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74)
  • 25.

    맙소사. 꿈에서 그냥 욕을 한 거로 생각했는데, 현실이었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악덕 업주네, 돈이면 다네, 야근하다가 쓰러지면 산재라고 소리를 빽빽 질러 댔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데 상사 욕쯤은…….

    그렇지만 앞에서 하는 욕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진의 할머니를 마귀할멈이라고 소리를 질러 대고, 세상에 믿을 놈은 남동생뿐이라며 무진에게 폭력도 썼다.

    주먹이 아프지 않았겠지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미안해요.”

    곧바로 비서로 돌아와 무진의 파란색 티셔츠를 입은 채로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숙였다.

    부부 관계를 발로 차 버린 상황에서 그는 엄연히 모시는 상사의 집에서 추태를 부린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그를 보며 주말에 일정이 없었던 걸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현의 궁금증을 바로 풀렸다.

    “어머니하고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아, 네. 고개만 끄덕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빈속에 또 해롱거리면 안 되니까 대충 주방에서 먹을 거 찾아 먹고 쉬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슈트 상의를 집어 들고 나가 버렸다.

    멍하니 그의 침실에서 어리둥절한 시현은 그를 붙잡고 할 말이 없어서 그가 나간 문만 바라보기만 했다.

    어젯밤 구토하기 전에 나눈 키스.

    의미 없이 나눈 대화가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빨갛게 타들어 갔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몽롱한 상태로 그와 마주 앉아 생각나지 않은 말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더듬었다.

    그가 나가고 침실을 둘러본 시현은 정돈된 자신의 소지품을 챙겼다.

    어쩌자고 그의 집에 올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피곤해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겁다고 느꼈을 뿐.

    그의 집에 언제라도 올 수 있고 같이 살아도 되는 공간이어도 이런 식으로 와서는 안 되었다.

    계약이나 부부의 의무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니까.

    철저하게 공과 사가 구별되어야 하며 TS 투자 자산 운용사 안에서도 그들의 관계가 알려지는 게 좋지 않았다.

    술에 취한 비서가 사장의 집에서 뭘 했을까?

    이런 생각은 곧 유언비어로 퍼져 나가는 걸 막지 못하고, 소문이 커지면 그가 새롭게 추진하는 투자 건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어제 취할 만큼 마셨던가.

    생각할수록 한심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서둘러 씻고 침대를 대충 정리하고 그가 입혀 준 옷에 의자에 걸려 있는 반바지를 찾아 입었다.

    드레스룸에서 모자 하나를 꺼내 둘러쓴 채 무진의 집에서 나왔다.

    파란색 티셔츠가 눈에 너무 띄지만, 차림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진의 집 드레스룸을 뒤져서 자기 옷을 찾을 수 없었고 버린 옷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수 없는 처지.

    야근, 퇴근, 바에서 술 한잔 그리고 무진의 침실.

    도돌이표도 아니고 계속 반복해서 생각을 더듬으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려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혼을 빼놓고 사는 건가.

    미쳐도 곱게 미치는 게 그녀의 소망이었는데, 무진에 관한 감정이 격해질수록 엉망진창이었다.

    택시 타고 오피스텔에 와서도 생각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의 비서로 언제까지 일해야 할까.

    비서실이 아닌 다른 부서에서 일했으면 만나지 않았을까.

    그와 왕 할머니 사이에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도 허접해서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머릿속에 가득한 물음표에 답을 줄 사람이 없었다.

    *** 

    시현은 우유, 과일. 간단하게 먹을 간식으로 장을 봐 냉장고를 채우면서 기이한 느낌에 집안을 한바탕 뒤집었다.

    보안이 잘된 오피스텔에 문 위로 달린 자물쇠도 두 개여서 누가 문을 열고 침입할 수 없었다. 마트에서 사 온 음식으로 간단하게 밥을 먹으면서도 이상스레 불편했다.

    뭐지? 그냥 예민해진 건가.

    지난밤에 실수까지 해서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시자가 집에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마귀할멈이라고 욕했던 할머니의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었을까.

    어젯밤에 욕한 게 생각나서 점심 약속으로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에 자꾸 엄한 생각만 났다.

    그의 가족 관계에 끼어들 생각이 없고 어머니나 할머니하고 그가 소원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왕 할머니가 보낸 사람한테 협박을 당하긴 했지만, 돈을 받고 떠나기로 한 건 자신이었다.

    두 달 동안 회사를 인수한 사장 강무진에게 관심도가 늘어난 것 같았다. 회사 안에서 강무진에 관한 정보나 그의 결혼 여부를 아는 사람이 적었다.

    별거 중인 무늬만 부부. 그래서 강무진을 둘러싼 이야기는 비서로 듣기만 하고 무거운 자물쇠가 걸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맞선을 봤다, 모 그룹 누구를 만나더라, 미국에서부터 베일에 싸였지만, 연애 중이다. 등 그는 TS 투자 자산 운용사 내에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더구나 강무진은 백야 그룹의 차기 총수가 될 대주주가 아니던가.

    한두 달이 지나면 잠잠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점점 강무진 사장에 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난 듯했다.

    시현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며 모시는 상사 강무진의 일거수일투족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질문 공세에 피로를 느꼈다.

    며칠 전에는,

    “신입이어도 대충 알지 않아요?”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사장님하고 이 비서가 친하다고 하던데 아니에요?”

    “아닙니다.”

    회사 내에서 무진의 입지가 탄탄하니까 직원들의 관심에 끼어들기 싫었다.

    모든 걸 모르쇠로 밀어붙여도 강무진 사장의 비서인 시현에게 보는 이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박 실장한테는 차마 말을 걸 수 없으니 만만한 신입 비서한테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부탁하는 사람, 티끌 같은 정보력을 발동해서라도 뭐 하나라도 원하는 사람, 그중 시현하고 가까워지면서 강무진의 사생활까지 알기를 바랐다.

    회사 내에서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었다.

    한여름 밤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공포처럼 시현에게 많은 사람이 연락해 왔다.

    사내 메신저로 끊임없이.

    비서가 입이 가벼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직원조차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강무진 사장의 사생활 중에 결혼 여부에 관심이 컸다.

    진실을 알아도 말할 수 없을뿐더러, 강무진 사장의 사생활이 조금이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자신과의 관계도 드러날까 봐 촉각을 세웠다.

    하루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앞에 앉아 재잘재잘 떠드는 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시현은 직원의 말을 굳은 얼굴로 듣고 있었다.

    “강무진 사장님하고 결혼 얘기가 오고 가는 친구한테 부탁받은 건데, 뭐 따로 아는 거 있으세요?”

    “……네?”

    “백야 그룹 차기 총수라는데, 이시현 비서님은 뭐 아는 거 있냐고요.”

    “사장님의 사생활 쪽으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이시현 비서님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줄 수 있는데, 뭐라도 알려 줘요.”

    시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미국에 있을 때도 가끔 무진에 관해 묻는 사람이 있었다. 애인 대행을 할 때부터 결혼해서까지.

    그런데 회사 구내식당에서까지 별의별 말을 다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났다.

    시현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불고기를 쌈에 싸고 한 입 크게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남의 말 따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와의 계약과 결혼이 마무리되지 않아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과 달리 그는 왕 할머니의 뜻대로 결혼 상대를 고르는 듯했다.

    그때 본 여자랑 맞선을?

    이혼하게 될 거니까 왕 할머니가 벌써 나섰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또한 무진의 친인척분들이 주선해서 그를 결혼시키려고 하는 것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남이 될 사이에 그가 누구를 만나든 개의치 않지만, 자신과의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가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듯한데.

    ‘강무진’과 ‘결혼’이라는 말은 시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더구나 강무진은 시현에게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그의 말을 믿지 않지만, 기분이 퍽 좋지 않았다.

    시현은 꼬치꼬치 묻는 직원에게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뭘 알겠습니까. 정말 아는 게 없습니다.”

    “알았어요. 저도 친구가 알아봐 달라고 해서 이시현 비서님한테 물어본 거예요.”

    “관심 있으면 백야 그룹 쪽으로 알아보거나 왕 할머니 쪽에 사람을 연결하면 될 겁니다. 그 정도밖에 모르니까 내게 묻지 말고요.”

    “어머. 왕 할머니도 아시는구나. 이시현 비서님이 그래도 아는 게 있네요.”

    직원의 입이 가볍지 않지만 직접 대놓고 물어볼 정도면 강무진의 결혼 얘기가 적극적으로 나온다는 걸 입증하는 거니까.

    시현은 어느 재벌가든 제발 자신하고는 어떠한 사유로든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사장님은 일만 하셔서 들은 것도 없고 해 줄 말도 없습니다.”

    강무진과 자신의 관계를 아는 이가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는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누가 알 수도 없는 게 그와 자신은 두 달 전만 해도 미국에 있었다. 시현은 한국에 기반이 거의 없었다.

    강무진은 시현과 달리 아는 사람이 있겠지만.

    시현은 분란을 일으키거나 갓 입사한 회사에서 잘리는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고 애썼다.

    “직장 상사의 사생활을 알려 달라고 한 건 아니에요. 결혼 얘기가 오고 가는 친구가 이시현 비서님한테 뭘 들을 수 있을까 싶은 거예요.”

    “알려 줄 만한 게 없어서 미안합니다.”

    “어휴, 아니에요. 커피 정도는 제가 사도 되죠?”

    강무진과 자신의 위치가 다르다는 걸 아는데.

    직원을 전부 아는 게 아니라도 누군가와 정보를 흔쾌히 공유할 수 없는 게 비서였다.

    “사무실에 가서 마시겠습니다. 사지 마세요.”

    구내식당에서 소곤소곤하며 부탁한들, 아는 게 있어도 입도 뻥긋할 수 없는데 의도도 불분명해서 몹시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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