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74)

22.

미국에서는 냉동식품을 데워 먹었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시현을 생각해서였다.

물 조절을 늘 실패해서 남동생하고 단둘이 살 때도 요리는 동생 세현의 몫이었다.

“무진 씨는 안 먹어요?”

“난 커피면 돼.”

“출근 안 하고 이래도 되는 거예요?”

“질문은 그만해. 천천히 출근해서 급한 것만 처리하고 주말까지 같이 쉴 거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로막고는 짓궂게 웃었다.

진한 커피 향과 김치볶음밥이 묘하게 어울려졌다.

“잘 먹었어요.”

“설거지도 내가 할 테니까 씻고 나와.”

욕실에 들어간 시현은 거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젯밤부터 낮까지 얼마나 흩어지고 흔들렸는지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감기 전에 빗으로 엉킨 걸 풀며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옅어진 흔적에 다시 울긋불긋 불꽃이 피어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왜 이래.

꼭 제 것을 찜하는 것처럼 뜨거운 입술로 만들어진 열꽃에 한숨이 지어졌다.

설마, 이것도 할머니가 보낸 감시자에게 보이려는 건 아니겠지.

시현은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강무진이 그 정도로 할머니를 포기시키려는데, 절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씻고 나오니 새 옷이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시현은 옷을 갈아입고 옅게 화장하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도 말끔하게 출근 준비를 마쳤고 함께 회사로 갔다.

*** 

평창동 왕순자의 저택.

주말에 시현하고 시간을 보내지 못한 무진은 시큰둥하게 할머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싫다는 손자의 말을 끝끝내 들어주지 않고 철옹성 같은 백야 그룹을 만들겠다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앞이 탁 트인 거실에 앉아 정원을 힐끔거리며 할머니가 주는 홍차를 마셨다.

애써 웃어 보이며 할머니의 속을 건드렸다.

“제 아내는 시현이뿐이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게 이 할미한테 할 말이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미 말을 안 들어?”

“할머니는 100세는 거뜬히 넘기고 건강하게 사실 겁니다.”

“그 가난뱅이가 너한테 뭐라고 이 할미 속을 뒤집어.”

매번 같은 말이었다.

“제게 웃음을 줍니다.”

“웃음? 그걸 말이라고.”

“저하고 말이 통하는 여자니까 좀 예쁘게 봐 주세요. 조만간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됐다. 그런 애를 집에 들일 생각하지 마라.”

“돈은 제가 가지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 겁니까. 오히려 제 돈을 갈취하려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진이 엄살을 피워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할머니였다.

돈이 중요하다면서 더 큰돈을 원하는 집안하고 정략결혼을 하라고 하니 모순이 따로 없었다.

가난하다고 남의 것을 탐하고, 돈이 많다고 남과 나누는 게 아닌 것을.

무진은 할머니가 그저 손아귀에 모든 걸 쥐고 흔들고 싶은 권력자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머니를 비롯한 작은어머니들과 사촌들한테 모질게 할 수 없었다.

“결혼식도 그게 뭐냐. 너도 숨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냐.”

“시현이가 논문 준비로 바쁠 시기라 결혼 준비를 할 수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이리저리 뜯어 봐도 그 애는 아니다.”

“제대로 봐 준 적도 없으면서 뭐가 아닙니까.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저를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거 다 거짓이다. 이 할미가 언제 허튼소리 하든?”

무진은 다른 사촌들과 다르게 애정을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자신을 더 가엽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걸 모르지 않았다. 홀로 이만큼 키운 것이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씨를 뿌리는 종마는 아니었다. 정해 준 상대와 결혼해서 자식을 몇 명을 낳고 살아야 한다고 계획을 쭉 짠 할머니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자애롭고 순종적인 어머니의 영향보다는 고집불통인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 고집하면 그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 마음먹으면 결과를 내야 하는 성격까지 부모보다는 할머니를 닮았는지 모른다.

무진은 할머니를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자기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둘 수 없었다.

할머니가 시현을 싫어하는 이유가 타당했으면 마지못해 들어주려고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는 그의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뭘 해도 절대로 받아 줄 생각이 없는 할머니를 설득하는 것도 지쳤다.

자신에게 시현을 빼돌려 놓고도 할머니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키워 주고 애정을 쏟은 할머니를 생각해서 참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짝지어 달라고 오는 손자들이나 신경 쓰세요. 다들 할머니한테 귀염받을 상대를 찾고 있지 않습니까.”

“아서라. 내가 그것들한테 네 것을 줄 것 같냐. 이 할미는 너뿐이니까 네 녀석이 포기해.”

“할머니.”

“그 가난뱅이는 안 된다니까.”

왕순자는 고집을 피우는 무진을 나무라고 있었다.

대화로 풀려고 해도 안 되고 돈을 줘서 쫓아내려고 해도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무진이 시현을 놓지 않기 때문이었다.

출장 갔다가 와서 어떻게 찾았는지 이젠, 회사에 앉혀 놓기까지 하니까 속이 문드러졌다.

무진의 결혼만큼은 자신이 주도해야 하는데, 도통 말을 듣지 않으니까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타들어 갔다.

이상한 아이라는 걸 알려 줘도 포기하지 않으니 지켜만 보다가 손자를 잃을 것 같았다.

왕순자는 귀국하자마자 회사를 하나 인수해서 백야 그룹 일은 비서실장한테 떠넘기고 있는 무진을 시현이 망친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간에 다 말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정리해서 이 할미 마음 놓게 하지 않으렴?”

“할머니가 시현이를 받아 주는 게 더 빠릅니다.”

“이 할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황금이 나온다. 제발 이 할미 말을 들어.”

할머니가 등을 때리자 엄살을 부렸다.

“아픕니다.”

“네 녀석하고 어울리지 않는 애를 왜 곁에 둬?”

“좋아서요. 할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거면 다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같다고 생각하고 시현이를 받아 주세요.”

“못해. 그 애는 정말 아니야!”

무진은 할머니가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은 지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알았다.

그가 할머니의 성격을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으니까.

“이만 가겠습니다. 손자 얼굴 많이 보고 싶으면 시현이를 인정하고 결혼식도 근사하게 치러 주세요.”

“이놈이 못 하는 말이 없어!”

“할머니 눈치 보느라 어머니는 며느리 얼굴도 못 보고 있습니다.”

“이 녀석이!”

“시현이를 할머니만큼 사랑하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무진은 시계를 힐끔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슴을 치며 할머니가 혈압이 오른다고 말해도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확실하게 말해도 할머니가 사람을 써서 궁지로 몰아넣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돈을 받고 도망간 시현을 놓아주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고 생각해 봤다. 하지만 30년 넘은 세월 동안 감정적인 상대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한 번 만나서 대단한 인연인 듯 들러붙는 사람만 봐서 그런지 시현은 참신한 데다가 똑똑해서 마음에 들었다.

결혼 자체에 흥미가 없었던 자신이 가슴앓이할 정도로 애태우는 상대는 시현뿐이었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였기에 무진의 마음을 뒤흔드는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할머니는 모르는 듯했다.

그깟 돈이 없다고 가난뱅이라고 하다니.

돈으로만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할머니한테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무진은 세 군데 게임 회사 중, 획기적 기획서와 마케팅까지 준비된 쪽으로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도 많고 사람을 자주 만나느라 시현을 회사에서만 보고 있었다.

투자에 관한 프로젝트를 여러 개 진행했다.

무진의 바쁜 일정에 박 실장과 더불어 시현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시현을 비서로만 마주하는 날이 달갑지 않았다. 함께하지 못하는 시간이 아쉬웠다.

무진은 문득 돈을 받고 숨어 버린 시현의 진짜 생각이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든 자신을 믿지 않고 한국으로 혼자 귀국했으니까.

처남한테도 어디서 뭘 하는지 알리지 않고 귀국해서 한 달 동안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까지.

알 수 없는 행보였다.

그가 돈이 많다는 것을 시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백야 그룹하고 연관성을 몰랐어도 도망칠 이유가 있었을까.

무진은 시현의 속이 궁금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녀를 더 압박해서 곤란해지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현의 몸을 탐하고 서로 감정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충분했다.

원초적인 감각에만 신경 쓰는 황당한 부부.

한쪽은 이혼을 원하고, 한쪽은 집착하는 희한한 부부였다.

그는 시현이 도망쳐서 한 달 동안 뭘 하려고 했는지 따로 묻지 않았다.

하지만 바쁠수록 머릿속에는 다른 말이 생각나기도 하고, 한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닿고 싶어서 갈증을 느꼈다.

“정신을 어디에 두는 건지.”

무진은 자신이 바빠서 박 실장과 시현은 정신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시현의 꽁무니를 쫓듯 보기만 하면 시선이 꽂혀 있었다.

무심하게 일만 하는 시현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시현을 놓게 될까 봐 허전함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무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딴생각해도 일만큼은 철저하게 하고 있는데, 주말에 할머니를 만나고 온 뒤로 정신이 흐트러진 것 같았다.

그리고 정 비서가 쫓는 백혜련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무진의 신경을 묘하게 자극했다.

전국에 있는 백혜련을 찾아가 만나려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굴 찾는 건지.

정 비서한테도 사람을 붙였는데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진은 시현의 단조로운 일상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얼마나 숨겼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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