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74)
  • 26.

    끝까지 뭔가 알아내려는 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현은 다시 상추에 고기를 올리고 쌈장, 마늘을 듬뿍 넣고 한 입 크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점심이나 먹어요. 오늘 쌈장까지 맛있습니다.”

    아는 게 있든 없든 말을 아끼는 게 속이 편했다.

    구내식당을 둘러보니 늦게 내려와서 그런지 직원이 많지 않았다.

    강무진과 박 실장이 점심 약속이 있어서 따로 먹고 있으니 그 기회를 여실히 이용하는 직원의 얌체 같은 행동에 말려들기 싫었다.

    사장실에 한번 총무과 부장님하고 올라온 걸 봐서 그런지 직원이 껄끄러웠다.

    그 직원의 이름도 가물거릴 정도로 알고 지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시현이 총무과 직원과 소곤소곤하니 궁금해서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주시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강무진 사장의 인기에 훗날 전 부인이 될 비서로도 눈치가 보였다.

    직원까지 합세해서 정보 타령을 하니 무진을 탐내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맞선이나 결혼 계획에 관한 일정이 자신에게 없는 걸 보면 헛소문일 텐데, 실제 말이 오고 가는 상대가 있다는 건 불쾌감을 넘어섰다.

    이도 저도 아닌 불확실한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는 무진의 사생활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욱더 걱정되어서 지끈거렸다.

    시현은 식판에 담은 고기와 밥을 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의자를 뒤로 뺐다.

    “바로 올라갈 거예요. 이시현 비서님?”

    그녀가 시현을 붙잡았다.

    “아는 게 없어서 줄 정보도 없습니다. 비서라도 사장님이 개인 일정은 전혀 공유 안 하셔서 아는 게 없어요.”

    “그러면 아는 게 생기면 알려 줄래요? 사례는 확실하게 할게요.”

     절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시현을 붙잡았다.

    “말할 수 있는 게 있으면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얼핏 보니 직원의 집이 꽤 잘산다는 것 같았다. 옷부터 액세서리까지 가격이 꽤 있어 보였다. 하지만 친구와 강무진의 결혼 얘기에 관심이 많은 건 퍽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것보다는 강무진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꺼림칙했다.

    문득, 귀국해서 이혼도 마무리 안 된 그가 자신은 옭아매고 뒤에서는 결혼을 준비하는 게 분통이 터질 듯했다.

    잘난 남자는 이래서 피곤해.

    커피를 손에 들고 사무실에 갔다. 그 짧은 시간을 조금 시달렸다고 시현은 퀭한 눈으로 오후 업무 준비를 해야 했다.

    누군가 의도적인 소문을 내는지도 모른다.

    백야 그룹 최대 주주라는 강무진이 한국에 와서 TS 투자 자산 운용사를 인수한 게 석 달 남짓.

    인수된 게 석 달이 채 되지 않았어도 준비 작업만 1년이 넘게 걸렸을 것이다.

    그사이에 아무리 젊고 잘생겼으며 능력도 출중한 사장을 연예인처럼 바라보는 게 이상했다.

    별 탈 없이 지금껏 소문은커녕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시현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직원이 하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한 게 잘한 것인지 곱씹었다.

    돌이켜서 생각하니, 무진과 결혼 얘기가 오고 간 상대가 있다면 계약은 끝이고 결혼도 가만히 있어도 이혼은 곧 확정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장의 비서가 되자 친근하게 다가오는 게 기이한 행동이니 당연하게도 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강무진 사장의 비서인 자신이 임원들의 최측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강무진처럼 그녀도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다닌 게 불과 두 달 되었을 뿐이었다.

    시현은 직원의 말이 신경 쓰였던 것을 물을까 하다가 구내식당에서 보는 눈이 있어서 멈추었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하는 법이고 시현은 과거가 될 무진과의 관계를 들추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평생,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

    기이한 행동이라 생각하니까 며칠 전부터 감시자가 꽤 가까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왕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 백혜련이라는 사람을 이용할지 신경이 곤두서서 예민한 상태인 거 같았다.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무진하고 떨어져 있으면 오히려 감시자가 가까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한테 잘못한 일도 없고 잘못된 만남조차 없던 왕 할머니는 감시자를 붙였다.

    책상을 빤히 보던 시현은 피식 웃었다.

    보안이 삼엄한 사장실에 누가 들어와 비서를 감시하는 건지 우습기만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몇 시간을 강무진 사생활에 관한 걸 들어서 예민해진 탓이리라.

    왕 할머니는 정말 자신의 24시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누가 자신을 감시하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뻔한 것은 그녀였다.

    무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악의를 품는 게 이상했고 대체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모나지 않게 살았다.

    지금도 왕 할머니의 지시를 받은 감시자가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돈으로 협박당하고 사람이 늘 쫓는다고 생각하면 외출할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면서 움츠러들었다.

    감시자가 정말 있긴 하겠지.

    하소연하듯이 감시자가 싫으니까 제발 끝내자고 할까.

    시현은 남은 커피를 쭉쭉 마시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진의 일정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발목이 잡힌 채 살지 않으려고 그와 사랑했던 것마저 모두 지워 버리려는데, 뭔가 막힌 기분이었다.

    알지 못하는 사생활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니 기분이 잡착했다.

    외모가 되면 능력이 안 되고 성격이 좋으면 임자가 있다고 하던가.

    뒤에서 흉보지 않아도 악의 없는 말을 툭툭 던지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말을 곱씹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과 함께.

    ‘정리할 때라는 건 없나 봐. 생각날 때 해야지.’

    괜한 걱정이 묻어나는 게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강무진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가 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바뀐 사람이 좋은 게 아니지만, 상대를 가려야 하는 처지에 시현은 말조심하며 자신 또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에서 지독히 괴롭히던 감시자가 한국에 와서는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진이 뭔가 조치한 것 같기도 해서 시현은 불안감을 떨치려 자꾸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말대로 주변에 자신을 해코지할 사람이 어디 있냐 말이다.

    감시자는 말 그대로 왕 할머니가 부리는 사람일 뿐이다.

    생각의 꼬리를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엿보게 하는 듯 시현은 초조해졌다.

    직원이 구내식당에서 한 말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지만.

    찝찝한 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장소연의 집.

    “연락받은 게 없는데요.”

    “접근조차 못 했다고 하더니 계속 이런 상태로 있을 건가요?”

    소연은 정 비서를 보면서 입을 히죽였다.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를 만났고 착수금으로 1억 원을 준 이유가 분명해서 고심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힘들 줄 몰랐다고요.”

    “그 잘난 얼굴로도 안되는 게 말이 돼요?”

    “기회가 없다니까요. 비서라는 년이 차단하는지 전화는 불통이지, 만나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아도 얼굴을 못 봐요.”

    소연은 정보 수집이 필요해서 온갖 것을 동원했다.

    가까운 사람을 조사해서 강무진하고의 길을 틀 준비를 마쳤다. 문제는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는 거다.

    얼굴을 봐야 뭔 수를 내서 불륜이든 진짜 사랑이든 할 텐데, 거리가 좀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돋는 인간이었다.

    같이 일하는 남자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틈이 없어서 접근은커녕 얼굴도 못 봤고 왕 할머니를 핑계로 비서실에 전화를 몇 번 한 것 말고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돈값을 안 하겠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조사해서 접근하려는데 도무지 기회가 안 나요. 나도 1억이 아니라 그 열 배가 갖고 싶다고요.”

    정 비서도 왕 할머니한테 보고하려면 뭔 수를 내야 했다.

    무진과의 관계를 아는 자를 접근시키는 것은 위험하고 껄끄러워서 적당한 사람을 구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안 되는 거면 손을 뗄 건가요?”

    정 비서는 소연이 하는 말을 듣고 추려 보려고 다시 물었다.

    “그러기에는 아깝잖아요. 열 배를 가질 기회를 이대로 날리는 게 바보잖아요. 방송 일을 달라는 것보다 돈이 나으니까 시간을 줘요.”

    소연은 정말 돈이 탐이 나서 생각지도 않은 것을 술술 불고 있었다.

    “그 여자가 너무 붙어 있어요.”

    “그건 우리도 알아요. 그래서 돈을 더 준다는 거잖아요.”

    “그럼, 그 여자한테 남자를 붙이고 떼어 놓아도 10억 원 줄 수 있나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강무진보다 여자 쪽이 쉬워 보여요. 정말 강무진이라는 사람은…….”

    소연이 말끝을 흐리자 정 비서가 피식 웃었다.

    그새 굳어진 표정이 풀렸다.

    “압니다. 강 사장님이 쉽지 않죠. 그럼 다시 한 달을 주겠어요. 그 안에 결과가 안 나오면 우리의 대화도 깨끗하게 잊어요.”

    “그럴게요.”

    정 비서는 부질없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소연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어느 집안인지, 누구 자식인지에 관해서 알면 관대해지거나 선을 딱 그어 버리는 타입이었다.

    다시 만나기 싫은 부류라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정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정 비서는 곧 백혜련을 만나서 시현의 약점을 쥘 기회가 있기에 장소연은 하나의 보너스쯤으로 생각했다.

    소연에게는 친구 사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자재로 부리는 남자가 있었다.

    계획대로 소연의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자꾸 남자를 소개해 준다고 들러붙은 다음부터 약점을 잡고 쫓아내도 괜찮을 거 같았다.

    그렇지만, 결혼을 깰 정도로 이시현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시현은 정도를 벗어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연이 남자를 붙인다면 또 얘기가 달라질 수 있었다.

    생각만 했는데도 소름이 돋아서 양팔을 끌어안고 으스스한 기분을 떨쳐 내려고 머리까지 내저었다.

    “일만 잘해요. 그분께 말씀드려서 제대로 챙겨 줄 테니까요.”

    “알겠어요.”

    “이시현을 처리하면 강 사장님을 그냥 두는 거로 하고, 만약에 강 사장님한테 접근이 가능하면 일을 빨리 정리해요.”

    “그럴게요.”

    “이시현에 관한 정보를 더 줄 테니까 한 달 안에 결과를 줘요.”

    알지 못했던 무진의 일부를 조금 알게 되는데도 찝찝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시현. 자꾸 이름을 곱씹게 되고 소연의 머릿속은 자신과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