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는 일하는 사무실에서 시현을 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그는 일만 하면서 감시자가 안 보이는 곳에 거리를 두려는 시현의 입술을 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일부러 사무적으로 거리를 두는 시현한테 심술이 나기도 했다.
신입 비서로서 일하는 것은 잘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피하려는 게 끝내 끝까지 가게 하고 말았다.
야근하면서 놓아 달라고 말끝마다 이혼을 꺼내는 아내한테 사심이 가득한 꼴이라니.
무진은 공과 사를 이토록 구분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시현에게 달려드는 게 화가 나면서 또,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보다 마음을 따라오는 건 어때?”
“…….”
“네가 한국에 몸을 숨긴 이유도 잘 아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유를 안다고요?”
“뭐, 이유가 상관있을까? 우리는 붙기만 하면 활활 타오르는데?”
무진의 말에 시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스하다가 순식간에 서로를 탐했다. 옷은 대충 입고 있어도 들러붙어 있는 모양새가 참 보기 흉할 듯했다.
시현은 사무실에서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확연하게 깨달았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말아요.”
“누가 알아채도 상관없잖아. 할머니가 알면 네가 바라는 일이 더 빨리 진행될지도 모르고.”
무진과 시현은 즉흥적인 결혼만큼 서로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민망하고 이상한 짓인데 왜 이렇게 좋은 건지 무진과 시현은 알지 못했다.
그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시현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대로 할머니한테 지는 건 아쉽잖아.”
“사장님이 이기게 할 거예요. 됐죠?”
“그 마음 변치 마.”
“뭐…… 라고요?”
대답은 듣지 못하고 다시 포개진 무진과 시현의 입술.
해결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서로를 탐하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이런 게 열정이고 사랑이면 이대로도 좋겠지만, 시현은 할머니가 포기할 때 그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양보하고 이해하며 대화로 풀지 못했는데 다시 사랑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시현은 씁쓸함에 몸서리쳤다.
***
시현은 박 실장과 야근하며 추가 수당을 챙겼다. 일이 많아서 구내식당에 가는 날이 줄어들어 사장 강무진에 관해서 물어보는 직원도 거의 없었다.
입사하고 추가 수당을 두둑하게 챙겼다고 좋아할 만한 게 아니지만, 사정상 박 실장을 보조하며 무진의 일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하고 야근할 때면 은밀하게 다가오는 게 못마땅했다. 이러다가 회사에서
누가 알게 되면 어쩌려는 건지 겁이 났다.
왕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가 회사 안까지 들어오게 되는 최악의 상황도 시현을 불안하게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했던 데이트는 그가 의도한 대로만 진행되었다.
대놓고 왕 할머니가 보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행동하는 거라는데 제멋대로였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
“정말 왕 할머니가 보낸 사람들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다른 방법이 있나? 우리 사이가 확실해야 할머니가 포기하지 않겠어?”
기가 막혀서 대꾸할 말을 찾는데 끌어안고 키스하는 무진에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날 볼 때마다 그런 표정이면 곤란해.”
“…….”
“도도하고 새침한 얼굴로 아닌 척해도 날 원하는 거 알아.”
시현은 그가 허리를 감싸고 곡선을 따라 어루만지는 게 아무렇지 않았고 두렵거나 소름 끼치는 느낌이 없었다.
그의 손길에 쉽게 무너지고 감정이 솟구치는 게 싫어서 양팔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순식간에 이동한 것처럼 거실 한가운데 있던 그녀는 의자에 야릇한 자세로 손이 묶였다.
넥타이로 양손을 살짝 묶고 발에는 가느다란 발목이 도드라지는 하이힐을 신겼다.
그는 짓궂게 장난치거나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짓을 하지 않았는데. 조금은 진중한 면이 많았기에 시현은 지금 그가 하는 짓이 당혹스러웠다.
거실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으니 그녀는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풀어줘요. 이런 장난 좋아하지 않잖아요!”
“기왕이면 우리가 잘 지내는 걸 몸으로 보여 주자고.”
어깨를 으쓱이며 무진은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이 하이힐은 뭐예요?”
발에 딱 맞는 하이힐에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짓궂은 표정을 풀지 않는 무진의 말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도망가지 말라는 뜻.”
“……네?”
“요즘은 신발을 선물하면 선물한 사람에게 온다고 하더군.”
시현은 장난 같은 말을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무진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고 다음은…… 어쩌려는 걸까.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을 파악하기에는 시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낮은 굽을 신던 시현은 거실 한가운데서 의자에 묶인 채 은빛을 내는 하이힐을 내려다보았다.
늘 편한 구두를 찾아 신었는데 무진이 자신의 욕망을 아는 것 같았다.
시현은 숨을 참았다.
무진의 손이 가느다란 시현의 발목을 어루만지며 발등에 입맞춤하고 서서히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장난하지 말고 풀어요.”
풀어 달라는 데도 예쁘다는 말만 하면서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해. 그냥 네가 예쁘니까.”
“아, 정말!”
무진의 입술이 닿는 데마다 열꽃이 피어오르는 듯.
쾌감에 빠져들었고, 그의 입술은 쉴 새 없이 시현을 탐험하고 탐닉했다.
무자비하게 결박된 게 아니라 느슨하게 묶인 상태여서 벗어날 수 있는데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손목에 묶인 넥타이가 부드러운 천 같아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짜릿한 감각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각.
그가 팔걸이에 넥타이로 느슨하게 묶은 시현의 팔을 풀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이 흔들리지 않게 매달렸다.
언제나 거침없이 봐주는 거 없이 그는 시현을 격렬하게 밀어붙였다.
모든 게 어정쩡한 사이에 뭘 하는 것일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나올 수 없는 걸까.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도 감각만큼은 눈 감고도 아는 사이여서 그는 시현을 집요하게 탐했다.
무진의 표정은 언제나 지배자였다.
회사에서 그의 이미지는 그녀가 지금껏 알던 것과 달랐다. 침대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삼키는 한 마리 짐승이었던 건 언제나 같았다.
멈추지 않는, 굶주린 듯한 늑대의 움직임을 더는 견디지 못했다.
살며시 보이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무진.
‘무진 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이런 걸로 할머니가 포기할 거 같아요?’
메아리처럼 시현의 마음에만 울리는 말이었다.
그가 그녀의 뺨을 손끝으로 스쳤다.
몸을 숙여 부드럽게 키스하고 입술을 뗐다.
“내 마음이 너와 같다는 생각을 왜 안 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린다.
떨리는 듯 낮고 다정한 음성.
키스하던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그녀에게 오래 머물러 몸이 뜨거워지고 떨렸다.
입술이 스치는 곳, 닿는 데마다 쩌릿해서 들썩였다.
그는 원초적인 본능에 몸을 맡기며 사람과 음식이 같을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시현에게 늘 단맛이 났다는 걸 생각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시현에게서 달콤한 맛을 느껴서 멈출 수 없었던 뜨거운 밤을.
그녀와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생 함께할 거라고 기대했다.
돈을 받고 자신을 버렸어도 놓을 수 없었다.
자신이 찾아 헤맸다고 하면 마음을 헤아려 줄 거로 생각했다.
할머니가 사람을 어떻게 피폐하지 만드는지 알기에, 시현을 지켜줄 힘을 가지려고 했을 뿐이다.
짧은 만남과 결혼 생활에 전부를 보여 주지 못했지만, 시현이 인내심이 부족할 줄 몰랐다.
계획이 어긋났어도 그는 시현을 놓는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지는 싸움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시현과의 마지막이 될 수 없으니까.
그녀의 입술은 무진에게 삼켜져 사라졌다.
“척만 하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쾌감에 정신이 나갔나.
저돌적인 그에게 반응하며 미친 건지 시현은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절대로 속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우리는 거짓과 진실 그 어딘가에 있나 보죠.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요.”
언제나 그래 왔듯, 그에게 익숙해져서 어루만지는 손길, 입술이 닿으며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젠 쾌락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탐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던 거실하고 다르게 침실은 후끈 달아올랐다. 낮고 더운 숨결로 가득 채워졌다.
“넌 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어.”
야릇한 신음을 내지르고 온몸이 젖어 가며 그에게 매달리는 게 할 짓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은 그녀였다.
“너 때문에 미쳐.”
미치겠다는 그의 말은 진실? 거짓?
시현은 차마 그에게 진심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없는 말이어서 숨을 삼켰다.
벗어나야 하고 다시 사랑하거나 결혼을 유지하지 않을 건데 왜 그는 미친다고 할까.
뜨거운 몸짓에 시현은 기절할 것 같았다.
격정적인 밤은 끝내 그녀를 흐느끼게 했다.
그에 관해 아는 게 없이 결혼해서 살면서 그는 늘 괜찮다며 시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면 뭐든 잘되는 기분에 고마워서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겨우 1년 남짓 살았을 뿐인데.
그는 정말 할머니한테 돈을 받고 숨어 버린 이유를 알긴 할까.
알면서 우리 관계를 돌이킬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본능에만 몸을 맡기고 있으니 시현은 스스로 최악으로 치닫는 관계에 회의를 느꼈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라면 이토록 몰아붙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너만 보면 갈증이 나.”
끓어오르는 욕망 때문일까?
“이시현,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가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짧은 결혼 생활 중에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별을 고민하면서 왜 몸만 탐하며 이러고 있는지 몰랐다.
그가 갈증이 난다고 말해도 기쁘지 않았다. 그저 이런 쾌감이 짙어지는 시간을 참고 견디며 감각이 지워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