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74)
  • 28.

    네모난 케이크에는 딸기, 키위, 포도 등 상큼한 과일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설탕으로 모양을 잡지 않은 생과일 그대로.

    가뜩이나 회사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소름 돋는 그녀가 케이크를 사 온 것부터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아직 계약과 결혼을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인 무진이 케이크를 보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았다.

    시현은 무진하고 관련 있는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진보라는 떼어 놓아야 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왕 할머니하고는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무진하고는 대학 동기, 즉 시현의 학교 선배였다.

    다 못 먹을 테니 집에 가져가게 반반 담아 놓고 커피랑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케이크는 잘못이 없으니까.

    시현은 눈치가 빤해서 일도 후다닥 해 버렸다.

    그리고 시현은 장소연도 낯설지 않아서 건성건성 말하던 것을 곱씹으며 딴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처음 보면서 무례하게 사생활을 묻는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금해도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를, 공적인 공간에서는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는데, 특히 비서는 입이 무거운 것이 중요했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였다.

    사장을 비롯한 임원을 모시는 비서들은 언제 어디서든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그게 일하는데 효율적이었다.

    ‘왜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들지.’

    시현의 불안감은 점차 고조되어 가기 시작했다.

    *** 

    며칠 후.

    투자처를 찾고 투자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투자를 요청하는 기업을 조사하고 자본금을 준비하는 것도 시간 소요만큼 투입되는 인원도 만만치 않았다.

    어디에서도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되기에 무진은 늘 예민한 상태로 주식 동향, 투자처 등을 검토하고 있었다.

    자금 흐름이 이상한 것이 두 군데 생기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투자 회사는 1단위라도 잘못 써 넣으면 모든 게 달라지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오류가 생긴 게 보이자 검토하고 다시 확인하고 나서는 담당했던 시현을 불렀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이게 뭐지? 검토할 자료가 이상한 걸 보고도 그냥 올린 건가? 머리를 그냥 달고 있나?”

    웬만해서는 소리를 높이지 않는 무진의 입에서 비아냥거리며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화를 돋우는 것처럼 다그치며 참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확인할 때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해? 머리가 아니라 눈을 이상한 데 달고 있는 건가?”

    비서의 업무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언젠가 실수가 터질지 몰라서 시현은 항상 긴장한 채로 일했다.

    박 실장이 많이 도와주지만, 박 실장이 외부에서 일하면 정신이 없었다.

    어제도 야근하면서 바쁜 와중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들러붙는 장소연을 떼어 내려다가 미처 못 본 것이다.

    물론 실수한 것에 다른 사람을 핑계를 대면 안 되겠지만,

    모든 서류를 재검토하고 사장한테 올리라고 한 것을 여러 번 보고도 잘못된 것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 정신을 빼놓은 게 아니라 스스로 흐트러진 것이고 추가 업무만큼 급여를 더 받고 있으니 시현은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전에 쭈뼛거리며 사장 앞에서 한마디 들은 시현은 날카롭게 노려보는 무진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박 실장도 없어서 시현의 실수를 막아 줄 사람도 없었다.

    앉아 있는 무진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시현의 시선은 발끝을 향해 있었다.

    일하면서 이렇게 공격적으로 혼이 난 적이 없었다.

    “수습할 능력이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바로 정리해서…….”

    “일을 수습하는 데 몇 시간 가지고 되겠나? 기업 간의 이행해야 하는 일과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면서 날 골탕 먹이는 거지?”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실수가 왜 생겼는지. 변명할 기회를 줄게. 말해 봐.”

    시현은 그의 말을 듣고도 머뭇거렸다.

    한숨을 내쉬는데도 변명거리를 찾기보다는 무조건 죄송하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일을 다시 해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장소연이 와서 정신이 팔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결혼한다는 구설에 오르락내리락해서 신경 썼다는 말은 또 어떻고.

    진실을 말해도 이상하고, 거짓을 섞어 말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다그치며 윽박지른다고 말문이 열리는 건 아니었다.

    “이시현. 일부러 실수했다고 내보내지 않아. 이 정도 일로 나한테 벗어난다고 생각해?”

    “…….”

    “업무량이 많아도 알아서 하기로 한 거 아닌가? 모르면 박 실장한테라도 확인을 받아서 제대로 해.”

    “죄송합니다.”

    울컥해서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서 부릅뜨고 있었다.

    시현은 그가 말하는 거짓말이 뭔지 알고 싶지 않을뿐더러, 회사 일로 장난치는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정신이 팔려서 실수한 것은 사실이었다. 외국 자본 투자를 통한 업무는 절대적으로 실수를 용납할 수 없기에 진심으로 미안했다.

    한두 푼 드는 투자가 아니니 실수 한 번으로 막대한 손실이 생길 수 있었으니까.

    또한 기업 간의 신뢰 문제도 망칠 수 있으니 투자 회사에서의 실수는 전체를 말아먹은 행위였다.

    물론 최종 보고로 잘못된 것은 수정되니까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수정하고 검토하는 사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강무진이 TS 투자 자산 운용사를 인수해서 협력하는 사업이 늘었다. 그만큼 서류 검토도 비서가 보좌해야 했다.

    그는 비서한테 단순한 업무로 일정을 짜고 마실 차를 나르는 비서를 원한 게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사장이 검토를 끝내고 결재한 서류는 부서로 보내기 전에 혹은, 담당자가 와서 가져가거나 보안 메일로 확인할 때까지 여러 차례 정상인지 보는 게 추가된 일이었다.

    강무진이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비아냥거리며 막말하는 건 참고 듣기가 거북했다.

    그래도 시현은 할 말 못 하고 고개만 숙인 채 연신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변명 같은 것은 그녀가 하고픈 말이 아니었다. 실수는 인정하는 것이 다음 일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나가 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가 묻어 있었다.

    “다시 해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내일까지 해. 실수하지 말고.”

    시현은 투자 회사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 경력이 없는 신입인데도 외국어를 잘해서 채용되었는데, 일이 많다 보니 실수가 생겼다.

    그것도 두 달 반 동안 처음으로.

    원래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고 비서 업무는 통상적이지 않았다. 비서로 일하는 게 생각보다 괜찮아서 좋았다.

    그런데 일이 많고 무진의 앞에만 가면 지난 과거 일로 주눅이 들고 숨이 막혔다.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있었지만.

    눈치 보면서 일하다 보니 요즘은 소화 불량이 생겨서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매일 출근해서 업무 일정을 보고하고 올라오는 서류를 분리하며 속된 표현으로 미친 듯이 일했다.

    잘난 왕자이고 직원들에게 미소를 보이지만 그것이 진심보다는 편한 길을 가려는 행동인 걸 알았다.

    툭하면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도 애써 모른 척하며,

    강심장이 아니면 강무진 사장하고는 하루도 일을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던 직원의 투덜거림도 이해했다.

    화풀이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번 일은 전적으로 시현의 실수이자 잘못이 맞았다.

    마음에 담지 말고 더 잘하면 되는데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참았던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안 하던 실수까지 하니까 누굴 탓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화가 났다.

    시현은 책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무진한테 비서로서 실수한 것은 결코 묵인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니 스스로 위로해도 마음이 아리고 쓰라렸다.

    시현은 찬물을 마시고 심호흡했다.

    그는 바람둥이 같아도 여자하고 얽히는 일은 없었다. 이상스레 누구라도 강무진에게 관심을 보이면 정도라는 게 없이 돌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시 떠오르는 진보라의 지나친 오지랖.

    모임에서도 들러붙는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선을 넘는 짓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무진과는 대학 동기라며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부류였다.

    아슬아슬하게.

    ‘이제 탐정이라도 되려는 거니. 이시현.’

    이혼을 앞둔 부부가 한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별일이 다 생기는 건가.

    안 하던 실수에 욕만 실컷 먹을 정도로 상황이 나쁜 건 아니었는데.

    ‘이게 뭐야. 회사에서 안 보면 속상한 일도 안 생겼을 텐데.’

    심적인 부담감에 언젠가부터 시현은 계약과 이혼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장인 그와 이런 식의 일이 자주 있을지 모르는데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진퇴양난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시현은 그의 키스에, 계약은 어떻게 되어가고 그는 이혼할 마음이 없는 건지, 전부 다 어정쩡하게 정의되지 않는 관계로 미칠 노릇이었다.

    실수는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해.

    *** 

    회사하고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무진.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야근하지 말라며 같이 퇴근하고는 집에서 붙드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는 시현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향이 나는 게 익숙한 느낌이어서 기분이 나아졌다.

    일할 때 사심을 드러내거나 화풀이하지 않았던 그는 오늘 회의에서부터 시현의 실수가 거슬려서 폭발했다.

    하지만 심하게 말하고는 금세 후회했고,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 부부임을 빌미로 함께 식사하고 달래 주려고 그녀를 불러들였다.

    이혼해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도망쳐서 혼자 귀국한 것과 시현을 바라보며 그는 이상한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마주 앉아 빤히 시현을 바라보는 그는 촌스럽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미국에서 같이 살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단아하고 눈에 띄는 미인이지만, 치마 길이도 그렇고 셔츠는 빛바래서 색깔이 흐릿했다.

    화려한 치장하고는 거리가 멀고 자신을 꾸미는데도 관심이 그다지 없어서 청바지와 셔츠는 학생 때, 신입 비서로 일하는 두 달 동안 무채색의 치마, 또는 바지 정장 스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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