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74)
  • 29.

    아내를 비서로 두고 은밀한 관계에 빠져 엉뚱한 짓을 벌이고 있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그녀의 체향이 그의 신경은 툭툭 건드리고 있어서 회사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한시름 놓았는데.

    익숙함은 여전히 그를 혼란스럽게 해서 가슴이 시렸다.

    “집에서는 회사 얘기를 안 해야겠지만 오늘 같은 실수가 또 있어서는 안 돼.”

    “알겠어요.”

    “그리고 같이 지내는 게 어때? 할머니를 물리치는데 이것만 한 게 없잖아.”

    알은척해 봐야 서로 불편할 텐데 뭐? 같이 살자는 거야?

    어이없는 무진의 말에 대꾸할 말은 찾지도 못하고,

    그가 업무 얘기를 꺼내서 공적인 것으로 오늘을 마무리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에 시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의자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며 뒷걸음치고 싶어도 갈 데가 없었다.

    “도망가는 거 안 돼. 네가 원하면 이혼은 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부부인 것을 잊어서도 안 되고.”

    “…….”

    그가 시현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진보라하고 날 엮을 생각도 하지 마. 알다시피 난 화려한 취향이 아니거든.”

    “누가 뭐라고 했나요?”

    “대학 동기인데 네가 진보라를 경계했던 거 같아서.”

    그가 허리에 팔을 감고 시현을 바짝 당겨 안으며 속삭였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아니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들었는지 조소가 섞인 말투였다.

    진보라 본부장이든 장소연이든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인간인데, 또 다른 오해로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시현은 이혼만 하면 그만두지 못해도 다른 부서로 발령 나게 힘을 써 달라고 할 거니까.

    아니면 그만둘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3개월 이상의 경력은 생길 테니까.

    “업무 외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가 손을 들어 움찔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서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관계 정리를 위한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이혼한 거로 생각해서 위자료를 돌려받지 않는 거면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사무적으로 물었다.

    “때가 되면 처리되겠지.”

    확실하지 않게 얼버무리는 듯이 말하면서 그의 눈빛은 서늘하게 변했다.

    아마도 진보라 본부장하고는 그래도 아는 사이인데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서 의심을 산 건가.

    시현은 무진이 의처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면 뭐든 트집 잡아서 자신을 궁지로 몰고 옴짝달싹 못 하게 해서 이대로 살길 원하는 걸까.

    시현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끔찍하게 싸운 적이 없지만 돈을 받고 한국으로 홀로 귀국해서 숨어 있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를 찾아낸 것조차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왕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변호사라도 대동해서 결혼이 끝장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이러니하면서도 그도 자신도 어정쩡하게 행동하며 이러고 있는 것부터 문제인 듯했다.

    시현은 누구하고 일하든 말을 아끼고 의문을 품지 않는 편이었다.

    강무진이 남편이지만, 합의한 사이로 이혼을 앞두고 있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게 의아할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낸 것부터 사실 의구심이 들었다.

    시현은 자신을 싫어하는 그의 가족을 생각하면 같이 일하는 것도 극렬히 반대할 텐데, 일만큼은 안온하다는 것이다.

    그래, 이제는 정리할 때였다.

    “이제 가도 됩니까?”

    같이 있다가는 헛소리가 나오든 짜증이 나서 한바탕 퍼부을 것 같아서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가겠다고 한들, 그가 쫓아오지 않겠지만 상사니까.

    내일 또 얼굴을 봐야 하니까 꾹 참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허리에 팔을 감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세차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빨리 품에서 벗어나 집에 가고 싶었다.

    만약 같이 산다고 해서 회사에 소문이 나거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혼하려고 그의 억지스러운 행동도 참아 주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죽이고 있는데 긁어 부스럼이 되는 일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이혼해서 이런 관계를 끝내자고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이렇게 끌려다니는 이유조차 스스로 알 수 없으니 자신이 바보 같았다.

    솔직히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이 가까운 데서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찝찝하고 불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진보라 본부장과 강무진을 따로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비서 외의 일로 퇴근해서는 그와 뭉그적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못 할 짓 같았다.

    시현은 숨이 막히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딱딱하게 사무적인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계약인 것처럼.

    “사장님.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같이 지내는 거 어떠냐고 물었잖아. 대답이 먼저 아닌가?”

    “한집에서 지내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지각하는 일 없이 비서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우리 계약과 부부인 걸 똑똑히 인지하고 있으라고 했을 텐데.”

    잠자리에 환장한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몰아세우는 걸까.

    그리고 아내, 애인 역할에 따른 의무만 있는 거 아니었나.

    분명 결혼을 이어 가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은 그였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관계를 청산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다.

    사람을 가볍게 만나는 타입이 아니었다. 즉흥적이어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려고 한 건데.

    이혼의 원인은 그 누구에게 있기보다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가 가족과 등지는 게 싫고 계속 그의 곁에 있다가 백혜련이라는 존재까지 드러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덜 아프니까.

    그가 자신을 원망하며 이혼이 그에게 더 좋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자신은 그에게 파렴치한 놈이라고, 당신 할머니 때문에 숨 막혀 죽겠다고 공격이라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참고 있을 뿐이다.

    끝이 보이는 인연에 굳이 나쁜 기억을 추가하고 싶지 않아서.

    그가 다시 손을 뻗어서 시현의 뺨을 스치며 몸을 숙였다.

    “이혼하기 전까지 거부하지 않기로 했잖아. 딱딱하게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거리가 멀어지겠어?”

    “…….”

    “다른 사람 방해 없이 결혼 생활을 조금 더 해 보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어때?”

    “이혼할 거면서 우리는 사이에……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가 없죠.”

    주먹을 쥔 채 무진을 노려보는 시현.

    회사에서는 사장과 비서, 집에서는 잠자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남편과 아내로 살자는 게 기가 막혔다.

    이혼할 사이니까 서로의 사생활을 터치할 수 없을 텐데 모든 걸 자기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는 못된 놈.

    욕을 한 사발 퍼붓고 싶어도 무진의 이중적인 행동이 이해되지 않고 불쾌해서 참는 쪽을 선택했다.

    그도 왕 할머니하고 다를 게 없었다.

    시현은 조용히 탈 없이 정리되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행복해야 할 결혼 생활이 믿음이 깨져서, 돈이 오고 가면서 끝난 거니까.

    돈을 받고 도망쳐 숨었기에 그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이시현은 아직 강무진의 아내라는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으면 해.”

    “우린 그저 계약 관계예요.”

    “할머니가 완전히 포기하는 게 우리 계약이니까 수월하게 일과 아내 역할을 잘하기를 바라.”

    “무진 씨, 다른 방법 없어요?”

    시현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물었다.

    왕 할머니가 보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깟 감시자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할 짓이 못되었다.

    진보라 본부장과 장소연까지 시현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으니까.

    정 비서 하나만도 버거운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시현을 압박하고 있었다.

    “계약이든 결혼이든 시작하고 끝내는 건 내가 해. 네가 먼저 할 수 없다는 거 모르지 않잖아.”

    “그러니까 다른 방법으로 쉽게 하는 건 안 돼요?”

    “내가 출장 간 걸 알고도 혼자 도망쳤어.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그건.”

    “네가 돈을 받든 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할머니를 포기할 수 있었던 걸 망쳤으니까,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해.”

    말했다고 해도 믿지도 않았을 거면서.

    내가 네 인형이야?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냐고!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전해질까.

    “말해 봐. 혼자 귀국해서 뭘 어쩌려고 한 건데? 내가 널 못 찾을 줄 알았어?”

    그러게. 왜 그렇게 부랴부랴 도망치듯 한국에 왔을까.

    시현은 무진이 묻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텅 비어져 생각할 수 없었다.

    왕 할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줘야 했을까.

    시현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빛은 살벌하게 빛났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서 부부도 뭣도 아닌 듯했다.

    결혼을 망친 사람이, 왕 할머니가 집요하게 무진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는 게 자신의 탓인가.

    시현은 무진의 눈빛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리고 인제 와서 뭐라고 해명한들 그와 자신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우스웠다.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으로 이렇게 인생이 꼬인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그만하자고 달래야 할까.

    시현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 무진에게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와의 관계 회복을 바라고 비서로 일하고,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게 아니었으니까.

    회사에서 사람을 궁지로 몰면서 질책하더니, 애정 넘치는 사랑꾼처럼 달라지는 게 이해할 수 없는 무진의 행동이었다.

    시현은 무진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깔끔한 이별을 원하고 있었다.

    최대한 동생이 제대하고 한국에서 정착할 시기에 시현은 그와의 관계가 정리되기를 원했다.

    무조건 왕 할머니의 포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와의 끝맺음을 바라는 거였다.

    무진을 위해서라도 그게 옳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심경의 변화가 생기든 그것은 그의 문제일 뿐, 그녀와 관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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