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74)
  • 32.

    어제 입은 옷을 또 입을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시현의 옷차림에 간섭하는 느낌이 강했다.

    어제 입었던 정장은 조금 빛이 바래서 낡은 티가 난 거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시현이 사용하는 화장품까지 있었다.

    자꾸 묻고 싶어진다.

    그래 봐야 의미가 없는 답을 들을 것 같아서 시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입은 옷을 물끄러미 보면서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무진의 집을 나오는 순간부터 회사 주차장에 들어설 때까지 애인 역할보다는 비서로 자세를 잡았다.

    차에서 내려 그와 보폭을 맞추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회사까지 감시자가 붙었을까요?”

    “아마도.”

    “되풀이하고 싶지 않지만, 할머님이 정말 무진 씨의 결혼을 포기할까요?”

    “포기하게 힘 팍 주고 제대로 해 봐.”

    엘리베이터에 내려서도 그는 픽, 웃을 뿐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

    시현은 사장을 모시고 출근하는 비서로 완벽히 보이게 사무실 문도 열었다. 그가 집무실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숨을 토해 냈다.

    사무실은 청소부가 왔다 갔는지 깔끔했고 박 실장이 아직 출근 전이라 닫혀 있는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시현은 어제 그에게 시달려서 몸이 쑤시고 아팠다.

    일주일에 한 번으로 데이트 일정은 변경하는 걸 강력하게 주장해야 할 것 같았다. 매일 같이 이 상태면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힘들다.

    왕 할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

    시현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어제 실수한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 

    진보라 본부장이 보고차 사장실에 왔다.

    그녀는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0년 만에 한국에 온 것이다. 대학 동기 중 친구로 지내는 몇 안 되는 무진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자기 아내라고 소개했던 이시현을 비서로 보자 놀라웠다.

    이시현과 무진이 같은 회사에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정보력을 끌어모았다.

    진보라는 이시현이 먼저 한국에 들어오고, 한 달 뒤에 무진이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인수를 마치고 한국에 온 것을 알았다.

    하찮은 사람이어서 왕 할머니가 무진의 아내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시현을 왕 할머니가 받아들여서 둘이 일하는 건지,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보고한다는 핑계로 무진하고 마주했다.

    진보라는 무진이 굳이 아내를 비서로 곁에 두지 않을 것 같아서 함께 있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알기로 이시현은 명문대 졸업장만 있을 뿐 경력이라고 할 게 없었으니까.

    진보라는 깔끔한 사장실을 힐끔 쳐다보고 기획서를 건넸다.

    “실무진들이 기획한 걸 다시 정리해 봤어요. 투자 성과가 바로 나올 투자처와 2년 이상 걸리는 곳으로 나눴어요.”

    “문제점은 없고?”

    “뚜렷하게 보이는 건 없어요. 사장님이 투자처를 결정하면 심도 있게 들여다봐야겠죠.”

    “1년 계약에 부려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쉬엄쉬엄하되 문제점은 확실히 잡아 줘.”

    무진이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진보라는 시현에 관해 물어볼 타이밍을 살폈다. 말 한마디 잘못 끄집어내서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진보라는 월가에서 일하다가 퇴사 후 무진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인 것은 TS 투자 자산 운용사 때문이 아니었다.

    백야 그룹으로 갈 무진하고 한배를 타고 싶었다.

    남자로서 매력보다 무진이 가진 막대한 자금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원했다. 확실하게 일을 잘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왕 할머니가 부탁한 것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무진의 능력이 투자 회사에 썩지 않게 하는 게 첫 번째이고 정리가 되지 않은 이시현을 쫓아내는 게 두 번째였다.

    무진이 자신을 믿는 편이니, 걱정할 것도 없어 보였다.

    “같이 일하는 거 불편하지 않나요?”

    “뭐가?”

    “이시현 씨요. 친구로 사적인 것을 묻는 게 아니라 투자 회사 사장의 비서로 적당한지…….”

    “…….”

    진보라는 넌지시 시현에 관해 물었다.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는지 무진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흠칫했다.

    진보라는 회사를 걱정하듯 다음 말을 이었다.

    “다른 부서로 보내 주는 게 이시현 씨한테 좋지 않겠어요? 내 기억이 맞으면 비서 업무보다 나하고 일하는 게 나을 듯해서요.”

    “…….”

    “굳이 나중에 말이 나올 만한 리스크를 안고 있는 사장님의 의중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진보라는 이시현이 무진의 비서로 일하는 것보다 자신하고 일하면 쫓아내기 쉽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시현을 위험한 존재지만 능력을 써먹는 방법을 살짝 흘렸다.

    진보라는 시현이 미국에서 일을 무진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뻔하지만, 그걸 비집고 들어가 흔들어 놓으면 전보다 훨씬 빠르게 찢어질 듯했다.

    회사라는 틀을 씌어 공적인 것을 묻는 것처럼 사적인 부분을 건드렸다.

    “사장님의 친구로서 묻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을 떠나서 투자 회사의 오너는 어떤 리스크도 있어서 안 되니까요.”

    무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필 아침에 출근하면서 시현이 한 말이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1년 단기로 스카우트할 때 인맥을 이용했지만, 진보라가 사생활에 관심을 두는 게 꺼림칙했다.

    무진이 아는 진보라는 남의 일에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투자 기획에 문제점을 잘 찾아내 리스크를 줄이는 게 진보라가 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시점에 이시현을 입에 올리는 것이 의아했다.

    투자를 받는 것도 아니고 투자하는 회사에서 회사 사장의 비서는 리스크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진보라가 하는 말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진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문을 열었다.

    “박 실장이 잘 가르쳐서 제 몫은 하고 있어. 인수인계로 할 일이 많지만, 외국어도 잘하고 경영을 전공해서 올라오는 자료도 정리를 잘해.”

    “그렇다면 다행인데…….”

    머뭇거리는 진보라 본부장을 보던 무진은 무언가 눈치챈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입 비서가 투자처를 정하는 데 문제가 될 게 있나?”

    “…….”

    “할 말 있으면 해. 공적이든 사적이든 들어도 될 거 같으니까.”

    “별것 아닐 수 있겠지만, 투자 회사는 돈만큼 정보 관리도 중요해서 한 말이에요. 듣기에 이시현 씨하고 헤어진다고 해서요.”

    무진은 얼마 전까지도 미국에 있던 진보라까지 시현하고 헤어지는 것에 관심을 둔 게 거슬렸다.

    일부러 시현하고 같이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입사 성적과 인사과의 최종 면접에서 합격한 신입이어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수 한 번 정도는 신입이 저지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꽤 일을 잘하고 있어서 나름 편하기도 했다.

    무진은 진보라가 하는 말의 저의가 궁금해졌다.

    왜 그런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장실에서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어. 진 본부장이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사장님의 신경 건드리는 거 아니에요. 조심해서 나쁜 거 없다는 거죠.”

    지나가는 말로 하기에는 진보라 본부장이 확신하는 말투여서 무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시현이 정보를 빼내서 헛짓거리라도 한다는 건가?

    그걸 진보라가 왜 걱정하지?

    진보라는 무진의 점점 굳어지는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사장님만 문제가 없으면 돼요. 사소한 것도 매의 눈으로 봐야 하는 자리라서 말한 거니까요.”

    “진보라가 신경 쓸 정도면 내가 문제로 보이는 건가?”

    “내가 확장해서 생각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단순하게는 헤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서 궁금했던 거예요.”

    “헛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사생활이 투자처를 고르는데 리스크가 되지 않아.”

    “아, 그래요.”

    “진보라 본부장은 누군가 꾸민 것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면서 헛소문을 구별 못 하지 않겠지?”

    탐색하는 듯한 말투에 무진이 눈치를 챈 듯해서 진보라는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헛소문이라고 확신하는 말투에서 무진이 이시현하고 헤어지지 않을 듯했다.

    미국에서 미친 듯이 이시현을 찾아다니기에 배신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 왕 할머니한테 거액을 받고 사라졌다고 들었으니까.

    비서실장이 있으니 정보 유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시현을 그 정도로 사랑하고 믿는다고?

    진보라는 살얼음 같아 보였던 무진과 시현 사이에 뭐가 있는지 머리를 굴리느라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게임 회사는 두 회사에 투자하고 싶은데 문제점부터 찾아봐.”

    “알겠습니다.”

    신중하게 타이밍을 쟀지만 뭐 하나 얻은 것 없이 진보라는 사장실을 나왔다.

    시현이 앉은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린 진보라는 위아래로 훑어보다니 말없이 나갔다.

    *** 

    전략 본부장실.

    진보라는 자기 사무실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 소연이 건넨 자료를 한 장씩 넘겼다.

    “겨우 이것뿐이야?”

    “보시면 아시겠지만, 신입 비서여서 이시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구내식당에도 혼자 가서 친한 사람도 없더라고요.”

    “정말 아무것도 없네.”

    “몇몇 사람이 말을 걸어도 철벽을 친다고 해요. 공채로 입사해서 낙하산이라는 말은 없고요.”

    “짧은 시간에 알아보느라 수고했어.”

    “계속 회사 분위기는 알아볼까요?”

    “그렇게 해. 회사 분위기를 알아본다고 선은 넘지 말고.”

    “당연하죠.”

    진보라는 왕 할머니의 부탁으로 소연을 비서로 데리고 있었다. 정보 수집은 자신이 하더라도 회사 내의 이시현과 강무진의 상태는 계속 주시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름다운 외모지만 조금 천박해 보이는 소연을 곁에 둔 것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진보라는 무진과 백야 그룹에 함께 입성하고 싶었다.

    무진에게 한국인 친구이자 동지로서 왕 할머니를 돕는 것이 당연했다.

    고등학교부터 같이 다녀서 사적으로 다가가도 괜찮았다. 그러나 진보라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공과 사를 구별했다.

    ‘나한테 들러붙는 여자들을 떼어 달라고 했어도 흔쾌히 도왔을 텐데.’

    진보라는 무진과 이시현의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남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유추했을 뿐이었다. 왕 할머니한테 연락받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무진이 미친 사람처럼 이시현을 찾아다닌 것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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