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74)
  • 33.

    진보라는 무진하고 친구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정도였다는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 줄 무진을 쳐 낼 수 없었다. 어차피 여자로서 무진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을 통해 성공하고 싶은 거였다.

    무진이 백야 그룹하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접근한 거니까.

    진보라는 손에 든 서류를 빤히 보며 소연에게 당부했다.

    “강무진 사장이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까 조심해. 왕 할머니가 소연 씨를 가만두라고 했지만, 불똥이 튀는 건 곤란하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본부장님이 시키는 일도 잘하고 제 일도 잘할게요.”

    “소연 씨가 밝아서 좋네요.”

    진보라는 서류를 파쇄기에 넣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보라가 하는 말을 곱씹던 소연이 콧방귀를 꼈다.

    ‘누구보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야. 쳇.’

    소연은 강무진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이시현처럼 비서로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들어온 것이다.

    한 달 안에 결과를 내놓아야 해서 조바심이 나던 차에 적당한 자리가 있다고 했다.

    머리 좋은 여자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하기가 쉬웠다. 강무진이 희한하게 틈을 안 줘서 문제였다.

    다행히 자신이 전화를 걸었던 사람인 건 강무진도, 이시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소연은 강무진을 공략하기 전에 이시현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보라가 이시현을 조사하라고 할 때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흘러갈 것 같았다.

    소연은 사람을 써서 이시현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틈을 만들 생각이었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진보라 본부장의 비서라는 위치도 마음껏 이용할 것이다.

    ‘제대로 하면 몇억 원이야. 억이라고!’

    소연은 히죽거리며 진짜 차지하고 싶은 강무진을 떠올렸다. 지금껏 만난 정 비서나 왕 할머니가 무서워서 꿈만 꾸는 것이다.

    이시현을 몰아내고 몇 달만이라도 애인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강무진이니까.

    소연은 비릿하게 웃으며 이시현에게 남자를 붙일까. 회사 내에 소문을 만들까 고민했다.

    ‘근데 진보라 본부장은 강무진하고 뭔가 있나.’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자유지만, 유부남을 마음에 두는 것은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진보라도 미국에서 왔다고 했으니까. 다들 아는 사이라는 게 맞는 거겠지.’

    소연은 강무진과 이시현의 자료는 암기하고 있었다.

    처음 얻은 정보대로 강무진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시현이 부부인데도 공채로 회사에 들어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소문을 어디서부터 만들지.”

    소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시현은 군말 없이 박 실장이 정리하라고 건넨 자료를 꼼꼼히 훑고 있었다.

    주 5일 중, 사흘은 박 실장이, 이틀은 시현이 야근하고 있었다. 박 실장이 바쁜 와중에 효율적으로 일하기로 해서 시간을 나누었다.

    시현이 정리한 것은 박 실장이 한 번 더 검토하고 무진에게 보고되었다.

    박 실장이 외부 일을 하고 곧장 퇴근하고 시현은 무진하고 단둘이 사무실에 있으니 숨이 막혔다.

    공과 사는 구별돼야 하는 거고 추가로 일하는 것은 그만큼의 대우가 따랐다.

    박 실장하고는 외부 일을 많이 하고 시현이 야근하는 날에는 노트북과 서류를 주고 무진의 책상 옆에서 일하게 했다.

    시현은 일하는 무진을 힐끔거리다가 일이 마치고 저장된 파일을 옮겨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일은 보기 편하게 표시했습니다.”

    야근하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려다가 박 실장의 업무량을 생각하고는 입술만 달싹였다.

    박 실장의 배려로 신입 비서한테 업무량이 더는 증가하지 않았으니까.

    “퇴근해도 될까요?”

    “시현아.”

    갑자기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키스하고 싶어.”

    그의 한마디에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애인과 아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약속해 놓고 사무실에서 헛소리를 해?

    시현은 못 들은 거로 하려고 무진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위험하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어. 너하고 있으면 이런 식으로 유혹에 무너진다는 걸.”

    “유혹이라니요? 그런 적 없어요.”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해도 되잖아.”

    겨우 한 달 떨어져 있다가 잡혔는데 왜 이렇게 애간장을 녹이는 말을 할까.

    무진이 자신을 우습게 생각하는 듯하다가도 그가 유혹하듯 쳐다보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그의 말에 안 된다는 한마디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끌려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절하려는 찰나.

    무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시현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신성한 사무실이에요.”

    “신성하니까 더 잘해 보자는 건데.”

    시현이 싫다고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무진이 뒤에서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숨을 내쉬며 시현이 무진의 팔을 뿌리쳐 보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돌려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살짝 스치듯 닿은 입술, 달콤하고 위험한 입술에 잠식되어 그녀는 대범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던 팔을 목에 두르고 격렬한 키스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리석은 일인지 알면서도 그와 여전히 부부 관계로 남았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지만, 시현은 다리가 후들거려 그에게 기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하는 행동일까?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사랑해서 이렇게 뜨거워지는 걸까?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고 일부러 사랑한다며 괴롭혀서 그가 얻는 이득은 과연 무엇일까.

    애증이든 본능이든 무진의 눈빛은 강렬하게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그렇다고 가족을 등지게 하고 그와 결혼을 이어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도 왕 할머니가 포기하면 이혼하겠다니까 인연을 이어 갈 생각이 없는 현실이었다.

    애인인 척만 하고 왕 할머니한테 맞서기만 하라더니, 이런 짓을 왜 할까요?

    시현이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삼킨 말이었다.

    야근하는 것을 변경해도 변한 게 없는 관계였다.

    비서로 자리를 지키며 두세 시간 야근하고 그에게 붙들린 시현은 계속 같은 일이 생기니까 슬슬 화가 치밀었다.

    그와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는 기분이 들면, 몸보다 마음이 더 피폐해졌다.

    왕 할머니는 도대체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 뭘 해야 무진의 결혼에 손을 놓을지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딴짓을 했다는 게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더라도 양심이 있었다.

    시현은 간신히 그를 밀쳐 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박 실장님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데 우리가 이러면 안 되죠.”

    “여기서 박 실장이 왜 나와?”

    “사무실에서는 손도 잡지 말고 키스도 안 되고, 일만 하자고요.”

    “왜 그래야 하지?”

    시현은 무진의 물음에 기가 막혔다.

    시현은 크게 심호흡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일터잖아요. 난 사장님하고 헤어져도 이 회사에 남고 싶다고요. 경력 쌓아서 이직하기 전까지요.”

    “첫 직장이던가?”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첫 직장이에요.”

    시현은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무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슬쩍 몸을 빼며 말을 이었다.

    “경력 쌓게 도와줄 거죠? 나도 사장님한테서 왕 할머니의 그림자를 지우려고 애쓰잖아요.”

    시현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그에게 붙잡히고 나서 이상스레 숨겼던 감정이 솟구쳐서 불안했다.

    행복이라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을 거면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시현은 무진과 엮인 상황을 공적으로도 이어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생하고 살려면 경력이 필요하기에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어쩌자고 그에게 끌려다니며 애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왕 할머니로부터 받은 모멸감은 돌려주지 못할망정 계속 어정쩡한 관계도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안 계셔도 동생하고 잘 살아왔다. 그걸 누군가에 의해 빼앗기기 싫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혹독한 삶을 살았고 그걸 되풀이하지 않으려 악착같이 공부해서 이만큼 살아왔다.

    자존심 따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왕 할머니가 말한 대로 돈이 많으면 몸이 편해지니까. 어려움은 그렇게 극복하는 거였다.

    그래서 직장 내 상하 관계이기 전에 부부여서 왕 할머니를 그에게서 몰아내고 자신의 평화를 찾을 생각이었다.

    “시현아.”

    “회사에서는 그냥 이 비서라고 불러요. 사장님.”

    일부러 딱딱하고, 건조하게 말했지만, 무진에게는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정직과 성실한 것으로 삶을 지탱했던 시현은 이제 부부라는 껍데기를 몸에 두르고 탐닉을 배워 가고 있었다.

    즉흥적인 결혼으로 사랑이라는 것도 모른 채 함께 살았던 때가 있었다.

    왕 할머니한테 받은 돈으로 더 깊이 숨어야 했을까.

    묻어 둔 감정이 무진하고 마주할 때마다 다시금 솟구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거나 뜨겁게 바라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에게 다른 뜻이 숨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넘어가 버리는 어리석음.

    “이러다가 누가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사무실에서는 조심을…….”

    시현은 다시 한번 경고하듯 말해 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야근한다고 데이트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한 게 실수였어.”

    “실수가 아니라 약속이라고요.”

    “약속은 다시 정하면 돼.”

    그의 말이 아득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숨 막히는 키스를 퍼붓는 무진. 그의 키스는 지독하게 달았다.

    그를 밀어내지 않은 건 지난번처럼 키스로 끝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금세 격정적인 분위기는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무진의 셔츠는 풀어 헤쳐지고 시현의 치마는 허리춤까지 올라갔다.

    거침없는 무진의 손길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현은 자신을 가득 채워 버린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따스한 키스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고 손이 닿으면 전류가 흐르듯 짜릿했다.

    무진과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끌려가다가 자신은 말라 죽어 갈지도 모른다.

    “같이 좋자고 하는 건데 정색할 거 없잖아.”

    키스만으로 끝나지 않은 격렬해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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