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강릉에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시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제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회사가 인수 합병으로 한창 바쁜 시기에 채용된 신입 비서로서 일도 소홀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일하고, 집에 오면 백혜련과 왕 할머니, 정 비서 등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수시로 사장실에 들락날락하는 장소연의 염탐하는 느낌에 신경이 곤두섰다.
진보라 본부장한테 무언가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만 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현은 박 실장이 없을 때 사장실에 오는 소연의 행동을 다르게 보지 못했다.
화려한 옷과 짙은 화장을 해서 안 된다는 사내 규정이 없었으니까.
다만 비서처럼 일하지 않는다는 게 의아할 뿐이었다.
시현은 강릉에 갔다가 와서 여행보다는 쓸쓸함, 무진과 이별을 더욱더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7시네.”
박 실장과 무진이 외부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시현은 사장실 문을 점검하고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조용한 술집을 찾아 칵테일 두 잔 정도 마시고 시현은 하염없이 목적지도 없는 사람처럼 터벅터벅 걸었다.
뻥 뚫린 마음을 채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멀어지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 앞에서 내렸다.
걸어가는 시현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왜 속상해서 이러는지 갑갑하고 짜증이 나며, 무진과 왕 할머니 사이에서 생활이 엉망진창 되는 게 억울해서 폭발 직전이었다.
무진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면서도 감시자들의 시선이 계속 느껴지고 누군가가 그와 자신의 관계를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사생활이 뭐라고 떨치지 못한 마음이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칵테일 몇 잔에 무거운 다리로 한 걸음 내디디며 천천히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데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정시에 퇴근했을 텐데, 10시에 집이라.”
갑자기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 놀란 시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왜…….”
그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는 시현의 등에 팔을 두르고 뺨에 입맞춤했다.
늦은 시각이어도 길가에는 사람이 있는데.
눈물을 닦을 새도 없었다.
그의 입맞춤은 뺨에서 입술로…… 능숙한 어른의 키스였다.
멍해진 시현은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입술을 달싹일 뿐 그의 빤히 보고만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눈물 자국을 닦아 주고 말없이 뒤돌아섰다.
걸으면서 우는 시현하고 같이 있으면 왜 울었는지 물어볼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뒤돌아 가려는 무진을 시현이 붙잡았다.
“무진 씨.”
무진은 시현이 운다고 그게 자신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훌쩍거리는 걸 보고 달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장과 비서도 아닌,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할 만큼 감정이 격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잠깐 들어와서 커피라도 마시고 가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시현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좁고 한두 명 간신히 앉을 만한 소파에 털썩 앉아서 손짓했다.
“커피는 됐으니까 여기 앉아.”
집주인처럼 말하는 무진을 쳐다보다가 시현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훌쩍거리는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깨에 기댄 그녀의 곁을 지켰다.
“눈 감고 가만히 있어.”
나직이 목소리가 들리면서 희한하게 시현은 무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부드러운 손길에 시현은 스르르 눈을 감고 잠들었다.
소파에 기대 다리를 끌어올려 몸을 웅크리는 시현을 가만히 바라보는 무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지 마.”
도망치면 잡아야 할 정도로 사랑하는 시현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계약 애인을 받아들인 사정과 할머니한테 돈을 받고 사라진 것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무진은 외부 일이 끝나서 집으로 가려다가 방향을 바꾸어 시현이 사는 곳에 왔다.
나오라고 할지, 그냥 오피스텔로 가서 얼굴이나 볼지 생각하던 차에 시현이 택시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취한 시현을 보는 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집에 가는 것만 보려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게 우는 것 같아서 차에서 내려 뒤를 따라갔다.
무언가 체념한 듯한 눈빛에 닦지도 않은 눈물 자국에 저도 모르게 입맞춤해 버렸다.
생활비와 할머니한테 받은 돈이 상당할 텐데 좁은 오피스텔에 사는 게 못마땅했다.
이름을 부르며 손짓하는 게 술에 잔뜩 취한 듯해 보였다.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무진은 시현이 한 말을 곱씹으며 슈트 상의를 벗었다.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든 시현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뺨에 흐른 눈물도 지웠다. 짙은 어둠이 모든 걸 삼킬 때까지 있었다.
왜 울고 있니?
숨은 걸 알고 영원히 못 찾을까 봐 걱정했던 무진.
할머니를 만났으면 왜 따지지 않고 몸을 숨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진은 마음도 여리고 쓸데없을 정도로 성실하던 시현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악의적으로 시현을 괴롭혔을지 짐작만 하기에 지금 상황이 괴로웠다.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돈을 받고 자신을 버린 것은 나중에 물을 수 있었다.
할머니 말대로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흥정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시현을 사랑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니 이만한 괴로움은 자신의 몫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법적으로 시현을 놓아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아내를 탐하는 일에 꺼림칙함이 없다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육체적인 탐닉만 있는 부부가 어떠한가.
그렇게라도 시현을 곁에 둘 수 있다면 문제가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진은 할머니와 시현의 사이에 있던 일이 궁금했다.
***
며칠 후.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감시자를 따돌리기는커녕 무진하고 함께 있는 것을 보여 주느라 시현의 사생활은 보호되지 않았다.
집에서만큼은 회사, 무진, 왕 할머니, 백혜련 등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현은 퇴근해서 오피스텔 문을 열자마자 무진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피스텔로 가고 있어
시현은 점차 일이 줄어들고 있어서 정시에 퇴근해서 집에서 실컷 잠을 자려고 했다.
“청소도 안 한 집에 왜 오는 건데.”
이건 합의된 게 아니어서 불쾌감에 시현의 구겨진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진을 마주하고 나서 한 차례 짜릿한 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시현은 씻고 언제 침대에 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잠결에 눈만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기 집에서까지 밤을 지새우는 짓을 하면 회사에 소문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입 비서와 회사를 사들인 새로운 사장의 스캔들.
시현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겁에 질릴 지경이었다.
두려움도 잠시, 그가 씻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시현의 옆에 누웠다.
“설마, 여기서 자려는 거 아니죠?”
“한집에서 살자는 거 아니니까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 뜨고 째려보지 마.”
시현은 짓궂게 말하며 손가락을 깨무는 그의 가슴팍을 세차게 내리쳤다.
“깨물지 말라고요!”
그는 웃기만 했다.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아 그를 좋아하는 뭇 여성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왕 할머니 측근은 무진의 결혼 여부하고 상관없이 여자를 끊임없이 밀어 대고 있었다.
일 잘하고 돈 많고, 잘생기기까지 하니 나무랄 게 없어서 그런가?
시현은 외향적인 것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진의 결혼을 가지고 흥정하는 왕 할머니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키스가 좋아서 빠져들었기에 불만이 있었다.
시현은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면서 살짝 잇자국이 난 손가락을 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돈이 많고 잘생기면 뭐 해.’
시현은 동생하고 둘이서 살 생각만 하기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속이 상하면 언제나 혼자 울었다.
아버지를 잃고서 동생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슬픔이 자신을 잠식해 가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시현은 며칠 전, 혼자 칵테일을 마시고 오피스텔 앞에서 그를 만나 집으로 불러들인 걸 기억하지 못했다.
몽롱한 상태여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다정함을 느끼는 것은 좋았던 과거에 묶인 것 때문이기에 스스로 책망했다.
“그만 가요. 여기는 내 공간이에요.”
“데이트하다가 내 집에 오는 것도 싫다면서. 비서가 퇴근도 빨리하고 사장을 이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지.”
“박 실장님이 있는데 내가 왜 사장의 퇴근을 신경 써요. 감시자만 따돌리면 되는 거잖아요.”
“몰라. 멈추지 않을 거니까 눈 감지 마.”
다시 밀어붙이기 시작하며, 열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를 탐닉하고 그는 열화에 빠져들었다.
쉴 새 없이 시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현은 그에게 각인이라도 된 듯 마음을 지울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밀어내기는커녕 채워가는 그에게 의지와 상관없이 열렬히 휘몰아치는 폭풍에 빠졌다.
하나가 되어가는 순간, 벌어지는 틈이 없기를 바라는 시현.
그가 그녀의 등을 핥고 어깨를 깨물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밤하늘에 별들이 부끄러워 숨은 듯 캄캄해질 때까지 멈춤이 없었다.
시현은 지쳐서 손가락도 까닥 움직일 힘이 없었다.
퇴근해서 시작된 격렬한 관계로 시현은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내쫓는 것도 잊은 채 아찔한 쾌락에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시현아.”
“응…….”
“제발 숨을 생각하지 마. 할머니보다 날 믿어 봐.”
“싫어.”
“끝까지 나한테…… 이러지 마.”
그는 폭주며 시현을 탐했고 못 하겠다며 울먹이는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이며 안았다.
흔들어도 잠결에 대답만 간신히 하는 시현을 바라보는 무진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나 미칠 거 같아. 요즘 왜 이러는지. 네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
잠든 그녀가 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미치겠다며…….
할머니의 압박에 숨이 막혀 그저 곁에 머물러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현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