까지 보낸 것이 놀라웠다.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되짚어 보면…….

    아닐 거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되뇌어 보지만.

    돈이 있는 왕 할머니가 무진의 결혼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햄버거를 사서 길에 서 있던 시현은 회사로 갔다.

    이 상태로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면 일하는 게 나을 것 같고 다시 한번 회사 책상을 뒤집어서라도 증거를 찾아야 했다.

    “가 보면 알겠지.”

    편안한 복장이지만, 마침 회사 사무실 키도 있으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

    시현은 책상에 앉아 먼저 파일을 열고 다음 주, 한 달 이내, 강무진 일정의 짜임을 검토했다.

    검토 자료는 순서대로 되었는지,

    투자처 담당하고의 미팅 시간이 겹치는 게 없는지,

    필요한 정보를 종합, 정리해서 보고 자료를 준비하고 회의 내용도 요약했다.

    강무진의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여러 번 검토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박 실장이 하는 일을 보좌하는 정도지만, 실수 한 번에 욕을 들었던 시현은 정리할 서류는 수십 번 확인했다.

    “쉬겠다고 하고는 이게 뭐 하는 건지.”

    어이없는데도 늦게까지 일하는 사장 때문에 미리 해두면 퇴근을 앞당길 수 있을 듯했다.

    강무진 사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계가 잡혀가면서 매일 있던 회의도 주 1회로 변경되었고, 외부 미팅도 점차 줄어들었다.

    올라오는 결재 서류와 정보 관련한 자료만 정리해 둬도 조금은 수월해지니 연말까지 버티면 박 실장의 눈치도 덜 보고 타 부서 이동도 자유로워질 듯했다.

    매일 검토하고 보고해도 일이 많다는 건 확실했다.

    주말이어서 회사는 조용했다. 특히 사장실이 있는 층에는 아무도 없어서 일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현은 다음 주도 퇴근을 앞당기려고 솔선수범하는 일이 은근히 재미있기도 했다.

    편한 복장에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묶고 음악을 작게 틀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하고 있었다.

    검토한 자료는 다시 파일에 보고하기 좋게 담아두고, 박 실장한테 보안 메일로 보냈다.

    주말에 나와서 하지 않아도 되는 걸 하니까 그저 웃음만 나왔다.

    햄버거는 그새 식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몇 시간을 서류와 모니터만 보느라 어깨가 뭉친 거 같았다.

    햄버거에 사이다를 마시며 감자튀김에 케첩을 찍어 먹고 있었다.

    괜히 집 밖에 나와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고 머리를 식히겠다고 사무실에 와서 일하는 모습이 웃기는데, 햄버거는 맛있었다.

    “진짜 뭐 하는 거야.”

    구시렁거리며 햄버거를 다 먹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려는데 시현의 눈이 커졌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본 것처럼.

    “사장님.”

    당황해서 인사를 해야 하는지, 사무실에 있는 사정을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열려던 창문은 그대로 두고 그의 앞을 지나 책상을 먼저 치워야 할 것 같았는데.

    다짜고짜 벽으로 밀더니 그녀의 입술을 물어 버린 무진의 행동에 놀라서 시현이 버둥거렸다.

    “뭐 하는 거예요! 이러지 말라고요!”

    “주말은 쉬겠다고 데이트도 안 하더니 왜 출근했어? 따로 지시한 일도 없는데 왜 사무실에 있냐고.”

    그의 말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사무실에서 햄버거를 먹었어요. 책상 좀 정리하려고 온 건데.”

    “설마, 보안 자료를 따로 복사라도 하는 건가? 추가 수당 필요 없다고 야근하면서도 구시렁거리면서?”

    “박 실장이 지시한 서류만 정리한 거예요. 책상을 좀 정리하려다가 그냥요.”

    벽으로 밀면서 물어뜯듯 키스해서 시현의 입술이 금세 부어올랐다.

    깨무는 거 아니면 미친 듯이 달려드니 이제는 짜증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내가 아프게 한 거지?”

    “알면 이러지 말아요. 특히 회사에서는 조심해 달라고요!”

    그는 시현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사무실에 온 사람이 없어도 조심히 행동하고 우리는 이러면 안 돼요.”

    시현의 말을 무시하는 무진.

    조금 전과 다르게 부드럽게 입맞춤하니 시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시현을 끌어안고 놓지 않고 있었다.

    “책상만 정리하면 되는 건가?”

    “……네.”

    “어제 안 가져간 게 있어서 온 거니까 일을 봐. 다하고 나면 같이 나가지.”

    “알겠습니다.”

    시현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는 행동을 하면서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시현은 잘 열지 않는 맨 아래 서랍에 양면테이프를 짤막하게 잘라 열리면 접히게 해 두었다.

    사장실에 버젓이 들어와 비서 책상에 손을 대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복도에 CCTV가 있지만, 그걸 보안 팀에 가서 보자고 할 수 없었다. 무진의 결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시현은 확실히 사무실에 드나드는 감시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물건이 움직이거나 없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게 개인적으로 쓰는 사무용품에 표시하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

    ‘내가 예민한 거면 다행인데.’

    낮에 이상한 남자가 제 이름과 핸드폰 번호까지 아는 게 소름 돋아서 아무 일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번호를 변경하는 건 며칠 후로 미루었다.

    사장실에 누군가 들어와 물건을 건드리는지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책상을 닦고 사무실 정리를 끝낸 시현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의 집무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을 다 마쳤습니다. 가 봐도 될까요?”

    “같이 나가자고 했잖아. 컴퓨터만 끄면 돼.”

    그는 놓고 간 게 있었는지 홀쭉했던 서류 가방이 빵빵해져서 있었다.

    말없이 그를 따라 주차장에 간 시현은 무진이 오피스텔 앞까지 바래다주는 걸 당연시하고 있었다.

    월요일에 보자며 그대로 돌아가는 차를 보면서도 멍해진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거칠었던 키스에 부풀어 오른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 

    소연은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일해도 무진을 만날 수 없었다.

    진보라 본부장의 진짜 비서가 와서 서류 정리조차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을 배회하다가 보안 직원한테 걸리기만 했다.

    사원증이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몹시 불쾌한 경험이었다.

    “이시현이나 진보라하고 전혀 다른 나를 못 보는 게 말이 돼?”

    투덜대면서 도로 진보라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소연.

    박 실장은 자리를 자주 비워서 시현만 없으면 무진의 사무실에 번질나게 드나들 텐데, 자신을 훼방 놓는 느낌이었다.

    “이야. 네가 이런 데서 일한다고?”

    웬만한 사무실 두세 개를 연결한 듯한 넓이에 기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투자 회사의 본부장 사무실에 있는 가구는 최고급에 일개 비서라는 소연의 자리에도 고가의 물건이 있었다.

    소연하고 한 팀으로 일하는 기태는 진보라 본부장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기태는 번쩍번쩍한 가구에 널찍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큰돈을 받고 나면 번듯한 사무실을 만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소파에 앉아 보고 사무용품을 만지면서 기태는 소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임시잖아. 우리는 강무진이나 이시현을 불륜으로 만들어야 해.”

    아무것도 모르고 단순히 시현의 동태만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는 소연은 바쁜 강무진을 자주 보지 못해서 아쉬운 건 드러내지 않았다.

    “알아. 저번에 말한 대로 어제 낮에 일을 벌였지. 조만간 네가 원하는 대로 될걸.”

    “정말? 말도 안 하고 벌써 접근했어?”

    “쉽더라. 메시지를 수시로 보내고 집 근처에서 아는 척하며 나쁜 년으로 만들었지.”

    “김기태가 칼을 뽑으면 확실하게 하지. 효과는?”

    “어제 한 번 했으니까 몇 번 더 흔들면 미칠 거야.”

    장소연은 기태가 기특한 일을 했다며 흡족하게 웃었다. 착수금이 1억 원이었는데 사무실에서 비서 노릇이나 하면서 목표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태를 부추겼고 몇 달 만에 이시현을 잡는 일에 확실히 동참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안다고. 그러니까 너도 정보를 확실하게 줘. 그 여자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서 접근이 쉽지 않아.”

    소연은 시현에 관해 자세한 걸 알아낼 수 없어서 기태한테 사는 곳과 연락처만 줬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만약 강무진을 조사하다가 걸리면 착수금을 잃을 수 있었지만, 이시현은 떼어 놓을 인간이니 뭐든 제공하는 게 가능했다.

    진보라 본부장으로부터 얻은 정보로도 남자가 접근할 수 있으니 정말 쉬운 일이었다.

    “길에서 망신을 줘도 돼. 그 여자를 도울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 사모님들 건드리는 것하고 다른 거 분명해?”

    “별 볼일 없는 여자야. 부모도 없고 돈도 없어.”

    “넌 그 남자를 어떻게 할 건데? 이시현을 내가 처리하면 그냥 돈만 받는 건가?”

    “말도 마. 어찌나 쌀쌀맞게 구는지 정떨어졌어. 같은 층에서 일해도 눈길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니까.”

    장소연은 강무진을 아예 못 본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어 보려고 했으나 틈이 없었다.

    진보라 본부장한테 얻은 정보로도 접근할 수 없는 남자는 처음이어서 장소연도 놀라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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