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할머니한테는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왜 시현이 자신에게서 도망을 쳤는지 알지 못했다.
무진은 시현을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 세차게 뛰었다.
당장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강요하고 싶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서라도 말이다.
무진은 책상에 양손을 올려놓고 심호흡했다.
회사 일만큼 자신의 주변에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결혼한 손자며느리를 돈으로 회유해서 도망치게 하고, 당사자는 돈 받은 것만 인정하고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무진은 자꾸 되새길수록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짜증이 났다.
정 비서가 하는 행적도 이해되지 않고 모든 게 화가 날 뿐이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조금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삐끗한 관계를 돌이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이 바쁜 시기에 뭐 하는 짓인지.”
무진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게임 회사의 기획서를 집었다.
***
무슨 정신으로 퇴근하면서 그의 집까지 왔을까.
시현은 운전하는 그를 힐끔거리며 사무실에 찾아온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계약과 결혼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니 그가 선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고 퇴근하면서 또다시 데이트하다가 그의 집에 왔다.
시현은 비서로서의 위치를 지키겠다고 다짐해 놓고 무진과 함께 있다 보면 그 다짐이 무너졌다.
문이 열리자 말도 없이 키스하고 서로를 탐했다.
상상도 안 해 본 탐닉에 움찔하면서도 시현은 매번 신세계를 보여 주는 그에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붙잡힌 이후 감정에 휩싸여서 그런지 점점 자극을 원했다.
“부드럽게 못 해.”
쾌락의 파도가 시현과 무진을 덮쳤다.
그는 시현을 어루만졌다.
무진의 손이 여린 피부를 움켜쥐었다가 매만지기를 반복하자 시현은 흥분에 몸을 들썩거렸다.
그의 손과 입술에 닿은 몸은 절로 비틀어졌다. 그를 밀어내고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다리 안쪽을 배회하며 어루만지는 통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시현이 움찔하자 그는 웃으며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은 느긋하게 그녀를 만지며 무언가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길에 뜨겁게 반응하고 싶지 않은데, 몸은 마음과 다르게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무진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치며 어루만졌다.
다리 안쪽으로 손이 내려가면서도 마주친 시선을 놓지 않았다.
뜨거운 감각에 시현이 허리를 비틀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목 깊은 곳에서 갈라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읏.”
침실이 고요해서 시현의 소리가 이상하게 울리는 듯했다.
시현은 제 입을 손으로 막아 보았지만, 그의 손길에 새어 나오는 신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속옷을 밀고 천천히 다가왔다.
시현은 숨을 참으며 그를 느끼고 있었다.
늘 뜨겁고 은밀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게 조금 달라 보였다.
시현은 무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림을 느끼며 자신을 채워 가는 감각에 빠져들었다.
마주 앉은 채 깊이 파고드는 몸짓은 그의 본능을 깨웠다.
시현의 떨리는 몸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그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침실에서의 고요함을 느끼며 두 사람은 원초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점점 시현을 집어삼켰다.
그의 손길에 뜨거워지면서도 들뜬 신음을 참는 시현의 반응에 무진은 어디서 그녀를 탐하며 같이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핥아대고 은밀한 행위를 하는지를 생각하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무진에게 온몸이 빨려 들어가 잘근잘근 씹히는 느낌이었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시현은 그의 손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열기로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안에서 요동을 치며 찌르는 듯했다. 시현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이렇게 날 반기니까 못 끊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시현은 달뜬 신음을 삼키려 애썼다.
달콤한 말을 하면서 그녀를 몰아치며 폭주하고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갇혀 시현은 그에게 매달리며 결국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한참 후에 침실에는 그의 거친 호흡과 그녀의 신음이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바쁘니까 갈증이 더 심해져.”
“…….”
“책상을 지나칠 때마다 나에게 속삭이는 듯 몸에 즉각 반응이 왔거든. 내가 미친 건가.”
같이 퇴근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곧 회사에도 사장과 비서의 은밀함이 소문으로 퍼질 듯했다.
그걸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현은 자신을 끌어안고 어루만지는 그의 다정함에 매번 놀라기만 했다.
도망은 꿈도 안 꾸고 그저 그가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 내기를 바랐다.
무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신혼 때하고 확연하게 달라진 무언가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듯했다.
시현은 경험이 부족해서 그를 만족시키는 게 어려워도 이론으로 아는 걸 써먹는 건 나쁘지 않았던 걸까.
회사에서 그와 함께 일하면서도 남들이 모르니까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
혼란과 갈등 속에서 무진을 향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걸 몰랐다.
시현은 씻고 욕실을 나와 매번 올 때마다 보는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도 돈 많은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 사장 마틴과 친구였고 돈 때문에 많은 여자가 그에게 접근했던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계약 애인처럼 고용되었던 것이고.
그래도 결혼하기까지 스스럼없이 지냈다.
처음 그와 계약을 진행할 때는 인상이 나빴지만 점점 알아 갈수록 좋은 남자인 걸 알 수 있었다.
여자가 꼬이는 바람둥이라는 것만 빼고.
계약에 따른 데이트도 파트너십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때문에 망친 것인지 뒤죽박죽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은 침실처럼 고요한 게 시현에게 불안감을 불러오고 있었다.
왕 할머니만 생각하지 않으면 과거는 역경보다는 즐거움에 가까웠다.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시현은 무진이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곁에 두려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는 원하면 얼마든지 정략혼이든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을 텐데.
무진이 씻고 나와 어두워진 밖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시현을 뒤에서 다정하고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한쪽 팔은 어깨를 한쪽 팔은 허리를 감았다.
“집이 근사하지?”
“그냥 어둠이 예쁜 건데요.”
“아래를 내려다보면 좋잖아. 높은 곳을 좋아하던 거 알아.”
그가 시현에 관해 아는 것을 한 조각을 꺼내자 어둠처럼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무진은 아차 싶어서 표정을 감추며 시현을 돌려세워 키스했다.
집요하고 부드럽게.
집에 들어오면서 주체하지 못해 시현을 벽으로 몰고 거칠게 키스했는지, 살짝 부어오른 시현의 입술이 그에게 보였다.
***
회사 업무는 투자처가 늘어나면서 미팅과 회의로 바빴다.
시현은 정시에 퇴근도 못 하고 며칠째 야근이었다.
시현은 업무를 제외하면 그가 원할 때 데이트하고 잠자리를 갖는 관계가 되었다.
부부라서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거지만, 남보다 못한 느낌이었다.
끌려다니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성적으로 절대 안 된다는 걸 아는데.
도망친 것을 생각하면 감정이 솟구쳤다.
바빠서 외부에 있는 그는 메시지를 보냈다.
-당분간 집에서 출퇴근하는 거 어때?
시현은 핸드폰 알람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무실에서는 철저하게 비서로 대하면서 사적인 대화를 차단하는 무진의 연락에 망설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답장했다.
-집에서 쉴게요
거절하지 못해서 간단하게 보낸 메시지에 즉각 답이 왔다.
-생각해 봐
시현은 무진의 답장에 당황했다.
계약으로 묶인 자신은 거절할 수 없다는 암시 같았다.
거절은 다른 말로 돌려 말했지만, 매달리지 않는 것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라는 그의 메시지는 시현의 심장을 찌르는 듯 불쾌감을 주었다.
시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진을 사랑하고 매일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싶다는 걸 그가 알면 당장 계약이 매듭지어질지 모르는 관계라는 걸.
절절한 사랑도 같이 꿈꾸는 미래도 이제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런 관계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고 슬픔을 준다는 것을.
시현은 늦은 시각 사무실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시울이 붉어졌다.
공부도 일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선을 다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좋아했던 그에게 그간 힘들었다며 그의 할머니가 한 말을 들려주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과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희망을 품지 않겠다고 한 건, 가까워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
강무진은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허상이자 신기루 같은 꿈이었다.
어리석은 이시현.
멍청해도 이러지 않아.
스스로 욕을 퍼붓고 싶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백혜련이라는 이름이 계속 거론되고 있었다.
시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억지로 눈을 비볐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보다 지금은 일할 때였다.
책상에 앉아 보고 자료를 정리하다가 박 실장을 힐끔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실장은 백혜련에 관해 무언가 알 것 같았다. 무진의 최측근이자 자질구레한 일도 도맡아서 하는 비서실장이니까.
눈시울이 붉어진 눈을 손거울로 보다가 감정이 덜 보이는 메신저를 켰다가 바로 꺼 버렸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걸 알면 그걸 더 이상하게 보고 되물어볼 것 같았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도망치지 말걸.
아버지하고의 추억이 많은 곳에서 살면 덜 힘들었을까.
여전히 강무진이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잡고 흔들고 있었으니까 골치가 아팠다.
시현은 거짓말을 잘 알아채지 못했고 거짓 자체에 면역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믿고 안 믿고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가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알아챌 만큼 눈치가 없었다.
싫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늘 양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바보도 아니었다.
지금은 미련한 곰같이 그가 하는 행동에 반격도 못 하고 쩔쩔매고 있으니 갑갑했다.
책상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손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쓰게 웃었다.
괜히 자료 정리하다가 백혜련이라는 이름을 보고 쓸데없는 생각에 일할 시간을 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