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74)
  • 27.

    시현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누구하고도 격이 없이 지냈다.

    그를 사랑하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결혼 후 초대받은 파티에 가서 어울려야 하는 사람들을 빼면, 그의 옆에서 남편 자랑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공부도 꽤 열심히 했고 그의 열정을 좋아했고 사랑했는데.

    계약이 흐지부지된 줄도 모르고 전남편이 될 그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건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인가?

    맞아. 실수이자 해서는 안 되는 짓이야.

    내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해.

    일하기도 힘든데.

    무진의 결혼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 사람이 많다는 게 은연중에 시현을 귀찮게 했다.

    시현처럼 무진도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으니 한국에서의 친구는 대부분 왕 할머니가 만들어 준 인맥이었다.

    가족들만 아는 결혼을 누가 안다고 한들, 회사에서 뭔 상관일까 싶은데 감시자가 붙은 건 여전히 찜찜하고 불안했다.

    그와 헤어지겠다고 돈까지 받은 상황에서 강무진과 엮이는 것은 그저 계약으로 이루어진 공적인 관계일 뿐이다.

    계약이 끝나고 이혼을 확정 짓기만 하면 진정한 남남.

    그리고 사장과 비서.

    단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면서 무슨 미련을 떨고 있는 걸까.

    애인인 척해야 하는 상황에 그가 손을 뻗으면 뿌리치지 말아야 한다는 해괴한 조항이 붙여진, 침대를 공유하고 이혼을 앞둔 부부.

    일부러 알아볼 것까지는 없어도 무진의 결혼에 관한 것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두통에 얼굴이 찡그려지는데도 억지로 빙그레 웃으며 업무에 집중하려 애썼다.

    학교 다니던 때를 곱씹으면 무진과의 사랑, 그와 함께하면서 보았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점령하니까.

    모든 사람을 등급으로 평가하며 가진 자와 도움을 받는 자를 구별하며 무시하던 사람.

    무진의 옆자리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여자도 갑자기 생각나 버렸다.

    강무진을 사장으로 마주하기 전까지는 왕 할머니나 그의 주변인을 생각하지 않아서 힘든 것도 없었건만.

    다시금 감시자의 눈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좀처럼 업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 실장의 빈 책상을 보면서 야근하지 않으려고 발악하듯 일해야 하는 걸 잊고 있었다.

    마침 사장님이 곧 사무실에 도착한다는 박 실장의 메시지에 시현은 다시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고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렸다. 무진의 비서로서 업무에 집중했다.

    회사 내에서도 별 얘기가 다 돌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라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복잡한 과거가 무진하고 같이 까발려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 

    아래층에서 근무하던 기획실 전체가 실내 공사 중이었다. 일꾼들이 들락날락하며 새로 오는 본부장을 맞이하려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기획실 송 실장이 전무로 승진했다. 기획실이 전략실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부장이 온다는 소식을 공식적으로 전해 들었다.

    나흘 동안 이어진 공사는 마무리가 되는 중이라고 했다.

    시현은 인사이동이 급변하는 게 인수한 투자 회사여서 그가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건 줄 알았다.

    지금 마주한 전략실 본부장이 미국에서 몇 번 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에 케이크와 음료를 가지고 와서 인사하는 진보라.

    시현은 그녀의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월가에서 꽤 잘 나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서글서글한 눈매에 속으면 안 된다고 속으로 되새기며,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한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쫙 빼입은 정장은 아마도 웬만한 직장인의 몇 달 치 급여겠지.

    투자 회사의 임원이 과감하고 돈을 잘 쓰는 게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과시형인 진보라 본부장이 시현에게는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그것도 직속 상사는 아니어도 회사에서는 염연히 직책이 신입 비서인 시현보다는 몇 단계 위라는 것.

    진보라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마주 잡았다.

    “진보라예요. 강무진 사장님하고는 대학 동기이고, 월가에서 일해서 한국은 10년 만이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시현입니다.”

    “으음, 우리 어디선 만난 적 있죠? 기억이 가물거리네.”

    일부러 그러는 걸 알기에 시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장 비서와 진보라 본부장의 인사가 끝나자, 케이크와 음료를 내려놓고 본부장의 비서인 장소연이 인사했다.

    생글생글 웃는 게 귀여워 보이지만, 자유로운 복장이어도 임원 비서로서는 과한 화려함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검은색 하이힐에 조금 불편해 보이는 몸에 꼭 끼고 짧은 치마는 시선을 잡아끌었다.

    “신입 장소연입니다. 어제부로 비서실 소속으로 발령받았고, 오늘부터 진보라 본부장님을 모십니다.”

    “이시현입니다.”

    “신입이니까 부족한 게 많아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도 되죠?”

    “언제든지요.”

    박 실장이 없을 때 들이닥쳐서 시현은 괜히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다.

    시현이 소연의 물음에 답하면서 사장실로 진보라 본부장이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었다.

    강무진 사장과 진보라 본부장이 얘기하는 동안 휴식 시간을 가진 시현과 소연은 멋쩍게 서 있으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책상으로 돌아가 앉고 싶은데, 눈치가 없는지 멀뚱멀뚱하게 사무실을 둘러보는 소연이 신경 쓰여서 시현도 서 있게 되었다.

    장소연은 강무진 사장하고는 진작 인사를 했다면서 헤벌쭉했다.

    왕 할머니라는 분이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회사 안으로 진입해서 접근할 기회가 생겼다.

    진보라 본부장한테 언질 받은 것도 있었다. 소연은 TS 투자 자산 운용사뿐만 아니라 백야 그룹의 강무진을 실제로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수컷 냄새도 풍기는 게 소문보다 괜찮았다.

    지금은, 왕 할머니의 눈과 귀가 되어야 했다. 진보라 본부장한테는 어차피 수행 비서가 있어서 소연이 할 일은 무진에게 접근하는 것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시현을 할 수 있으면 최대한 감시하며, 사장실의 상황을 보고하는 임무가 있었다.

    소연은 비서보다는 강무진과 눈앞의 이시현을 한 방에 보내는 게 주된 업무였다. 그리고 사장실의 분위기를 파악해서 정 비서한테도 알려야 했다.

    소연은 방긋방긋 웃으며 시현의 책상을 힐끔거렸다.

    장소연은 사장과 전무의 대화가 길어져 강무진을 떠올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보고할 정보를 얻으려 시현한테 말을 걸었다.

    “이 비서님도 신입이에요?”

    “네.”

    “강무진 사장님을 모신 건 얼마 안 된 거네요. 비서실장님은 따로 있어요?”

    “네.”

    짧은 단답형 대답에 소연은 입을 삐죽였다.

    비서 업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소연의 머릿속은 시현을 무시하는 듯한 생각에 표정이 거만해졌다.

    이번에는 탐색하듯 다시 질문했다.

    “결혼하셨어요? 비서실은 결혼하면 한직으로 발령 나거나 퇴사한다는데 정말 그래요?”

    소연의 질문에 황당해한 것은 시현이었다.

    “장소연 씨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사장님은 그런 개인사로 비서든 여직원이든 결혼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부당한 발령은 없어요.”

    “보통 다 그런다고 해서 물어본 건데 정색하시네요.”

    “장소연 씨. 사장님은 해외 쪽 일도 겸하고 있어서 본부장하고 연결되는 일이 많을 거예요. 항상 자료 정리와 올라오는 서류는 신경 쓰세요. 비서의 개인사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생활에 관해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시현은 업무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장소연은 진보라 본부장의 개인 일을 도맡은 게 아니었다. 왕 할머니의 지시로 강무진에게 접근하기 위한 자리를 보장받았다.

    눈앞에 이시현을 치워 버리는 일까지 포함해서.

    어쨌거나 소연은 강무진 사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눈이 호강하고 10억 원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비서 업무는 전혀 알지 못해 진보라 본부장의 비서가 이틀 후에 올 때까지 대신 인사하는 거였다.

    메일을 분류하고 전화를 받는 일은 쉽고 단조로울 정도였다.

    그러니 시현이 업무 얘기를 할 때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신입 비서로서는 별것 없으니 업무를 시작해도 탈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시현에 관해서 정보 수집을 하라는 왕 할머니의 지시를 잘 따르려고 애쓰고 있었다.

    잠시 후, 강무진 사장과 진보라 본부장이 사무실을 나와서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었다.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한테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기묘하게 무진을 바라보는 소연의 눈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현은 잘난 남자의 주변에 있으면 피곤해지는 것을 또다시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이만 다른 곳에도 인사하러 갈게요. 시현 씨의 입맛에 맞는 거로 가져왔으니 맛있게 먹어요.”

    진보라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시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듯 굳어졌다.

    시현은 진보라 본부장의 말에 의아함을 드러냈지만, 재치 있는 한마디에 피식 웃고 넘겼다.

    “본부장님이 일개 비서의 취향이 꽤 독특한데도 알고 계시나 봐요. 감사합니다.”

    “그냥 좀 알아서요.”

    독특하지.

    생크림 케이크를 먹을 때 빵 위에 덮은 생크림을 걷어 냈다. 초콜릿 시폰 케이크도 크림 안의 빵만 속속 파먹으니까.

    그러면 카스텔라나 케이크 빵을 사서 생크림을 묻혀 먹으면 될 텐데.

    생크림 케이크를 사서 크림을 걷어 내고 먹는 것을 선호하는 독특한 버릇인 입맛이었다.

    시현에게 빵을 사다 먹지 케이크는 왜 먹냐고 하던 무진조차 나중에는 그녀의 입맛에 길들어졌다, 그래서 크림을 두고 케이크 빵만 파먹었던 적도 있었다.

    케이크를 무진장 좋아해서 가끔, 집에서 빵을 굽고 과일잼과 과일만 듬뿍 넣어서 생크림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바르기도 했었다.

    시현은 진보라가 도대체 자신의 식성을 어떻게 알고 어떤 케이크를 가져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진보라가 웃으며 비서하고 나가자 그는 몸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적이 내려앉은 사무실에서 정신을 차린 시현.

    “오늘 야근인가.”

    구시렁거리며 케이크 상자를 열어 본 시현이 놀라서 눈이 커진 상태였다.

    시현은 고개를 돌려 생크림이 흔적만 살짝 남을 정도로 빵을 두른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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