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74)
  • 31.

    시현의 목소리가 격하게 높아졌다.

    “뭐라고요?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예요.”

    “시현아.”

    무진이 갑자기 무게를 잡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녁 먹자. 우리 아무것도 안 먹고 싸우기만 했어.”

    “아, 정말.”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가겠다는 시현과 놓아주지 않는 무진.

    결국, 작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시현을 붙잡은 무진이 이겼다.

    시현은 마음이 약해서 이러는지, 그냥 이대로 그와 결혼을 유지하고 싶은 건지 널뛰는 감정에 진심이 무엇인지 몰랐다.

    끌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다투고,

    다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뜨거운 손길과 키스에 주저앉아 버리는 게 바보인 줄 알고 있었다.

    왜 뿌리치지 못하는 건지.

    물어도 답이 없는 시현의 마음 한 구석.

    시현은 목을 어루만지더니 고개를 숙여 어깨를 물어 버린 무진을 황당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뭐예요?”

    “그냥.”

    “왜 물었냐고요?”

    “귀여워서.”

    어이없는 그의 대답에 황당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가는 무진.

    그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으니 밥을 차려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눈치를 살폈다.

    그때 무진이 시현의 뺨을 살짝 고집도 놓았다.

    “아주머니가 네 입맛에 맞는 걸 해 놓고 가셨어.”

    “내 입맛?”

    “미국에 있을 때 두어 번 오셔서 부침개랑 찌개를 해 주고 가신 분.”

    “아…….”

    시현은 무진의 가족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진이 어렸을 때도 종종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신혼집에 아주 가끔씩 오셔서 김치도 하고, 부침개도 파는 것보다 더 맛있게 만드신 분.

    “오복희 여사님 맞죠? 그분은 본가에 계신 분이잖아요.”

    “배고프다고 하니까 날 잡으라고 해서 부탁드렸어. 네가 좋아하는 거로.”

    뭐야. 진작에 저녁을 먹으려고 했으면서 다투게 하고.

    정말 못됐어.

    시현은 싱글벙글 웃는 무진을 보고 스스로 또다시 물었다.

    넌 왜 그를 뿌리치지 못하니?

    그의 웃는 얼굴에 빠져들면 안 된다는 거 잊었니?

    그러면서 약하게 반항하듯 고개를 내저어 보지만, 무진이 맛있는 음식을 데우는 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이 수저도 놓고 물컵과 생수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자리에 앉아서 뭔가 달라 보이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 실수한 거 전부 수습하지 않아서 집에 가야 해요. 내일까지 하려면…….”

    “지금은 저녁만 먹어. 다른 건 먹고 나서 생각해.”

    그에게 붙들릴 수 없었던 시현은 저녁을 먹기 전에 말을 보탰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을 차리기에 바쁜 모습을 보였다.

    요리사 복장이었으면 그가 만들어서 대접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던 무진이 변한 것 같았다.

    청소부터 일상적인 것이 전부 남의 손에 의해 완성되던 것이 보이지 않았다. 요리는 아직 직접 하지 않았지만.

    시현도 요리는 못 해서 동생하고 살 땐 동생이, 결혼해서는 피자, 포장 음식, 외식을 즐겼다.

    집밥이 그리워도 솜씨가 없어서 해 먹는 것이 어려웠다.

    “데우기만 해도 맛있겠죠?”

    “아주머니가 웬만한 요리사보다 잘하니까. 밥도 시간 맞춰 놓았는데 내가 말이 길었어.”

    “맛있으면 돼요.”

    “그렇지. 맛있으면 되는 다 되는 거야.”

    시현의 입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김치찌개도 오징어 부추전, 밑반찬 모두 입에 넣기 바빴다.

    시현은 무진이 자신에게 즐겁고 좋았던 기억을 새록새록 나게 하려고 만든 자리 같았다.

    오랜만에 저녁을 먹으면서 왕 할머니나 백혜련, 회사 일조차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입이 즐거워 불안하고 속상한 것을 잠시 덮었다.

    *** 

    잠시 후.

    “집에 가야 한다고 했을 텐데요.”

    “말하는 입과 달리 네 눈은 반짝이고 있어. 다르게 반응한다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시현의 허리에서 굴곡진 라인을 따라 어루만졌다.

    맨살이 닿은 게 아닌데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신음하지 않으려고 입을 꽉 다물었지만 느릿한 무진의 손길은 점점 거침없이 이곳저곳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지난 과거부터 지금 상황이 벌 받는 기분이었다.

    침실은 후끈 달아오르고 야릇한 분위기에 에워싸여도.

    서로 사과하고 화해한 것은 회사 일이었다. 맛있는 저녁 식사는 애인 대행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회사나 집에서 싸우고 화해하는 것은 감시자도 알 수 없는 거니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워도 손길은 점차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를 밀어내지 못한 사이 침대에서 헐벗겨진 시현.

    어이없고 황당한데 격렬해지는 무진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솔직히 이혼할 거면서 이러는 거 안 되잖아요.”

    다시 한번 매듭지어야 하는 관계임을 말해 보았다.

    “계약과 이혼하고 별개가 아닌가?”

    “왜 그렇게…….”

    시현은 반박하지 못하고 뜨겁게 닿는 손길은 부드러웠다가 거칠어지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같이 있기만 해도 그의 손길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게 몇 번인지.

    서로에게 닿고 익숙해지고 끌려가는 상황이 점점 두려워졌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무진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듯하니까.

    밀어붙이며 격렬해지는 무진의 몸짓.

    시현은 본능에 져서 아득하게 정신을 놓을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강무진이 하는 말은 무언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데, 그녀로서는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미움과 사랑은 한 끗이듯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강무진이 미워.”

    헐벗고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앞에서 매번 무너지는 그녀는 억눌린 감정을 토하듯 내뱉었다.

    “마음껏 미워해. 미움은 관심이니까 사랑하면 더 좋고.”

    “얄밉게 말할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을 믿으면 되잖아.”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다가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 시현은 눈을 감은 채 그를 느끼고 있었다.

    사랑을 말하면서 빈껍데기처럼 미워하든 말든 그녀를 농락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현을 잡아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를 보자마자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매일 말없이 떠난 이유를 알고자 다그쳐 볼까 갈등하는 것은 무진의 마음에 여전히 시현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정확히 놓지 않고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보면 안고 싶고, 사랑한다고 붙잡지만, 숨어 버릴 만큼 시현을 흔든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분노에 찬 자신이 보였다.

    시현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꺾지 못하면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갈등은 각자의 몫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이없는 계약으로 애인, 아내 역할의 끝이 이혼이길 바랐다.

    시현은 돈을 받고 왕 할머니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양심에 찔렸다.

    또한 그에게 벗어나기가 쉽고 아무런 대꾸도 못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를 사랑한들, 그 마음을 그가 진정성 있게 받아들일까.

    시현은 무진을 향한 사랑의 감정은 언제 솟구쳐서 흘러넘칠지 알 수 없었다.

    깊숙이 묻어 둔 감정은 그에게 벗어나기 전부터 꾹꾹 눌러 왔다.

    즉흥적인 것이 감정이 섞인 진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서로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드러난 가족 외의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시현은 무진과의 관계가 뜨겁거나 차가워도 가짜처럼 느껴졌다.

    진심이 없고 사랑은 진짜가 아닌 듯하니까.

    누군가를 속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속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어리석은 관계였다.

    남편의 비서이고 침대를 뜨겁게 데우는 원초적이고 격정적인 희한한 관계라고 해야 하나.

    시현은 그가 주는 쾌락으로 서로를 탐닉하다가 머릿속에서 몰아냈던 고민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시현은 일하다가 실수 한 번에 무진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두려움과 사랑이 공존해도 그를 망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것.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고 빠르게 판단하며 성과를 내는 무진이 자신을 무능력하게 보지 않기를 바랐다.

    시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백혜련을 찾는 이유도 모른 채 무진의 곁에 남아서 왕 할머니를 포기시켜야 했다.

    사면초가인가.

    시현은 모든 것이 꽉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무진에게 붙잡힌 날부터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 곱씹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정말 한 달 동안 자신을 찾아 헤맸을까.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시현은 옴짝달싹 못 하게 하니까 그를 거부하는 게 어려웠다. 찌꺼기라도 남아서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허물어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같은 마음이라도 서로에게 흠이 되고 나쁜 것만 남는다면, 왕 할머니 말대로 어울리지 않아야 했다.

    시현은 옆에 잠든 무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잘생겼다. 돈 많고 잘생긴 나쁜 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며 붙잡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시현은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왕 할머니가 준 돈, 백혜련, 무진의 사랑한다는 말을 떨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 

    다음날, 시현은 무진이 건네는 옷과 가방, 화장품을 보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결혼 생활로 그는 모르는 게 없는 건지, 뒷조사 같은 걸 해서 그녀의 사적인 것을 알아냈는지 모호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침없는 행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될지.

    자꾸 망설이면서 쭈뼛거리자 그가 한마디 덧붙인다.

    “네가 돈을 안 쓰니까.”

    “…….”

    홍콩에서도 잔뜩 사 온 것을 몇 개 사용하지 못했다.

    일은 많고 회사와 오피스텔, 데이트 장소와 그의 집만 오고 가니까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비서 유니폼이 따로 있지 않아서 자율 복장이었다.

    대신 눈에 띄지 않게 무채색으로 바지 정장 또는 투피스를 입었다.

    그래서 무진이 준비한 시현의 출근 복장은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치마가 아닌 바지 정장을 입어서 딱딱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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