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74)

24.

일주일을 야근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친 시현은 금요일 밤 퇴근하자마자 바에 가서 술을 마셨다.

무진하고 멋들어진 곳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것처럼 이상하게 속이 풀리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욕과 원망을 속으로 삼켜서 그런 듯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정 비서가 시현이 사는 곳까지 찾아왔다. 시현은 정 비서를 보자마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른다.

오피스텔로 정 비서가 찾아와서 전보다 더 악질적으로 협박했다.

정 비서가 아직 백혜련을 찾지 못한 듯한데, 거액을 두고 갔다.

‘강 사장님한테 여자가 생겼어. 그러니까 처신 잘해.’

시현은 그 한마디가 완전히 뇌리에 꽂혀서 당혹스러웠다.

정 비서가 주고 가는 돈과 하는 말은 당연히 왕 할머니가 시킨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속이 편하지 않았다.

알딸딸한 상태로 시현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하고 반대인 무진의 집으로 갔다.

무진이 외부 일정으로 바빠서 그가 집에 있는 줄도 몰랐다. 자신보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이니까.

시현은 무진이 준 카드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주방으로 갔다. 제집처럼 냉장고에서 생수랑 맥주를 꺼냈다.

“집에 뭔 술이 이렇게 많아.”

시현은 구시렁거리며 양손에 생수와 맥주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어.”

뭔가 부딪쳤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붉힌 시현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무진이 갑자기 키스했다.

격렬해지나 싶었는데 입술을 떼고 귓불을 깨물었다.

흠칫 놀란 시현에게 속삭이면서 소유욕을 드러내는 무진.

“집에 안 오겠다더니 술은 마시러 오는 건가?”

어이없는 무진의 속삭임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마저 무진의 입술에 먹혔다.

두 사람 사이는 어떤 일이 발생하든 각자 책임지는 거였다.

술에 취한 시현이 몸을 밀착하자 무진은 정신없었다.

키스하고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기 전까지 버텨. 참아 보는 거야. 알았어?”

“아…….”

“나보다 먼저 가 버리면 약속이고 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시현은 가볍게 한 잔 마시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한 잔이 두 잔으로, 두 잔이…….

그리고 무진의 집에 제 발로 온 것이다.

그의 집에 와서도 술을 마시려고 냉장고에서 맥주까지 꺼냈다.

지금은 그의 입술에 막혀 손에 든 맥주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가 한 말을 곱씹어 봐도 들썩이는 몸 때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술기운에 몸이 달아오르는데 짜릿한 쾌감이 관통하니 어쩔 줄 몰랐다.

점차 몸이 예민해져서 무진의 손길이 스쳐도 신음했다.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는 시현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격정적으로 몰아갔다.

울먹이는 시현이 애원하자 움직임을 멈춘 무진은 불만을 토로했다.

“이렇게 유혹하고는 멈추려는 거 아니지?”

“술 취한 여자 싫다면서요.”

또박또박 말하는 시현을 보며 무진은 크게 웃었다.

“맞아. 싫은데, 이시현이 마신 술에 지금 내가 미치겠어.”

“뭐든 제멋대로야.”

“그래서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술을 좀 더 마시고 싶…….”

“그건 내가 싫어.”

시현은 퇴근하고 한잔한 뒤, 무진의 집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도통 나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주변을 잠깐 둘러보니 이곳은 무진의 집이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서 주방에서 마실 것까지 꺼낸 것이다.

술에 취할 만큼 마시고 정신도 못 차려서 그의 집에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강무진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마셨어?”

“아마도요.”

“많이 마신 건가? 얼마나?”

“그런 거 아닌데. 칵테일 두 잔? 석 잔인가 마셨어요.”

한 잔 마실 때까지는 속으로 무진의 가족을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울적한 기분에 예상했던 두 잔을 넘기고 정신을 못 차렸다.

계약대로 애인인 척하며 감시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는데, 요즘은 무진의 말과 행동이 달라진 듯했다.

그래도 그의 집에서 대화를 해 봤자 짜증만 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어정쩡하게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면 시현은 침묵하는 게 버릇이었다.

시현은 몇 잔 마시지 않았는데 목마름에 그에게 벗어나고 같이 있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눈만 봐도 아는 걸까.

몸을 돌려 나갈 생각은 머릿속에만 있고 꼼짝없이 붙들렸다.

그가 맥주를 들고 주방으로 가서 탄산음료로 바꿔서 가져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안타깝고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 취했는데요.”

“알아.”

“무진 씨 집에 오니까 좋은 거예요? 이런 걸 바라요?”

시현이 간간이 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지금이야말로 적당한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머님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텐데, 무진 씨는 날 무기로 생각하고 휘두를 거예요?”

그는 술이 덜 깬 시현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내 무기가 강력하니까.”

“그거 진심 아니잖아요.”

“진심이야. 내 마음을 멋대로 해석하지 마.”

어이없는 그의 말에 화가 났지만, 똑같이 피식 웃었다.

계약이 끝나고 결혼까지 정리되면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마 말로 화를 내지 못하고 양 볼에 바람을 넣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뚱한 그 얼굴은 화를 참는 거잖아. 내가 널 화나게 했어?”

“…….”

“잘 생각해 봐.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뭘까?”

그는 시현을 껴안고 침대에서 구르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무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로 마주 앉아 서로를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그는 시현을 사랑하기에 이혼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계약이 유효하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은 시간 벌기용이었다.

더 나아가 할머니가 포기할 수 있게 끊임없이 시현하고 함께하는 것이 보고되길 원했다.

집에 와서 흐트러진 시현의 모습을 보니까 뭔가 잘못된 거 같았다.

주방으로 걸어가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마주 앉아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무진은 시현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얼굴을 찌푸리는 시현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할머니는 뭘 그렇게 욕심을 낼까.”

읊조리듯 말하며 더 세게 졸고 있는 시현을 껴안았다.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에 혼이 빠질 정도로 시현을 제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돈을 받게 된 건 뻔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고 숨기려고 한 것으로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했다.

감정의 골이 보이지 않게 깊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무진은 불편한 자세로 잠든 그녀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온기가 있는 쪽으로 몸을 조금 움직인 시현을 끌어당겨 안고 싶은데 참으며 바라보는 게 다였다.

무진은 미국에서 풋풋하게 신혼을 즐겼던 날을 떠올렸다.

‘무진 씨는 은근히 따듯해요.’

‘뜨거운 남자라서 그럴걸.’

‘손이 따듯한 사람은 심장이 차갑대요. 나는 손발이 차가우니까 심장에 열기로 가득할 거고 무진 씨는 반대로 심장이 얼음이겠네요.’

‘누가 얼음이래.’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부자여도 시현 앞에서 과시하지 않았다. 처음 계약할 때는 돈지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현은 부모 없이 아등바등 살아서 돈의 가치에 무진과 다른 견해가 있을 뿐이었다.

식성도 비슷하고 오랫동안 대화하면서도 막힘없이 즐겁기만 했다.

예술, 경제 부분에서는 잘 맞아서 애인 역할을 할 때도 서로에게 질리지 않았다.

불행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현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다 해 줄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시현의 눈에는 사랑만 있었으니까.

그는 어떤 징조도 없이 출장 중에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현이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숨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미국에서만 사람을 풀어서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그가 미친 듯이 찾아 헤맨 걸 알면 시현은 자신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우리 관계는 누구도 먼저 끝내지 못해. 회사에서든 집이든. 내 손에 들어온 널 놓지 않아.”

농락하며 끝내 버려둔 시현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할머니도 언젠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시현의 좋은 점을 바라봐 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 

시현은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핸드폰을 찾으려고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잡고 알람을 끄고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멍해진 눈을 통해 보이는 건 흐리게 보일 뿐, 손에 든 핸드폰에서 깜박이는 시간을 확인하고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푹 자려고 퇴근하고 바에서 술을 과하게 마셨지만, 오피스텔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얼핏 무진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꿈인지 모를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때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주말에 일이 없다고 비서가 고주망태가 되는 거 달갑지 않아.”

“꺄악!”

“뭐야? 왜?”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잖아요.”

웃음을 참는 무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제야 시현은 자신이 그의 침실에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그가 나직이 하는 말이 들렸다.

“어제 입은 옷은 버려서 티셔츠를 입혔으니까 놀라지 마. 칵테일을 몇 잔 마셨는지 몰라도 옷을 버릴 수밖에 없었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옷을 버려?

시현은 이불 속에서 속옷조차 입지 않고 티셔츠만 딸랑 입은 걸 보고 있었다.

그가 시현의 속마음을 아는지 말을 덧붙였다.

“옷은 세탁으로도 안 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편하게 입을 거 앞에 놓을 테니까 씻고 갈아입어.”

미치겠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지난밤.

시현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무릎을 잡은 채로 잠들었다가 토한다고 벌떡 일어나 새벽녘에 난리를 피웠다.

화장실까지 가지 못하고 구토하고 무진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 엉엉 울면서 일이 많다고 현재 상사인 그를 욕하며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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