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74)
  • 39.

    시현은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월요일에 늦잠을 잤다.

    박 실장한테 사정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간신히 무진이 조찬 모임으로 사무실에 없을 때 출근했다.

    사무실에 막 뛰어서 들오자 박 실장이 웃는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시현 씨, 뛰지 않아도 됩니다. 조찬 모임이 늦어지고 있어서 사장님 한 시간 후에 올 겁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석 달 넘게 야근에 이른 출근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실장님은 천하무적인가요? 그 많은 일을 하고 어떻게 버텨요?”

    “사장님이 주신 수당으로 보약 지어서 먹고 있습니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체력이 고갈된 상태는 누구나 같은 모양이었다.

    “보너스가 약값으로 쓰이면 좀 억울할 거 같은데요.”

    시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컴퓨터를 켠 상태로 박 실장의 책상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실장님. 커피 안 먹었으면 준비할까요?”

    “곧 나갈 거라서 시현 씨 것만 챙기면 됩니다. 그리고 사장님 오시기 전에 파일 보낸 거 정리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박 실장이 파일로 보낸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시현은 커피 한잔을 마시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왕 할머니가 감시자를 보내지 않을 때까지 이 상태로 일하기로 했으니 불만을 토로해 봤자 의미가 없었다.

    시현은 박 실장과 무진의 눈치만 보며 묵묵히 주어진 일만 진행했다.

    그때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진보라 본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이 비서, 아까 열심히 뛰던데 무슨 일 있어요?”

    “없습니다. 사장님은 안 계십니다.”

    “아, 사장님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에요.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퇴근하고 여기서 만났으면 하는데 괜찮죠?”

    “알겠습니다.”

    손가락에 끼워서 메모를 전달받은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이 나가자 한숨을 내쉬었다.

    박 실장이 사무실을 나간 지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출근하던 것까지 보고 있었다는 게 꺼림칙했다.

    시현은 메모에 쓰인 장소를 보며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미국에서 조금 일면식이 있을 뿐인데, 굳이 장소까지 정해서 나눌 이야기가 있을까.

    친하지도 않고 무진에게 대학 친구라고 소개만 받았을 뿐.

    껄끄러운 사이니까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시현은 무진에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왕 할머니가 진보라 본부장을 안다면? 꼬리를 무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찜찜했다.

    이후 시현은 조찬 모임에서 들어온 무진하고는 말도 나눌 새가 없었다.

    처리할 일이 산적해 있어서 사장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시현은 외부에 있는 박 실장한테도 보고해야 하고, 정리된 자료, 결재 서류를 사장실로 가져갔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인수인계가 정리되면서 야근도 줄어들었다.

    덕분에 퇴근할 때 눈치를 보지 않았다.

    “박 실장이 사무실에 오고 있으니까 퇴근해.”

    “네.”

    “딴 길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

    시현은 무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꾸벅 고개만 숙이고 사장실을 나왔다.

    시현은 아침에 진보라한테 받은 메모를 가방에 구겨 넣고 책상을 정리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사장실에 무진이 남아 있고 곧 박 실장이 올 거라서 불을 다 켜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무진한테 잡히고 첫 직장에서 일한 지 이제 넉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와 관계의 변화보다는 계약을 어떻게 마무리 짓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무진을 생각하다가 지하층까지 내려갔던 시현은 화들짝 놀라서 계단을 통해 1층에 올라와서 부랴부랴 메모에 적힌 장소로 갔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 건물에서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메모까지 주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퇴근할 때 잠깐 얘기하자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습고.

    진보라가 본부장으로 왔을 때부터 찜찜하고 불쾌한 느낌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랑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경계하고 있었다.

    진보라 본부장하고는 친분이 없어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타인에게는 철저하게 무심함으로 거리를 둬서 시현은 진보라에 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밥 한 끼 먹고 무진과 관련한 걸 물어보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조용한 식당이었다.

    사람도 드문드문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은 곳이어서 창가에 앉아 있는 진보라를 보고 다가갔다.

    “먼저 와 있으셨네요.”

    “퇴근이 늦은 건 아닐 테고, 앉아요.”

    인사도 어정쩡하게 하고는 마주 앉았다.

    식당 직원이 물잔을 채우고 뭘 먹을지 묻지도 않은 채 진보라가 메뉴를 주문하는 걸 보고 있었다.

    장식이 고급스러운 식당에 테이블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한 테이블 위치 선정 같았다.

    시현은 주변을 힐끔 둘러본 뒤에 눈을 크게 뜨고 진보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건가요?”

    “강 사장이 한국에 왜 왔는지 알아요?”

    “일 때문이겠죠.”

    “두 사람이 결혼한 거 다들 모르는 눈치던데.”

    “사장님은 사생활이 드러나는 걸 꺼리니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시현은 일부러 숨기는 일을 아는 듯한 진보라의 말투가 거슬렸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하게 말했다.

    “난 이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친구의 등골을 빼 먹었으면 물러날 때도 알아야죠.”

    “…….”

    “적당한 남자를 고르는 게 어려우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강 사장만 한 남자가 없어서 그래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이시현 씨가 콧대가 높다는 건 알지만, 이제 무진을 놓아줘야 하지 않겠어요?”

    시현은 무진과 진보라가 대학 친구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었다.

    미국에서 계약 관계로 무진의 맞선녀들을 여러 번 만났기에 욕망에 눈이 시뻘겋게 되는 걸 자주 목격했다.

    그렇기에 진보라의 눈빛은 무지와 경멸일 뿐, 무진에게 애틋한 감정이 드리우지 않아 보였다.

    시현은 진보라가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놓아줘요. 강 사장은 이런 회사가 아니라 백야 그룹에서 날개를 달아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거라면 사장님이 알아서 하겠죠.”

    “할머니와 어머니까지 등지게 하고 이시현 씨가 얻을 게 뭐가 있을까요? 그쪽이 가져서 안 되는 남자잖아요.”

    “무례한 말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네요.”

    “잘 생각해 봐요. 이시현 씨 때문에 쓸데없는 말이 나오면 강 사장도 곤란할 텐데. 물고 늘어지지 말아요.”

    “저녁 먹는 건 그만둬야겠습니다. 진보라 본부장님.”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곤란해질 텐데 괜찮겠어요?”

    시현은 진보라의 말에 멈칫했다.

    본부장이라고, 은근슬쩍 위협을 가하려는 진보라 본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국 월가에서 일한다는 진보라가 갑자기 한국에 온 것이 이상하지만, 사생활로 왈가왈부하는 건 더 이상하고 황당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관심 밖의 사람이고 무진과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미국에서도 시현의 눈에 정말 별로였던 진보라였다.

    주변에서는 친구 이상이라며 진보라와 무진을 연결하려고 했으나 무진은 결혼한 몸이었다. 그리고 진보라가 무진 외에 다른 이성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다는 걸 알지만, 남녀의 감정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시현은 물 한 잔을 들이켰다.

    “곤란해지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하는 일이 나하고 엮인다고 스캔들이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요?”

    “…….”

    “왕 할머니가 가만히 있는 것 같아요? 무진은 백야 그룹을 놓지 못해요. 그러니까 계속 맞선을 보고 여러 여자를 만나겠죠.”

    “진보라 본부장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도와준다니까요. 돈이 필요하면 강 사장보다 많이 줄 수 있고 오피스텔이 아니라 건물 하나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어요.”

    진보라는 거침없이 시현에게 막말을 내뱉고 있었다.

    전공을 살리라는 둥 오늘부터 진지하게 다른 남자를 만나 보는 게 어떠냐는 둥.

    시현은 진보라의 악의적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대꾸할 말을 고르느라 멈칫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계약 관계뿐만 아니라 버젓이 결혼한 강무진을 도대체 누구와 엮으려는 건지, 불쾌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본부장님이 잠깐 보자고 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사적인 일로 이러쿵저러쿵 듣는 건 사양합니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사적인 얘기를 하는 거 불편합니다.”

    최대한 웃는 낯으로 해야 할 말을 해 버렸다.

    시현은 누구에게든 싫은 말을 안 하는 편이지만, 불쾌한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바보는 아니었다.

    “진짜 내가 제안한 것을 차 버리겠다고? 강 사장이 누구하고 결혼하려는지 몰라서 그래요?”

    “진보라 본부장님하고 결혼할 거면 사장님이 귀띔했을 거예요.”

    “나 아니에요. 강 사장을 이성으로 본 적 없어요. 강 사장의 능력이 아깝고 너 같은 애가 들러붙어서 괴로워하니까 나선 거죠.”

    하. 이건 또 무슨 말이래?

    누가 누구한테 붙는 건데!

    시현은 남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모욕을 일삼고 제멋대로인 게 짜증이 났다.

    설마, 강무진의 결혼 상대가 진짜 있는 한가?

    그렇다고 굳이 무진과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하고 강 사장 옆에서 꺼지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겠어요?”

    “사장님한테 친구로서 말해 봐요. 그게 더 빠르지 않겠어요?”

    “이시현 씨. 내가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까요?”

    시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나선 건 이시현 씨가 안타까워서 그런 거예요. 조만간 스캔들이 터진다는 정보가 있거든요.”

    스캔들? 정보?

    시현은 왕 할머니한테 수없이 모욕적인 언사로 당한 처지여서 진보라의 말이 확 와닿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자리에 나와서 뭔가 대단한 걸 줄 것처럼 말하는 진보라가 신기할 뿐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진보라한테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시현은 아무리 계산기를 두들겨 봐도 진보라의 계산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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