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74)

30.

돈을 받고 도망쳤으니 분명하게 자신의 의도를 보여 줬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을까.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그가 맹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의뭉스러웠다.

어쩌면 왕 할머니 말대로 그는 사랑보다 장난감을 놓칠 걸 아쉬워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 무진이 하는 말이 자신에게 기회를 만들어 다시 관계 회복을 원하는 거 같아서 고개가 갸웃거렸다.

정말 사랑한다는 걸까.

“우리가 결혼했다는 걸 망각하지 마. 애인이든 아내든 할머니한테는 확실하게 보여야지. 도망치지 말고.”

그가 시현의 어깨를 잡고 말하자 시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무진이 하는 말은 모순이었다.

애인이든 뭐든 보여야 한다면 맞선이나 다른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니까.

쫓는 사람들 때문에 헛짓거리할 필요도 느낄 수 없었다.

시현은 자꾸 같은 상황에 같은 말만 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분명하게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상황에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지 고민만 쌓였다.

“정말 기한도 없이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끝은 내가 정한다고 했잖아. 더 설명해야 하나?”

“왕 할머니가 바라는 것을 하는 게 쉽잖아요. 백야 그룹이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고요.”

“그건 부수적인 거지 내 인생을 전부 걸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난 널 사랑해서 함께하자는 거고.”

진심이야?

정말 날 사랑하는 눈으로 본 적이 있긴 해?

시현은 왕 할머니가 한 말과 사랑 타령하는 무진의 눈빛이 같아 보였다.

진실보다 억지와 욕심을 드러내는 눈빛이 시현의 평온한 삶을 깨부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시현은 왕 할머니보다 집요하게 자신을 붙드는 무진이 두려웠다.

그가 말하는 사랑 따위 믿지 않으니까.

아니, 자신이 돈을 받고 그를 버렸을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걸 강무진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허황한 말을 내뱉을 뿐이고.

사랑하는 그를 버린 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진실은 돈을 받고 겁이 나서 숨어 버렸으니까.

여전히 도돌이표처럼 같은 말로 끝난 사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게 시현을 힘들게 했다.

계속 반복하는 이 상황이 지겨웠다.

“나 욕심 많아서 무진 씨의 돈을 탐내고 있어요. 지금까지 아닌 척했다는 거 알죠?”

“내가 죽으면 전부 이시현에게 상속된다고 했을 텐데.”

“왕 할머니 말대로 거지가 돈독이 오르면 무진 씨와 백야 그룹까지 망칠 수 있어요.”

“마음대로 해. 백야 그룹은 원하지도 않아. 이참에 대주주가 되어 볼래? 아내한테 증여하는 거 어렵지 않거든.”

분명한 것은 시현은 무진의 의도가 뭔지 모르고, 그도 그녀의 상황이 어떤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현은 미국에서는 그의 애인이 되든, 결혼으로 아내로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왕 할머니가 보낸 여자들이 시현에게 온갖 지저분한 말로 욕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 여자들이 무진의 재력을 보고 달려든다고 생각했으니까.

백야 그룹에 자산 규모에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게 무서운 거였다.

무진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억 원으로 회유하는 그의 할머니를 보면서 겁이 났다.

사무실에서 호되게 질책받고 홧김에 다 싫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시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대주주요? 그러다가 왕 할머니는 제 목을 조를 텐데, 그건 사양하고 싶네요.”

“욕심이 많다며?”

“우리가 결혼하지 않고 계약 상태로 애인 대행만 했으면 복잡해지지 않았겠죠?”

그가 묻는 말에 대답 대신 되묻고 시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사랑 타령에 한집에 살자는 말을 하는지 시현은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현의 목소리는 차분해지고 점차 낮아졌다.

“한 가지 묻고 싶어요.”

“뭔데?”

“정말 할머니가 포기하면 우리 계약도 끝나고 이혼하는 거예요?”

무진이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가 포기하면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를 계획이었다.

시현에게 해 준 것이 고작 결혼반지뿐이었으니까.

즉흥적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했으니까 멋지게 프러포즈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그는 시현에게 집착했다.

미치도록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을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사라진 시현을 찾느라 미국에서 허비한 시간만 생각하면 집에 가둬두고 싶을 정도였다.

시현의 단 한 마디라도, 단 한 줄의 메모라도 있었으면 미치지 않았겠지.

빈자리가 가슴을 뚫을 만큼 시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무진은 시현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시현이 자신의 사랑을 불신하더라도 말이다.

“할머니가 내 결혼을 포기하면 네가 원하는 거 들어준다고 했잖아. 계약이 그런 거니까.”

무진이 목을 긁어 대듯 묵직하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자하고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게 무진을 무섭게 짓눌렀다.

할머니가 포기하면 시현과 자신은 이대로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그래요. 더 이상 계약을 들춰서 무진 씨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결국 무진이 원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을 지껄이든 그는 고집스럽게 계약을 물고 늘어질 것이고, 반발해 봐야 같이 일하면서 속만 상할 테니까.

시현은 쉬고 싶은 사람을 붙들고 사무실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흔들어 대는 게 씁쓸했다.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서 눈을 감은 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너한테 불리한 일은 없을 거야. 할머니가 너한테 몹쓸 짓을 했을 텐데 보호하지 못해서 미안해.”

“사과하지 말아요.”

“회사에서도 매우 심했어. 급한 일이어서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잘할걸.

시현은 회사 일은 자기 잘못이었기에 그가 사과하는 게 마음 아팠다.

그에게 몸을 숨기겠다고 한 달 동안 호텔에 숨어 있을 때조차 그리웠던 강무진.

사랑하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미련이 많은 시현은 조금 더 잘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회사 일은 내 잘못이에요. 박 실장이 알려 주고 몇 번이나 확인했던 거예요. 미안해요.”

시현은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그에게 잘 맞춰 일했다고 생각했기에 아까 일은 창피했었다.

끝내 시현은 울먹거렸다.

“날 이렇게 궁지로 몰아가지 말아요. 우리 끝이 좋아야 하잖아요. 헤어져서 친구처럼 지내지 못해도 우리는 같은 회사에 있을 거잖아요.”

“…….”

“비서로서 잘할 거고, 왕 할머니가 완전히 무진 씨한테 손을 떼면 이혼 후에 부서 발령도 내 줘요.”

무진은 회사에서 막말한 것을 사과했는데 또 그녀와 어긋나버리는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생각 없이 다그친 것은 약점을 드러낸 것이라 사과가 늦었을 뿐이었다.

사무실에서 하지 못한 사과를 하려고 다짜고짜 집으로 시현을 데리고 왔다. 말로는 시현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것처럼 했지만 이별을 바라지 않았다.

무진은 현재 시현의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아직 그의 아내이고 계약 또한 진행 중이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입사 지원한 것은 무진도 전혀 알지 못했던 시현의 일이었다.

그래서 무진은 비서로 채용된 시현의 이력서를 보고 운명 같다고 느꼈다. 숨어 버린 시현을 찾아낸 것부터 함께 일하게 된 것까지.

시현과 함께 잘 살기 위해 할머니를 포기시키려는 것이었는데, 말이 헛 나오고 있었다.

시현을 가까이에 두면서 신혼 때 하지 못한 것을 채워 가려고 했다.

회사에서 실수한 시현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것처럼 무진도 빠르게 사과하고 상황을 좋게 만들고 싶었다.

“일도 많은데 데이트도 정해서 해요. 힘들다고요.”

“평일에 한 번, 주말은 함께?”

그가 시현의 어깨를 감싸며 나직이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래도 몇 달 하면 내 연봉을 웃돌아요. 부담스러워요.”

“할머니를 포기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어쩔 수 없어. 필요하면 널 백야 그룹 이사진에 넣을 수도 있고.”

시현은 무진이 하는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시현하고 마주 선 채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가늘고 새하얀 목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집에서 지내자는 말도 안 할게. 할머니가 포기할 때까지 네가 싫다는 건 안 해.”

시현은 무진의 손길에 멈칫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붙잡은 손을 쳐 내고 오피스텔로 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더 큰 사람이 지는 법.

“나도 실수한 게 있으니까 우리의 일은 회사 일과는 별개로 어떤 식이든 엮지 말아요.”

그는 시현이 누구에게든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실수하든 피해를 주든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금세 풀어진다는 걸.

시현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아서 이렇게 물러 터지게 원하는 대답이 나오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시현이 그에게 모질지 못해서 각박한 세상을 어떻게 사냐고 물어보면 독해져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무진은 시현의 성격을 이용하고 있으니 입 안이 썼다.

돈이 필요한 것을 우연히 듣고 그걸 곧바로 자신한테 유리한 일을 꾸미는 데 이용했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마틴의 레스토랑을 만남의 장소로 쓴 것은 계획이었지만, 그곳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놀라운 거였다.

계약금과 만남 한 번에 천만 원을 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덥석 물어야 했던 시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시현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그녀에게 닥친 현실은 그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알았다.

풍족하고 모자람 없이 살아온 자신과 부모 없이 동생까지 돌봐야 했던 시현의 처지는 극과 극이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것도 무진은 잘 알지 못했다.

늘 자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인간들만 봐 왔으니까.

“그럼 우리 화해하고 할머니를 같이 무찌르는 것 맞지?”

무진의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시현은 그가 잡은 손을 살며시 뺐다.

“뭘 무찔러요. 할머니한테 그러지 말아요.”

“타도하자 왕 할머니 아니었어? 마귀할멈은 무찔러야 한다고 구호까지 외친 걸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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