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시현은 일부러 불쾌감을 주려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참고 있었다.
상대의 의견 따위는 그냥 무시하는 모습이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미래를 살짝 보는 듯한 게 무진에게 고자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전해 들었던 말은 없습니다.”
“정보 수집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서 이시현 씨가 걱정돼서 만나자고 한 건데.”
“강무진 사장님이 누구하고 뭘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비서로 채용된 것은 공적이라는 걸 알아두시기를 바라요.”
“오호. 센 척하네요. 정말 왕 할머님이 이시현 씨를 어떻게 할지 겁나지 않아요?”
“이만 가겠습니다. 음식값은 알아서 계산하세요.”
시현은 신경질적으로 대처하려는 걸 꾹 참고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식당을 나섰다.
어이없는 건 둘째 치고 무시와 막말을 서슴지 않는 진보라하고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살면서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인간을 보면 갑갑증에 숨이 막혔다.
계약을 배제하더라도 무진과 자신은 혼인 중이었다. 정말 가진 게 많아서 들러붙는 기업, 사람이 많은지 정보 수집이 아니어도 알 것 같았다.
시현은 진보라가 한국에 와서 같은 층에서 일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정 비서가 진보라에게 다가가더니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로 진보라를 타박하듯 말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가 버리고 대화가 안 된 건가요?”
“원래부터 말이 안 되는 여자였어요.”
음식이 나오자 포크를 집어 든 보라가 샐러드를 팍팍 찍어 먹더니 술을 주문했다.
누구에게도 거절당한 일이 없었던 진보라는 대화 자체가 연결되지 않은 시현 때문에 짜증이 났다.
백야 그룹에 무진하고 같이 입성하려면 시현을 떼어 내야 했다.
왕 할머니하고의 조건도 중요했다.
“진 본부장 말이 먹히지 않는다면, 아예 손을 떼는 게 어떻습니까?”
“정 비서님. 겨우 한번 대화 나눈 거예요. 무진이랑 이시현은 함께 못 가요.”
“기다릴 수 없는 시기입니다.”
“조만간 터질 스캔들로 이시현을 무진의 곁에서 떼어 놓을게요. 왕 할머님이 심려하실 일 없을 거예요.”
대화 한 번에 떨어져 나갈 인간이면 돈 몇 푼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다.
진보라는 왕 할머니가 거액을 쓰고 있고 장소연이라는 여자까지 염탐꾼으로 붙인 걸 잘 알고 있었다.
“스캔들이 강무진 사장님을 흠집 내면 안 됩니다.”
“그 정도는 알고 준비했으니까 정 비서님은 왕 할머님께 말씀이나 잘 전해 주세요.”
여전히 해결되는 게 없으니 보라는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정 비서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은 진 본부장이 백야 그룹에 귀인이 될 거라고 믿으시니까요.”
“맡겨 주신 일은 조만간 확실하게 끝맺을 거예요.”
“귀국하면서 준비해 둔 게 있는 건가요?”
“그런 거죠. 왕 할머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제 선에서 해결하는 거니까 약속도 지켜 주세요.”
능력만큼 진보라는 심리전에 강했다.
사람을 미치게 하거나 투자를 끌어낼 때 고객의 심리를 이용했다.
개인적인 일에서는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방법은 또한 어렵지 않았다. 주변 사람을 이익의 규모로 따졌다.
그러다 보니 사람 하나 무리에서 떨어뜨리거나 바보로 만들기도 쉬웠다.
보라는 그렇게 시현을 먼저 흔들고 추잡한 스캔들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백야 그룹으로 단숨에 이직할 것이고. 무진의 옆자리는 왕 할머니가 알아서 메워 줄 테니 어렵지 않았다.
무진이 보라의 바람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게 뻔해서 시현을 흔들어 대는 거였다.
진보라는 며칠 전, 무진이 시현의 험담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시현한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았다.
준비는 몇 년 동안 했다는데, 진보라가 볼 땐 느닷없이 한국으로 가 버린 무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라는 워낙 자신이 가진 걸 내세우며 사람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을 즐겼다.
무진하고 친구지만 가끔 술을 마셔도 적당히 비위 맞추며 정보만 캐내는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진보라는 안일한 행동으로 시현을 마주한 게 실수인 것조차 몰랐다.
“강 사장이 뭔가 홀린 거죠. 어떻게 아무것도 없어도 그렇지 너무하잖아요.”
“그건 진보라 본부장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군요.”
“정 비서님은 왕 할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못 보는 거예요. 남자는 익숙한 맛보다는 흥미로운 것에 눈길이 간다고요. 무진이가 착각하는 게 그런 거고요.”
“착각이라…… 그런 거면 좋겠군요. 어르신께서 오래 기다리지 않을 거니까 진 본부장은 서둘러 주세요.”
정 비서 또한 뭔가 대단하게 일이 정리될 줄 알았다.
장소연 같은 사람을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서너 명 심어 뒀다.
진보라 본부장이 무슨 욕심을 내는지 몰라도 백야 그룹에 임원 자리를 주는 조건으로 이시현을 떼어 내겠다고 했다.
정 비서는 적당한 사람을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꼬인 일을 풀어 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 비서님도 식사하세요. 입맛에 맞을 만한 것으로 주문했거든요.”
“이시현이 가 버릴 거라고 예상한 건가요?”
“당연하죠. 이런 데서 밥이나 먹을 줄 알겠어요? 미국에서도 무진이하고 햄버거나 먹은 거로 알아요.”
“어머나.”
보라의 말에 정 비서는 다 알지만 모른 척하고 나오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국에 시현을 도와줄 만한 친인척이 없으니 백야 그룹과의 싸움 자체가 안 되는 거였다.
그리고 거짓도 몇 번을 반복하면 어느새 진실로 둔갑하는 게 사람의 말이었다.
정 비서는 진보라가 터뜨릴 스캔들에 신경을 쓰면서 왕 할머니께 보고할 것을 찾고 있었다.
한 달 내에 장소연이든 진보라 본부장이든 해결책이 나와야 하니까.
돈만 받으면 남자 여럿을 유혹해서 돈을 뜯어내는 장소연도, 백야 그룹의 입성을 약속한 진보라도 뚜렷하게 결과물을 내놓지 않았다.
정 비서는 부디 어느 한쪽이라도 이시현을 강무진 사장에게서 떼어 놓기를 바랐다.
정 비서는 백혜련을 압축해서 찾았지만, 백혜련을 어떻게 써먹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 스캔들로 확실하게 이시현을 망가뜨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소문으로 끝나면 안 되죠. 그깟 년한테 안락한 삶을 주지 않을 거예요.”
“진 본부장은 강무진 사장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같이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인이라서 가까워졌지만, 친구일 뿐이에요.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요.”
정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시현의 일로 왕 할머니의 눈 밖에 나서 내쳐질 뻔한 걸 생각하면 열불이 났다.
이시현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덤으로 망신까지 당해서 강무진 사장 주변에 얼씬도 안 하길 바랐다.
왕 할머니로부터 추가로 받을 돈만 생각해도 이시현은 없어져야 할 인간이었다.
‘허황한 꿈을 꾼 탓이지. 감히 누굴 넘봐.’
보라와 정 비서는 신이 난 듯 와인을 마시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돈이 들어도 시현만 처리하면 되고 친구라며 곁에서 함께했던 무진의 마음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진보라.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도 돈이 있는 자의 특권 같은 거라며 격에 맞지 않은 시현을 치울 생각뿐이었다.
정 비서는 한 달 사이에 일이 마무리될 것 같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
시현은 진보라한테 제대로 한마디 쏘아붙이지 못하고 집에 와서 씻고는 소파에 널브러졌다.
지각한 날이어서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진보라하고 저녁을 먹겠다고 시간을 쓴 게 아까웠다.
그리고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시당한 게 억울해서 짜증이 났다.
군에 있는 동생이 다음 주에 휴가를 나온다는 메시지에 그나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진보라와 황당한 대화 속에서 왕 할머니가 자꾸 떠올라서 심란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진보라와 강무진이라.
잘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기가 차는 커플이었다.
“남자로서 좋아하지 않다고? 그것도 이상한 말이잖아.”
강무진하고 잘되면 백야 그룹의 자금을 주무를 수 있을 텐데.
시현은 커피믹스를 꺼내서 뜨거운 물을 붓고 저었다. 자그마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진보라 본부장과 맛있게 저녁을 먹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쫄쫄 굶고 있으니 이것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생의 메시지가 없었으면 빈속에 커피만 들이부었을 텐데.
시현은 달콤한 커피믹스 향을 느끼며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들어가니 배가 고파졌다.
모자를 눌러쓰고 밖에 나가서 떡볶이라도 사려고 일어나는데 탁자에 올려 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핸드폰에 뜬 메시지를 보고 시현은 미간을 좁혔다.
***
무진은 일이 예정보다 빨리 끝나서 시현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회사 일이 많아 박 실장과 시현을 본의 아니게 혹사하고 있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시현하고 조금 더 시간을 가지면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감정만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시현이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핸드폰을 들고 연락하려는데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예약제로만 운영한다는 식당에 들어가는 걸 봤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근처에 주차한 뒤 조심스레 따라가 부르려는데 식당 입구에서 진보라를 보게 되었다.
친분이 없는, 그저 자신의 소개로 일면식 정도만 있는 두 사람의 만남에 무진은 궁금했다. 망설이는 사이 시현을 부르지 못했다.
도로 차에 와서 시현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그는 생각보다 일찍 집에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연락할지 말지 머뭇거렸다.
식사했다고 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시현이 진보라 본부장한테 뭔가 알려 주러 갔다고 하기에도 이상해서 혼란스러웠다.
할머니하고의 일을 숨기고 침묵하던 그녀의 얼굴이 겹치면서 갑자기 무진은 분노에 휩싸였다.
“미쳤구나. 시현한테 뭐라고 말하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가슴이 갑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