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74)
  • 35.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어도 그와의 결혼 생활은 재미있었다. 무진의 가족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러니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대로 정리하고 각자의 인생을 살자고 말하고 싶은 거였다. 그가 사랑 타령해도 마음에 와닿지 않으니까.

    달뜬 신음을 흘리며 시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는 할머니가 쉽게 포기 안 할걸.”

    “무진 씨가 설득하면 되잖아요.”

    무진에게 설득당하고 싶지 않은 시현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흩어진 모습을 정돈하고 있었다.

    “한집에 오래 있는 거 안 좋다고 몇 번을 말해요.”

    “뻔한 방법이 잘 통하잖아. 안 그래?”

    “왕 할머님이 뻔한 방법이 통한다고요?”

    시현이 반격하듯 날카롭게 되묻자 그는 헛기침하고 조금 더 간절한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해 봐.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낫지 않아?”

    “이후 내 인생은요?”

    “원하는 방식으로 책임질게.”

    시현은 멈칫했지만, 침대 밑에 떨어진 옷을 주우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무진 씨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네요. 아무것도 안 해 줄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해도 안 믿고, 원하는 걸 다 들어준다고 하는데, 아니라는 건가?”

    시현의 말씨름도 싫고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서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현의 손을 잡은 채로 당겨 입술을 포갰다.

    그는 툭하면 시현의 말을 막으려고 키스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고픈 것은 다 하라면서 정작 시현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듯한 행동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가 입술을 떼고 시현을 다리 위에 앉혔다.

    “오늘은 가지 마. 할머니가 예상하는 방식으로는 못 이겨.”

    “무진 씨.”

    “같은 적을 무찌르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내 방식으로도 하고, 네가 생각하는 방법도 해야지.”

    그는 시현의 대답은 듣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할머니를 포기시키는데, 은밀한 행위를 짐작하게끔 하려는 이유가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시현은 잠을 자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무진의 손길에 한숨만 내쉬었다.

    머리는 안 된다고 뿌리치라고 하는데 눈꺼풀은 무거워져서 자고 흔들렸다.

    이럴 바에 그의 말대로 같이 살면 왕 할머니가 빨리 포기할까.

    시현은 모질지 않고 이런 식으로 엮이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합리화했다.

    부부 관계를 끝내지도 못하고 그를 행한 깊숙이 묻었던 마음만 다시 커지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시현은 그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직장 내 상하 관계도, 어정쩡한 부부로서 계속되는 인연을 쉽게 끊어 내지 못했다.

    안 자려고 버티던 시현이 잠들자 쓸쓸하게 바라보던 무진.

    “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하든 무진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현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그의 마음이었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어. 그렇지?”

    무진이 시현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돈을 받고 숨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말하고, 할머니가 접근했다고 화를 내도 되는 게 시현의 위치였다. 가족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잡음이 생기는 걸 막고자 했었다.

    숨어 버린 시현을 찾아낸 것은 왜 떠났는지, 왜 돈을 받았는지 추궁해서였을까?

    아니었다. 그는 시현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랑을 고백하고자 미친 듯이 찾은 거였다.

    내 마음은 보려고 하지 않아.

    이렇게라도 널 붙들어야 하는 날 왜 안 보는 거야.

    시현을 바라보는 눈빛에 흔들렸다.

    한집에 살면서 속 깊은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싫다는 말에 상처받고 심술이 났다.

    그는 시현을 조금 더 몰아세우면 내일 결근할 것 같아 잠깐 고민하며 피식 웃었다.

    아직 신입이어도 비서로서 그녀가 하루를 비우면 그건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도 손해여서 심술을 멈추어야 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은 고작 한 달이지만 그에게 멈춰진 것이다.

    그는 도망가지 못하게 시현을 품에 가두고 나직이 읊조렸다.

    “잠든 넌…… 무슨 꿈을 꿀까.”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시현은 사무용품이 흐트러진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물건이 책상에 올라가 있지 않지만, 자주 쓰는 사무용품이 꺼내져 있었다. 메모지도 여러 장이 뜯겨 있었다.

    사장실의 보안은 중요했고 아무나 드나들 수 없었다. 방문객은 사전에 협의가 이뤄지었으며 불쑥 오는 직원조차 비서한테 알리고 왔다.

    시현은 사무실을 비울 때 더욱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정돈하고 박 실장 자리도 청소하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무진과 박 실장이 외부 스케줄로 아침부터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시현은 얼음을 잔뜩 넣은 커피를 가지고 책상에 앉았다.

    어디를 가든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가 있다는 생각만 하면 저절로 생활 반경이 좁아졌다.

    왕 할머니와 무진, 자신이 얽힌 것을 해결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주변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사장실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지만, 보안이 완벽해도 도둑이 드는 것처럼 누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점심을 먹는 동안 사무실을 비웠을 뿐인데 흐트러진 사무용품이 몹시 거슬렸다.

    시현은 제대할 동생하고 살며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진의 회사에 입사하고 늘 감시자가 붙는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었다.

    박 실장이 없는 날은 일에 지쳐 이 상황을 탈피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사무실 자물쇠를 바꾸면 될까.”

    사소한 것을 말해도 되지만, 이유를 물을까 봐 할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시현은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가 많으니까 박 실장한테 적당히 걱정을 빌미로 자물쇠를 교체해 달라고 요청할 것을 메모해 두었다.

    “하아…….”

    점점 예민해지는 신경에 혼자 사무실에 있는데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괜히 누군가 손을 탄 것 같은 느낌은 시현의 불안감을 더욱더 높였다.

    시현은 언제 왕 할머니가 포기할지 기약 없는 상황이 못마땅해서 입술을 삐죽였다.

    얼음만 남기고 쭉 커피를 마시고 꺼둔 컴퓨터를 켰다.

    누가 다녀간 것은 아니라고 해도 감시자가 어디에, 어떻게 자신을 지켜볼지 곰곰이 생각했다.

    사무실에 아무도 모르게 CCTV를 설치하는 것도 모호했다. 메모지를 일부러 여러 장 뜯어 놓은 건 우연일 수 없어서 시현의 신경만 예민해졌다.

    시현은 얼음을 씹어 먹으며 점심시간에 잠깐 자리를 비울 때 사무실에 들어올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 누가 사장실에…….

    투자 회사에 중요한 자료가 있을 사장실에 왔다 간 흔적을 남겼을까.

    시현은 괜히 제대로 일하지 않는 느낌이어서 신경이 더욱더 예민해졌다.

    *** 

    강원도 강릉에 도착했다.

    한정적인 공간을 벗어난 데이트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었다. 감시자가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자 시현이 데이트하는 범위를 넓히자고 제안했다.

    서울에서 멀지 않고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무진과 시현은 뉴욕에 살면서 가끔 비행기를 타고 마이애미나 하와이에도 종종 갔다.

    추운 것보다 따스한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바다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시현은 딱 잘라 말했다.

    “바다를 보는 건 좋은데 수영하는 건 아니죠? 실내든 바다든 수영은 안 해요.”

    “호텔 객실에 온천욕이 가능한 시설이 있어. 피로도 풀고 대화하기에도 좋겠지.”

    “호텔에만 있으면 멀리 온 보람이 없잖아요.”

    “피로를 푸는 곳으로 추천하더라고. 수영은 싫어도 반신욕하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거 좋아하잖아.”

    수영장도 좋고 펜트하우스에 온천욕이 가능한 시설이 있다는 걸 알고 예약한 무진이 귀여워 보였다.

    시현은 늘 최상의 것만 이용하는 그가 자신에게 맞췄다는 게 혼란스러웠다.

    “반신욕 할 때 필요한 약재도 가져왔어. 당신 그런 거 좋아하지?”

    너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쓴다.

    피로를 풀기에 좋은 시설이 객실 안에 있다니 밖으로 나가지 않는 건 좋은데…….

    호텔 펜트하우스 문을 열자 쫙 펼쳐진 투명 유리로 밖이 휘황찬란하게 보였다. 바다 경치가 끝내주는 곳이었다.

    온천욕이 가능하게 시설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는 무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시현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듯 푸른 바다에 정신을 빼앗긴 듯 눈이 커졌다.

    집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넓은 객실은 막힌 숨을 트이게 했다. 욕조가 창문 바로 옆에 있어서 의아했지만 색다른 느낌이었다.

    도시를 벗어나 쉬는 느낌의 데이트를 제안한 것뿐이었다. 어쨌든 데이트에 관한 것은 그에게 맡겨서 나쁘지 않았다.

    시현은 펜트하우스에 온천욕이 가능한 사용 설명서를 읽으면서 말했다.

    “약초를 넣고 물을 틀어 두면 된다니까…… 왜 옷을 벗어요?”

    “샤워하고 들어가려는데 같이 씻을래?”

    “됐어요!”

    시현은 다섯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커다란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가 욕실에서 씻고 허리춤에 수건을 감싸고 나오는 걸 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시현은 같이 욕조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버티다가 약초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욕실에서 가볍게 씻고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무진과 멀찍이 떨어져 욕조에 몸을 담갔다.

    다리를 뻗어도 넉넉한 공간에 약초 냄새로 몸이 노곤해졌다.

    창문을 통해 반짝거리는 불빛과 새파란 바다가 보여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으니 둘만이 있는 세상이어서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물을 가르고 그가 시현의 옆에 앉아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내가 데이트 제안을 지난주에 했는데 원래 아는 곳이에요?”

    “정보화 사회에 몇 번 검색만 하면 충분히 알 수 있어.”

    뭔가 물어보려는 그녀의 얼굴을 돌려 뺨을 어루만지는 무진.

    어깨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손길에 숨이 차오르는 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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