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74)
  • 36.

    시현도 분위기에 휩쓸려 손을 뻗어 무진의 얼굴을 손끝으로 스쳤다.

    그저 손이 서로를 스치는 것뿐인데 발끝까지 전해지는 전율에 아찔했다.

    약초 냄새가 몸과 마음을 평온해지게 하며 반신욕을 즐기며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말없이 시현이 무진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가 팔을 만졌다.

    “배고프지 않아요?”

    들뜨고 달아오르려던 분위기는 시현의 한마디에 금세 훈훈하게 가벼워졌다.

    뭐가 즐거운지 웃음이 터진 그가 시현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넌 늘 밥이 먼저였지. 안 먹고는 못 싸운다고 그랬던가?”

    “밥심이 중요하다고 한 건 무진 씨였어요. 미국에 살면서 빵 조각 먹는 거 도움 안 된다고요.”

    “내가 그랬나?”

    “살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밥심을 강조하던 거 잊히지 않아요. 머리 쓸 때는 달콤한 거 먹어야 한다고 케이크랑 사탕을.”

    짧은 결혼 생활 중, 서로가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위험했다.

    입을 다문 시현은 멋쩍게 웃어 보이며 저녁 메뉴를 고를지, 밖에 나가서 먹을지 고민하는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시현이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 테니까 메뉴만 골라.”

    우리 시현?

    너, 당신, 이제는 우리?

    기쁘고 달갑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시현은 불쾌감이 쌓였다.

    그가 지금의 데이트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왕 할머니의 포기는 언제 되는 건지 걱정도 안 하는 듯했다.

    시현은 애써 따지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었다. 그리고 저녁 메뉴를 고르는 걸 그에게 떠넘겼다.

    “마음대로 주문해요. 무진 씨의 센스를 기대할게요.”

    시현은 무진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밖으로 나간 무진의 양손에 든 것에 시선이 꽂혔다.

    도시를 벗어나는 데이트를 제안할 때부터 준비한 걸까.

    5분도 안 된 시간에 저녁을 다 준비했다고?

    아니, 주문했어도 이렇게 빨리 음식이 만들어질까?

    시현은 그가 양손에 든 쇼핑백 안에서 음식이 담긴 용기를 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식탁에 맛깔스럽게 차리고 있는 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잘 구워진 생선 요리, 구워진 양념 고기, 정갈한 밑반찬이 가지런히 놓였다.

    “앉아.”

    “아, 그래요.”

    그가 생수를 가져올 때까지 식탁에 놓인 음식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사 왔는지 묻지 않고 그가 고기 한 점을 건네자 말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이런 행동은 무진과 시현의 사이에서 자연스러웠다.

    지금 모호한 관계가 되어서 계약 애인과 결혼의 중간쯤에 있었다.

    미국에서도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시현은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또는 무진이 사 오는 음식을 차리거나 그가 고용한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

    외식할 땐 한식당에 가서 구운 고기와 김치를 입에 넣어 주며 언제나 시현이 먹는 걸 신경 쓰던 그였다.

    시현은 무진이 의외로 사소한 것을 신경 써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가 채우는 느낌이었다.

    “알아서 먹을 테니까 무진 씨도 먹어요.”

    그가 밥에 올린 고기로 밥 한 공기도 뚝딱 먹어 버렸다. 시현은 무진에게 얼른 먹으라고 말하며 그가 발라 놓은 생선을 날름 입에 넣었다.

    1년도 같이 살지 않았는데 그도 이런 것을 좋아했을까.

    도무지 머리를 굴려도 그가 하는 행동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차피 왕 할머니가 그의 결혼 문제에 항복하면 끝날 관계에 뭘 더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로는 왕 할머니로부터 받은 돈으로 계약 불이행에 대한 위약금으로 사용해서 이 관계를 끝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리고 미련이 있어 봤자 서로 신뢰를 잃어서 시작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돈을 받고 왕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무진이 대단한 재력가라는 것이 그녀하고 맞지 않았다.

    평생 인형처럼 살아야 한다면, 자신에게 평온한 삶이 없을 듯했다.

    왕 할머니가 아니어도 강무진은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욕심이었다.

    무진과 자신의 관계만 덮어지면 회사에서 근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력만 쌓고 이직하면 되니까.

    두 달째 같은 생각만 쭉 하면서 시현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왕 할머니가 무진의 결혼에 손을 떼면 정리할 관계였다. 데이트를 핑계로 은밀한 관계를 맺어도 일시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조금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매달리자 우쭐해지고 함께하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욕망이 솟구쳤다.

    사생활이 드러난다고 문제가 될 게 있을까.

    강무진 사장이 전남편이라고 해서 자신을 손가락질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좋은 직장이라 생각하고 합격했을 때 무진과의 관계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그가 하는 일에 방해되기 싫었으니까.

    왕 할머니 때문이라는 것이 핑계인 건 아니겠지?

    자꾸 미련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이 바보라는 거다.

    어쩌면 좋을까? 여전히 그가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걸.

    용기에 담긴 음식을 접시에 덜어 주며 미소 짓는 무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자신의 얼굴에서 부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맥주? 와인?”

    “쓰지 않은 와인이 있으면 그걸로요.”

    아주 조금 그에게 남은 미련조차 다 털어 내기 위한 시간을 보낸다고 한들, 누가 그녀에게 욕할 수 있을까.

    그에게 안기고 격렬하게 서로를 탐할 때는 결혼 생활을 그대로 이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사랑한다는 말이 진짜 같았다.

    절대로 진심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착각인 것을 알면서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사랑도 일도 뒤죽박죽되면 안 되는데, 여기서 뭘 하는지.

    강무진의 생각을 모른 채 휘둘리는 걸 알면서도 절제할 수 없는 갈증에 몸이 타는 듯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쳐 가고 있었다.

    “와인 잔이…… 잠시만.”

    그가 프런트에 주문하는 게 꽤 많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와인과 딸기, 초콜릿이 테이블에 놓였다.

    먹고 마시고 자고, 자고 먹고 쉬고…….

    왕 할머니의 감시자한테 대놓고 보여 주는 것은 좋지만, 데이트인지, 계약대로 하는 건지 경계가 모호했다.

    시현은 무진을 마음으로 담고 있었다.

    애인 대행 계약, 돈, 무진의 집안, 이별의 대가로 받은 거액.

    시현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잔에 와인이 채워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도망갈 궁리하는 거 다 보여. 또다시 숨어서 내가 찾으러 나서게 되면 가만히 안 있어.”

    “누가 뭐래요?”

    “할머니가 뭐라고 말했던지 사실이 아니야.”

    “맛있는 거 앞에 두고 무거운 얘기는 그만 해요.”

    다시 숨는 것도 그가 손을 놓을 때만 가능하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시현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왕 할머니도 그렇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무진의 말에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시현은 깨끗하게 씻어 꼭지가 깔끔하게 제거된 딸기를 집었다.

    퐁뒤처럼 중탕 된 초콜릿에 딸기의 끝을 찍어 한입에 넣었다.

    딸기의 상큼하고 초콜릿의 쌉싸름하고 달콤한 맛에 시현은 계속해서 딸기를 먹었다.

    “딸기가 신선해요. 무진 씨도 먹어요.”

    “부족한 거 아니야?”

    “나눠 먹어도 충분히…….”

    시현은 다가오는 무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럼 맛을 봐도 되겠어.”

    시현은 자기 손에 든 것을 그가 먹으려 드는 줄 알고 날름 딸기를 입에 넣었다.

    그의 입술이 갈 방향을 잃은 듯했지만, 그래도 시현의 입술을 삼켰다.

    입에 넣은 딸기를 깨물었다.

    놀라서 시현이 그를 밀쳐 보지만, 꿈쩍도 안 했다.

    그는 애정 표현을 하듯 입술을 핥고 딸기를 맛보았다. 입술이 떨어지자 목덜미를 살짝 물었다.

    그의 입술을 점차 아래로 내려가며 쌉싸름한 초콜릿을 부드럽게 맛보는 듯 지그시 눌렀다.

    시현은 숨이 차오르며 감각에 빨려들어 가고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정말 맛있네. 달고.”

    무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현은 간신히 그를 밀어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감정적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물었다.

    손길이 닿으면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시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자 낮게 웃었다.

    “같이 먹어서 맛있는 건가.”

    “장난치지 마요.”

    “같이 먹자며.”

    시현은 무진에게 눈을 흘기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시현은 지금, 행복이든 성취감이든 희망을 품는다고 전부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꿈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살며 무진과의 행복을 바랐지만, 틈새를 그의 가족이 끼어들면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헤어질 거면서 감정 없이 깊은 관계를, 몸으로만 서로를 탐닉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시현은 왕 할머니하고의 대화를 털어놓고 싶어도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모든 걸 알고도 사랑 타령할 수 있을까.

    서로 가정 형편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모든 것은 제 탓이리라.

    서로를 각인하며 나누어 가지며 끝없이 탐해 봤자 결과는 이별뿐.

    시현은 와인을 마셔 알딸딸해졌다.

    짙은 어둠이 깔리는 시각에 한 손에는 딸기를,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몸이 흔들거리고 눈빛이 흐릿해진 시현은 잔에 남은 와인을 마시고 냉큼 딸기를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뺏기지 않으려는 몇 번 씹고 딸기를 삼켰다.

    “말로 해.”

    “뭘요?”

    “시현…… 딸기를 삼키듯 내뱉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지 마.”

    “……응?”

    “시현아,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뭐든 들어줄게.”

    “어…….”

    시현은 거친 관계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진의 말에서 다정함을 느꼈다.

    시현은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이름을 불러도 간신히 대답만 했다.

    “자는 거야?”

    “아뇨.”

    “자려면 편하게 침대로 가.”

    시현은 무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는 시현이 잠들 때까지 품에 껴안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현은 더운 숨결을 느끼고 눈을 떴다.

    새벽녘, 시현이 볼멘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다.

    호텔 밖으로는 한 발자국 나가지 못했던 어설픈 결혼 직후의 여행 같았다. 1박 2일의 휴가는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먹고 마시며 온종일 뜨거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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