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74)

37.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는 그는 거칠어져서 몸짓만큼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현…….”

울긋불긋 그의 입술이 지나는 곳마다 흔적이 남았다.

열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그녀의 몸은 들썩이고 입술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집요한 그의 몸짓에 발끝이 저렸다.

여행은 핑계이고, 대화하려는 것도 단순한 분위기 고조를 위한 말일 뿐이었나.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시현은 끊임없이 자신을 어루만지고 탐하는 그에게 자꾸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 타령하는 게 그의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할머니는 절대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무진이 싫증 느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무는 인형이 될 생각도 없었다.

혼인 중에도 맞선이 줄지어 있는 무진을 원망하지 않았다. 시현은 그저 이 관계가 허무하게 끝나는 걸 알고 싱숭생숭했다.

몸만큼은 숨기고 싶어도 정직하게 그에게 반응하는 게 우습지만.

아직은 부부라는 걸 강조하는 그에게 끌려가며 그녀도 작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마의 속삭임 같은 거짓된 관계.

본능만 남은 껍데기만 부부인 그의 키스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달콤한 키스였다.

그만하고 싶어.

아내도, 그와 일하는 것도.

시현은 무진하고 마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진은 시현의 이마에 뺨에 입맞춤하며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 

무진은 잠에서 깨서 천장을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지었다.

아직도 할머니가 꾸민 일에 시현이 얼마만큼 엮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하게 돈을 받고 몸을 숨겼다는 것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시현을 다그칠 수 없었다.

무진은 옆에 누운 시현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시현아, 일어나.”

“몇 시예요?”

그는 귀엽게 눈을 비비는 시현을 바라보다가 괜히 장난치고 싶어서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파. 도대체 왜 자꾸 무는 거예요?”

“그냥. 흔적 남기기?”

“물지 마요.”

“내 마음이야.”

“장난도 정도껏 해요.”

“애정 표현이라니까.”

눈을 흘기며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는 시현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은 공허했다.

그 짧은 한 달 동안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몸부림치던 걸 알까.

치졸하게 이런 짓까지 해서 곁에 있으면서 바라만 보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동안 가족의 기대로 살아왔던 자신에게 시현은 첫사랑이었다. 지금도 갈등하며 놓을 수 없는 아내였다.

잠시 시간을 갖고 상황을 정리하든, 시현에게 할머니한테 무엇을 보장받았는지 들어도 붙잡고 싶었다.

쉽게 돈을 받고 떠난 줄 몰랐지만, 한 달 내내 그녀를 찾으면서 마음의 깊이를 깨달았다.

“외출 준비해.”

그는 큰 소리로 말하고 다른 욕실을 사용했다.

호텔 펜트하우스에 있었던 게 미안했던 그는 외출 준비를 마친 시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강원도 강릉의 바다가 색다른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음처럼 무진과 시현은

손을 잡았다.

펜트하우스 창문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가를 걸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잖아요.”

“달라질 수 있지.”

“그런 희망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려요. 우리는 갈 길이 정해진 사람이니까 희망 자체를 가지지 말아요.”

“넌 너무 매정해.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맞아요. 그러니까 무진 씨는 절망에 빠질 일이 없겠죠.”

피식 웃으며 그는 시현의 손을 꽉 잡고 길을 걸었다.

짧고 열정적인 부산 여행은 이혼보다는 결혼 생활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무진은 시현하고 떨어진 시간이 오래된 게 아닌데도 허전하고 공허한 것을 바로 느꼈다.

그래서 무진은 시현을 잃고 상실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같이 일하고 거리를 좁혀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다.

오히려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할머니가 보낸 사람들 때면서 주변을 경계하는 게 심해 보였다.

눈과 귀를 막고 둘만 생각하자고 붙들고 싶은데 시현이 들어주지 않는 게 야속할 뿐이었다.

이혼이 일방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진은 할머니와 시현의 거래가 무엇이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도망갈 만큼 자금이 있을 텐데 할머니한테 거액을 받아야 했던 사정은 뭘까.

처남의 목줄이라도 쥐고 흔들었을까.

온갖 잡다한 생각이 무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생활이 새어 나갈까 봐 걱정하면서 시현은 일과 계약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현의 여린 마음을 이용해 이렇게 함께할 시간을 원하는 게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든 자신을 믿어 주지 않아 도망치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시현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정 비서가 찾고 있는 백혜련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무엇이냐 말이다.

무진은 시현의 손을 꽉 잡은 채 목적지가 없는 것처럼 해안가를 걸었다.

“바다색이 예뻐요.”

“네가 더 예뻐.”

“입에 발린 말은 강무진의 스타일이 아니지 않아요?”

“뭐 어때.”

“안 하던 행동은 하지 말라고요.”

무진은 시현의 타박에도 그저 웃기만 했다.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이해타산보다는 시현이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믿었다.

무진은 괜한 구설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싫어서 잠시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할머니를 설득하고 계약보다 결혼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니까. 하지만 시현이 자꾸 빠져나가려고 하면 시현의 사생활이든 뭐든 결혼 상태인 것을 공개할 생각이다.

무진은 할머니하고 시현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기분이었다.

무엇으로 엮였는지 정말 알아낼 수 없었다. 할머니의 비서가 찾고 있는 백혜련이 또 하나의 키 같았다.

이 상황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이대로 있다가 시현을 다시 놓치게 될까 두려웠다.

붙잡고 밀어내려는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왜 날 믿지 않을까.’

무진은 믿음에 금이 간 상황에서 시현을 붙들려고 애쓰는 것이 헛짓거리라고 수없이 되새겼다. 그러면서 눈앞에 그녀가 있으면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시현이 도망쳐서 어그러뜨린 것이 화가 났다.

복잡해진 것은 시현 때문이었고 아직 해결되지 않아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는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무리 고민에 빠져도 시현을 보면 그녀로 머릿속이 가득 메워져 미칠 것 같았다.

“왜 인상을 쓰면서 걸어요?”

“어?”

무진은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시현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강릉에 왔으면 생선회를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우선 발길 닿는 데로 갈까요?”

“아, 어.”

“바다에 정신을 빼앗긴 거예요? 대답이 왜 그래요?”

“너한테 빠진 거라니까.”

“정말 낯간지러운 말은 무진 씨랑 어울리지 않아요. 하하.”

시현이 웃음을 터뜨리자 무진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

시현은 행복해지는 걸 바라면서 이상스럽게 악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는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왕 할머니가 못되게 구는 것을 아는지, 이제는 다정함이 매일 반복되고 그게 진짜 같아서 속상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사랑이 다시 두 사람을 이어 주지 않을 텐데 한심하게도 끊지 못하는 게 마음 아팠다.

이렇게 신입 비서로 그의 곁에 머물다가는 미칠 거 같았다.

아니, 미치고 싶은지도.

미쳐야 하는 걸까.

웃고 있는데도 공허함이 스며드는 기분에 잡착해졌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생선회 먹는다면서.”

“뭘 먹든, 그만 걸어요.”

“업어 줄까?”

“……네?”

시현은 장난스럽게 말하는 무진이 전과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분명, 자신을 찾아냈을 땐 그녀만을 탓하는 느낌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시현은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혼자 하게 된 사랑이며 남편인 그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던 그녀는 그의 가족이 무서웠다.

그래서 취업이 확정된 이후 빈껍데기처럼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하고 지내려고 했다.

계약으로 시작된 감정으로 결혼해서 서로를 믿지 못한 탓이었다.

시현은 왕 할머니가 나타날 때부터 속이 문드러져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돈을 받고 그를 버린 만큼 사랑이 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게 지옥 같은데도 그런 무진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조금씩 그녀를 잠식하다니 미친 게 맞았다.

미치지 않고서 계약과 결혼의 의무라고 개똥 같은 말로 이혼보다 관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얄팍한 마음을 도무지 스스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끝내야 하는데.

위약금을 왕 할머니한테 받은 것으로 해결하고 싶어도 옳지 않은 일이기에 망설여졌다.

시현은 꽉 잡은 무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공으로 흐트러지는 시현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했다.

‘우리 사이, 돌이킬 수는 있을까.’

왕 할머니가 자신과 동생을 버린 엄마를 찾고 있는 게 몹시 거슬리고 두려웠다.

무진의 가족이 자신을 헤집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바다를 등지고 걸으면서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시현의 마음이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왕 할머니가 자신에게 전한 진실을 무진에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도 못 하는 바보 같은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시현은 무진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들었다.

“활어를 먹을까요? 해산물 코스 요리로 먹을까요?”

“진짜 생선회가 먹고 싶은가 봐.”

“바닷가에 와서 고기만 먹는 게 나쁜 거예요.”

“그럼 제대로 된 걸 먹으러 가야지.”

그는 차에 타서 시현의 발에 모래를 닦아 주면서 조금 신이 나 보였다.

그만이 시현을 뜨겁게 하고 쾌감을 주기에 몸과 마음을 차갑게 식히고 싶었다.

감정도 차갑고 딱딱하게 굳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현은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난…… 뭘 원하는 걸까.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

차가 출발하자 시현은 속으로 제 마음을 계속해서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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