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74)
  • 20.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마음이 편할 테니, 맛있는 과일을 포크로 폭 찔렀다.

    “많이 먹어.”

    시현은 무진에게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을 기억하며 자신을 지켜보면서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고마워요.”

    “내일 오전에는 박 실장이 있을 거니까 병원 갔다가 출근해.”

    “그래도 돼요?”

    “박 실장이 구시렁대겠지만 뭘 어쩌겠어. 많이 먹고 쉬어. 푹 쉬라고는 못 하지만.”

    일이 많고 바빠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럴게요.”

    과일 한 접시를 다 먹는 것을 지켜보는 무진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시현은 백혜련과 정 비서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사무실로 연락한 왕 할머니의 심부름꾼이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무언가 알고 싶다면 그에게 많은 걸 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현은 과일만 먹고 더는 대화하지 않았다.

    시현은 그가 가는 것을 보고 같이 사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줄 알면서.

    *** 

    며칠 후.

    잠잠한 왕 할머니의 측근 때문에 무진과 시현은 바쁘게 데이트하기 바빴다.

    누구를 위한 일인지 몰라도 먹고 마시고,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을 감시자가 볼 수 있게 했다.

    일을 마치고 같이 차에 타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시현과 무진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허리에 팔을 감는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데이트를 끝내고 그의 집으로 가서 숨 쉴 틈도 없이 그는 시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격렬하게 키스했다.

    입술이 맞물린 채 무진에게 안겨 침대로 갔다.

    시현은 옷을 능숙하게 벗기는 무진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시현의 몸을 다 아는 듯 머뭇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탐험하며 어루만졌다.

    시현이 달뜬 신음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입술이 닿는 데마다 열꽃이 피어올랐다. 집요한 그의 손과 입술에 참을 수 없는 감각에 빠져 시현은 무진의 머리를 붙잡았다.

    밀어낼 수도 없는 폭풍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쾌감에 버둥거릴수록 그의 강한 팔에 잡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무진의 입술이 어디를 지나가고 머무는지 알기에 미칠 듯한 흥분에 발끝이 저렸다.

    “아읏.”

    시현의 시야에 침실의 은은한 조명이 어지럽게 흔들려 보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은 쾌감에 흠뻑 젖은 채로 불꽃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지르는 교성이 자신의 소리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리를 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힘들어요. 아!”

    시현은 그를 따라가기가 버거워 고개를 내저었다.

    침대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제 몸 위로 그의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힘겹게 그를 받아들이며 달뜬 신음은 멈추지 않았다.

    강렬한 욕망에 젖은 무진이로 인해 시현 또한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부드러웠던 손길이 그녀를 매만지면서 강해지고 거칠게 밀어 붙었다.

    그는 시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것처럼 강하게 쳐올리기만 했다.

    시트를 움켜잡은 시현의 몸이 그에게 빨려 가는 듯했다. 그의 침실에 시현의 신음이 가득 채워졌다.

    내지르는 신음이 커지자 그는 시현의 입술을 물고 강하게 빨아 댔다. 그로 인해 시현의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절정에 다다르자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퍼졌다. 시현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 우리는 뭘 해도 딱 맞는다니까.”

    그는 자신의 상체를 아래로 내리며 시현의 다리에 입맞춤했다. 숨을 헐떡이며 다리에 그의 입술을 느꼈다.

    입술이 닿으며 짜릿한 쾌감과 함께 시현은 다시 신음을 흘렸다.

    “읏.”

    허리를 숙여 시현의 얼굴을 잡은 그는 격렬하게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술이 맞닿아 숨결이 뒤섞였다.

    시현은 무진의 강한 팔을 잡고 그의 아래에서 달뜬 신음만 내질렀다.

    그는 시현의 소리에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시현은 숨이 막히도록 강한 압박으로 발끝까지 전해진 감각에 온몸이 전율했다.

    그가 주는 감각은 시현의 모든 것을 휘감고 있었다.

    사정없이 거칠게 밀어붙일 때마다 시현의 몸이 정신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강한 자극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허리를 비틀어 댔다. 질주하듯 끊임없이 파고드는 뜨거움에 온몸이 정말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거친 그의 움직임으로 두 사람은 열화에 휘감겨 있었다. 그 열기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가 주는 자극이 강해질수록 시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밀어붙여서였다.

    “천천히! 아!”

    격한 몸짓에 그를 멈추게 하려고 해 보아도 사정없이 쳐올렸다.

    시현은 절정에 다시 다다랐다.

    그가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갔다.

    “네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놓겠어.”

    집요한 집착 같은 말에 시현이 놀라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제 시작이야.”

    혀로 목덜미를 핥으며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는 시현에게 시선을 둔 채 다시 몸을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질 수 없는 구름에 오르듯 말 듯 짜릿했다가 푹 꺼진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세를 몇 번을 바꾸면서 그는 시현을 밀어 붙었다. 가냘픈 몸이 휘청거리면 강인한 팔로 감싸 안았다.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쾌감에 다시 치달은 시현은 무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황홀한 감각에 정신이 없었다.

    시현은 가쁜 숨을 가라앉히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침대와 자신에게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있는데도 무진의 눈빛에 욕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침대 시트로 몸을 가리지 못한 시현은 무진이 욕실에 들어가자 끝이 난 줄 알았다.

    다른 욕실을 사용하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진을 보고 멈칫했다.

    “……더는 못 해요.”

    무진이 시현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픽 웃었다.

    몸을 숙여 시현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양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

    “못 참겠어. 미안.”

    그의 키스에 안 된다는 시현의 말은 흘러나오지 못했다.

    욕실에서 더 격렬해진 시현은 무진이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을 끝까지 몰아세우는 게 힘들었다.

    울먹이고 쓰러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그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매번 깨달았다.

    다음 날.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는 시현은 욕실에서 나오자 직접 옷을 입혀 주는 무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예요?”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거 같아서 대신 입혀 주는 건데 싫어?”

    “이런 건 결혼 생활 중에 안 했잖아요.”

    “이시현. 그때와 지금은 달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어차피 이혼할 사이에 뜨거운 밤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함께한다는 게 우스웠다.

    시현은 감시자가 보지 않는 이런 상황은 어떤 식으로 왕 할머니한테 보고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시간을 버는 건지, 정말 할머니한테 맞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원하는 게 뭘까.

    결혼했기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불륜인데, 그런 걸 묵인할 남자가 아니었다.

    할머니하고는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시현은 셔츠 단추까지 다 채워 준 무진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받아.”

    “뭔데요?”

    “언제 와도 상관없으니까 가지고 있어. 벨을 누르거나 내가 문을 여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 같아.”

    “정말 집까지 쫓아와서 우리를 본다는 거예요?”

    “여자들을 떼어 놓는 게 아니라 진작 할머니를 포기시켜야 했어. 이렇게 집요할 줄 누가 알았겠어.”

    집요한 건 그쪽인데요.

    누굴 위해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시현은 무진에게 하고픈 말을 미소로 감추었다.

    “이사 와도 돼. 우리가 따로 사는 거 알면 처남이 얼마나 놀라겠어.”

    비꼬는 말에 시현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동생이 군에 있어도 감시자가 붙어서 면회도 못 가고 있었다. 어차피 몇 달만 있으면 제대할 거니까.

    시현은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이 상황이 진저리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발을 뺄 수도 없으니 무진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시현은 그의 집을 드나들 수 있는 카드키를 손에 들고 씁쓸한 생각에 울컥했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박 실장이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으니까 같이 출근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그의 집 드레스룸에 자신의 옷이 있다는 것은 조금 소름 끼쳤다.

    완벽하게 그의 의도대로 끌려가고 있어서 놀라웠다.

    그에게서 도망쳤다고 감정이 메마르고 흔들리지 않게 단련될 수 없었다.

    무진에게 잡힌 순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집 열쇠가 뭔 대수라고.

    그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무진의 뜨거움, 거친 생각에 시현도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시현은 방금 그가 집무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어제 있었던 일을 잊으려고 했다.

    그의 집무실 문이 닫힌 걸 보고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집무실 문을 자꾸 힐끔거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는 상사이고 남편이고 애인인 척해야 하는 계약의 갑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그의 생각에 빠진 자신을 나무라지만 무진을 떠올리는 걸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며칠 사이 한층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밖에서 애정 행위를 서슴지 않아서 회사 안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걱정되었다.

    누구라도 눈치채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진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내가 포기하는 게 더 빠를지 모르는데.’

    무진과 왕 할머니의 싸움에서 자신만 망가지는 거 같았다.

    바쁜 일을 끝내고 시현은 퇴근하면서 핸드폰을 들었다가 놓았다.

    점심때 박 실장과 나간 무진에게서 연락이라도 올까 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만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이 실컷 볼 수 있게 데이트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몸으로 대화하는 정도.

    그래서 자꾸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혼할 거면 자신만이라도 무심하게 그와의 거리를 둬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자신이 혼란스러운 것을 무진이 알지 않기를 바랐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창문을 닫고 퇴근을 서둘렀다.

    자신도 바쁘지만, 박 실장은 정말 일에 미친 상사를 모시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 실장이 사무실에 있을 때는 더 열심히, 많이 일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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