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74)

19.

다부진 몸에 비율이 좋아 눈에 띄게 잘생긴 그에게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직원들은 연예인 같다고 수군거렸다.

운용사 직원들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이 된 듯했다.

더불어, 새로 입사한 자신까지 상상력을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 내일까지 박 실장이 없으니까 수고 좀 해.”

“네.”

무진이 집무실로 들어가고 박 실장이 없다는 것에 시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빠르게 그가 마실 커피를 준비해서 올라온 자료를 가지고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슈트 상의를 벗고 여러 대의 컴퓨터를 켜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설탕은 넣지 않았습니다.”

“박 실장이 없을 때 수고스럽지만 화상 회의에 참석할 수 있지?”

정리된 서류와 커피를 내려놓으며 시현은 묻는 말에 빠르게 대답했다.

“네.”

“영어니까 받아 적는 것까지 하고.”

“알겠습니다.”

그는 자료를 하나씩 훑으며 말했다.

“투자처로 선정된 운성건설의 재무제표는 다시 볼 수 있게 준비해 줘. 그리고 바쁜 거 끝나면 데이트해야 하니까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네.”

무진은 진한 커피를 마시며 각종 신문을 훑고 전날 마감된 주식 동향을 살폈다.

내수 건설 경기가 좋지 않아 몇몇은 건설사 투자를 꺼려서 확정적인 게 필요했다.

투자를 꺼리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무진은 눈에 불을 켰다. 정리된 자료에서 숫자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불황이어도 잘되는 사업은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를 인수하면서 내실을 다지며 확장도 해야 했다.

미래 지향적인 투자가 필요할 때 엉뚱한 곳으로 돈이 쏠리지 않게 확인할 게 많았다.

운성건설의 주식 동향과 은밀하게 알아본 자료까지 검토를 끝낸 무진은 몸을 뒤로 젖혔다.

그때 책상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무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슨 일입니까?”

-넌 이 할미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냐?

“바쁩니다.”

-약속 잡은 만찬 자리가 있는데 올 거니?

할머니의 속셈이 너무 뻔해서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다. 네게 아주 크고 견고한 날개를 달아 줄 사람이니까 얼굴 좀 비치는 게 좋겠구나.

“할머니만 좋은 거 아닙니까. 바빠서 시간 내기 어렵습니다.”

-다 널 위해서 만든 자리야.

“할머니. 저 유부남입니다. 결혼한 남자가 외간 여자를 이어 주는 자리에 나가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게 무슨 결혼이냐! 무효야!

“역정 내지 마시고 인정 좀 하세요.”

할머니의 잔소리가 싫은 무진은 법을 운운하고 싶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 싫은 건 잡아끌어서라도 기어이 망가뜨리는 할머니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현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빼돌리려고 했어도 참는 것은 할머니가 안타까워서였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는 만큼 언젠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줄 거라고 믿는 마음으로 참고 있었다.

무진은 백야 그룹이 사업을 매개로 결혼으로 엮이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즉흥적이어도 시현을 사랑하기에 결혼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할머니가 야속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시현이 버텨 주기만을 바랐다.

-그 애는 정말 아니다. 다시 생각해 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머니 생각대로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뭘 몰라!

“만나서 밥 한 끼도 안 먹어 봤으면서 시현이를 어떻게 압니까. 제 돈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여자입니다.”

-그거 다 헛거다. 그 애가 얼마나 악독한데.

“저는 만찬 자리에 못 가니까 이상한 여자 좀 보내지 마세요.”

-무진아, 이 할미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매정하게 말해. 백야 그룹과 이 할미가 가진 건 전부 네 거야. 네 거라고.

“작은어머니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겁니다. 그분들이 할머니한테 오죽 잘했습니까.”

-됐다! 이건 다 네 거니까 그 애를 버리려무나.

“할머니. 저 바쁩니다. 주말에 찾아뵐게요. 끊습니다.”

전화를 끊는 무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할머니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더 대놓고 행동하는데, 먹히지 않았다.

결혼에 인생을 저당 잡히지 않고 누구도 가까이에 두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무진은 할머니의 불통에 씁쓸한 얼굴로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이 열리고 시현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앞에서 무진의 의중을 물었다.

“사장님, 장소연이라는 분이 전화했는데 연결할까요?”

“누구?”

“장소연이라고 왕 할머니의 심부름 때문에 전화했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야. 할머니를 입에 올린다고 다 연결하지 마.”

“알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지 않나, 이제는 회사에 전화해서 뭐 하자는 건지.

무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감정적인 것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할머니하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할머니의 심부름이라는 말에 짜증이 났다.

그는 사업차 만나는 사람들한테도 자신이 결혼했다고 알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결혼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런데 아무나 들러붙게 하는 게 전부 할머니가 꾸민 일이라는 것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방금 전화 통화로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핸드폰을 몇 번이나 바꾸어야 하는지.

무진은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여자가 전화를 연결해 달라는 데도 넌 표정이 안 바뀌네.”

문득 무진은 시현과 짧은 결혼 생활 중에 좋았던 일을 떠올렸다.

말버릇처럼 호흡이 좋다, 잘 맞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는 정말 그를 위해 있는 것처럼 모든 게 맞았다.

대화의 주제가 돈이 아니었고 풍부한 상식이 통하는 사이였다.

무언가 요구한 적도 없고 돈이 필요한 그녀에게 접근해서 계약으로 묶은 것도 자신이었다.

할머니한테 가난하다고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다고 했으면 시현을 달리 봤을까?

무진은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를 거역했다는 이유로 시현의 좋은 점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아……, 네가 도망만 안 갔어도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고.”

원망 섞인 푸념으로 무진은 한숨만 내쉬었다.

*** 

시현은 퇴근 직전에 무진의 메시지를 받았다. 눈은 메시지를 읽고 있는데 답장은커녕 머릿속이 비어서 깊은숨만 내쉬었다.

“후유…….”

퇴근 직전에 박 실장이 사무실에 와서 정시에 나올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는 박 실장이 급하게 사무실에 와서 무진과의 독대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머리가 지근거릴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같은 사무실에 문 하나를 두고 있는 무진의 메시지를 살짝 무시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바빠서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어젯밤부터 머리가 울리고 식은땀이 났다.

만사가 귀찮았다.

박 실장이 있으면 그나마 산더미처럼 쌓인 일도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박 실장이 없을 때도 일만큼은 완벽히 잘하고 싶어서 몸이 좋지 않은데 쉰다고 말하지 않았다.

결근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태가 그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다.

시현은 오피스텔에 와서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괜히 물장구를 치며 눈을 감고 무진과의 관계를 곱씹었다.

그는 받은 것은 자신의 것이라고 했지만 왕 할머니가 준 돈은 거액이라 갖기에는 꺼림칙했다.

시현은 욕조에 미끄러지듯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뭐가 옳은지 몰라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시현은 물이 식기 전에 욕조에서 나와 씻고 옷을 단단히 입었다.

돈과 사회적 지위, 외모, 재력 등 편견이 아니라 이해 자체가 안 되는 애인이 되는 제안이었다.

욕실을 나와서 얼굴에 로션을 바르면서도 온통 강무진 생각이었다.

속이 불편해서 우유를 데워 먹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 누구세요?”

“문 좀 열어.”

인터폰으로 보인 게 과일 바구니여서 물었는데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진 씨?”

“어. 문 좀 열어 봐.”

시현은 양팔 가득 과일 바구니를 안고 있는 무진을 오피스텔로 들어오게 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가 주방에 가서 과일을 놓을 때까지 멍하게 있었다.

“낮에 목소리가 안 좋은 거 같아서.”

“이걸 무진 씨가 산 거라고요?”

“비싼 것만 담았어.”

감기 기운이 있는 걸 자신보다 먼저 알았다는 거야?

결혼해서도 그는 시현이 감기에 걸리면 항상 과일을 사 와서 직접 깎아서 입에 넣어 주곤 했다.

레몬도 잔뜩 사 와서 즙을 내서 시원하고 상큼하게 마실 수 있게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심란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시현은 과일을 하나씩 바구니에서 꺼내 냉장고에 넣는 무진을 만류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애인인 척하는 것은 계약에 묶여서 끝까지 해낼 생각이니까.

그런데 그는 과일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시현에게 고르라며 묻고 있었다.

“뭘 먹을래? 망고? 멜론? 파인애플?”

“괜찮아요.”

“우유로 되겠어?”

그는 시현에게 물어보고 대답은 듣지 않았다.

식탁에 있는 우유를 도로 냉장고에 넣고는 그는 수분이 많은 멜론을 깎아서 접시에 담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데 안 하던 짓을 서슴지 않았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시현은 무진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1인용 식탁에 시현을 앉혔다.

“먹어.”

그가 포크에 찍어서 주는데 시현은 마다할 수 없었다.

“왜 온 거예요?”

“감기 걸려서 나한테 옮길까 봐.”

“뭐라고요?”

“먹으라고.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챙기는 거야. 됐지?”

“박 실장한테도 이렇게 해요?”

“박 실장은 철인이야. 이런 건 안 하고 보너스로 대체하니까 걱정하지 마.”

시현은 못되게 말해도 챙겨 주는 무진의 다정한 마음이 나쁘지 않았다. 자상하게 굴면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짜인 것처럼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는 신경을 안 쓰는 듯하지만.

“잘 먹을게요.”

시현은 무진의 순수한 호의가 아니어도 지금 목이 따끔거려서 그가 사 온 과일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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