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74)
  • 18.

    시현의 속도 모르고 스카이라운지에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흘렸다.

    그는 사랑해서 자신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왕 할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잘난 남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부부니까 침대를 공유하고, 도망쳐서 그가 곤란해지기 싫으니까 계약을 운운해서 곁에 두려는 거였다.

    사랑이라는 말은 믿지 않을뿐더러 들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그를 미치게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하니까 웃음이 났다. 그에게 반격할 만한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자신이 묻는 말에 무엇 하나 정답을 말하지 않는 그에게 뭘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시현은 생각이 많고 할 말은 있는데 입안에서 거친 돌이 굴러가듯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진 씨를 미치게 한다니까 이상하네요.”

    “사랑도 포함하라니까.”

    “설마, 우리가 대화하는 것까지 할머님한테 들어가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 그런 기술이 있으면 벌써 우리가 연기하는 걸 알 텐데.”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별의별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같이 사는 거 생각해 봤어?”

    “아뇨.”

    “애인인 척하는 것보다는 아내로 있는 게 할머니를 포기하게 하는데, 쉬울 거야.”

    “글쎄요.”

    부정하고 싶은 말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한 게 진심일까.

    호텔에서도 줄기차게 사랑해서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들었지만, 그때마다 ‘장난감’이라는 단어가 깊숙이 찔러 댔다.

    시현은 생각하느라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가는 것을 몰랐다.

    애인보다 아내라고?

    그 미친 짓은 안 하고 싶어.

    답이 하나인데 시현은 입 밖으로 부정적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칵테일 잔에 손을 뻗는데 그가 시현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왜요?”

    “그만 마셔. 술 취한 여자를 안고 싶지 않거든.”

    “누가 술에 취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

    “빼지 마. 그리고 집보다는 조금 나은 곳에서 과시할 게 필요해.”

    잡힌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라운지에서 곧장 엘리베이터 탔다. 호텔의 펜트하우스로 가는 동안에도 시현은 진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했다.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무진이 키를 꺼내 문을 열고 시현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에 기댄 채 그의 팔에 갇힌 시현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가 시현의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칵테일 맛인가. 달콤해.”

    “무진 씨.”

    “달라진 건 없어 이건 계약이 아니야. 저번처럼 나에게 널 던져 봐.”

    이럴 때 왜 감정이 먼저 흔들릴까.

    겨우 한 달 떨어져 지냈을 뿐인데 그가 그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와의 열화는 언제나 짜릿했고 최상의 감작을 불러와 그녀를 환희로 가득 채웠다.

    이혼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할머니를 물리치면 원하는 것을 해 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억지로 침대에 눕히지 않겠지만 그의 유혹을 뿌리치는 게 펜트하우스를 벗어나기보다 어려웠다.

    시현은 무진에게 약했다.

    스스로 그걸 알기에 장난감처럼 살지 않으려고 돈을 받고 숨어 버렸는데, 헛수고가 되었다.

    침대에서의 열화로 서로에게 온기를 불어넣어 주면 달라질까.

    미국에서 애인이 되는 계약을 너무 쉽게 한 걸까.

    시현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태워 버릴 것 같은 무진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시현은 무진을 원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계약을 이행하는 느낌보다는 부부인 게 나았다.

    왕 할머니가 붙인 감시자가 지금 자신들을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파국으로 치닫지만 않으면 무진의 애인, 아내로 지내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서로 할퀴고 상처 입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에 자꾸 되돌이표처럼 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이 나왔다.

    “계약은 내가 끝내는 거잖아. 날 질리게 해 봐. 회사든 침대든.”

    “할머니는 어쩌고요? 이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어서 날 끌어들이는 거잖아요.”

    “돈 받고 도망치지 않았으면 조금 더 수월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래도 너무 가깝다고 말하려는데 무진의 커다란 손이 시현의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절묘한 타이밍에 그가 키스했다.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키스.

    그가 선사하는 짜릿한 순간. 시현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안아 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라는 기대로 몸이 떨렸다.

    그는 정말 날 원하는 걸까.

    시현은 호텔에 숨어 있으면서도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누구도 그녀의 반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정 비서조차 반지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그냥 싫어졌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의 곁에 머물면 장난감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 버려질 텐데, 그걸 알면서도 감정적인 것을 정리하지 못했다.

    여기서 넘어가면 다시는 못 벗어날 텐데.

    그는 정말 날 안고 싶은 걸까.

    어쩌면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인생이어서 자신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실패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오만한 남자니까.

    돌이킬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을 넘어 버린 관계는 남보다 못하다.

    무진을 밀어내라고 속삭이는 이성의 소리에 팔을 들어 보려는데 머릿속은 생각만 할 뿐, 달콤한 키스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읍.”

    맞붙은 입술이 떨어질 줄 모르고 오랫동안 숨결을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열정적인 키스에 빠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간 숨겼던 감정을 응답받는 것처럼 그의 할머니를 생각하지 않고 둘만 신경 쓰고 싶었다.

    그것이 헛된 꿈으로 끝날까 봐 두려웠다.

    말과 다르게 솔직한 몸의 반응에 그가 얄밉게도 그녀의 정신을 흔들어 댔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어루만지며 여전히 사랑스러움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렇게 양심도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있어서 할머님만 없으면 새 삶도 가능할 거 같았다.

    고난을 함께 극복하는 게 부부인데 그러기에는 그가 버거워서 도망을 선택했다.

    아무리 결혼을 유지하고 있어도 그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달콤한 키스는 늘 좋은 기억을 불러오고 몸을 떨게 했다.

    숨이 막히고 불꽃에 휩싸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사이라고 알려야 했지만 달콤함은 이성적의 끈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건 우리를 위한 거야.”

    “무진 씨.”

    “왜 날 버리려고 하지? 우리는 처음부터 잘해 왔는데.”

    시현은 말없이 길게, 땅이 꺼질 듯 숨을 내쉬었다가 무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서로의 숨결을 앗아가듯 거칠게 키스했다.

    침대에 눕혀진 그녀는 그의 손길과 열기로 가득 찬 눈빛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시현의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다시 키스를 퍼부었다가 입술이 떨어지면 달뜬 신음을 내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정하듯 그의 손이 시현에게 닿으며 다시 입술이 내려앉았다.

    무진의 입술을 아찔한 감각에 빠져들라고 손짓하는 속삭임처럼 다가왔다.

    이전에도 늘 뜨겁고 부드러웠기에 열화는 금세 두 사람을 뒤덮었다.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을 머금고 시현과 무진은 빈틈없이 갈망하는 것을 채워 갔다.

    가벼운 계약과 즉흥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결혼 생활처럼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훑어가고 있었다.

    점점 아득해지는 감각에 무진의 이름을 신음에 섞어 불렀다.

    행복을 꿈꾸며 함께하자고 사랑의 맹세를 담았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때 뒤에서 시현을 끌어안은 무진이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입을 맞추었다.

    “뭘 해도 우리는 호흡이 좋아.”

    잠깐의 갈등이 무색할 정도로 키스에 넘어가 스스로 그와 은밀한 밤을 보내고 있는 시현은 이런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알 것 같았다.

    예정대로 그의 할머니가 이길 싸움일 테니까.

    그는 자신이 도망친 것처럼 그녀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잊히지 않는 관계는 없었다.

    세상의 빛을 보게 한 어머니도 자식을 버리고 살아가지 않던가.

    감정에만 매달리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렇게 뜨거움이 온몸을 휘감으면 정신이 없었다.

    시현은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는 시현의 뺨을 어루만지며 몸을 밀착하고 입을 맞추고, 키스는 점점 격렬하게 변해 갔다.

    ***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일하는 관계였다.

    박 실장이 있는 날에는 온종일 사무실을 지키는 신입 비서였다. 박 실장이 자리를 비우면 온갖 잡다한 심부름을 하는 몸종 같았다.

    일정 관리로 마주하는 날이 늘어났다.

    결혼반지를 낀 자신처럼 무진도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시현의 마음을 휑하게 만들었다.

    그와의 관계를 단칼에 자르고 끝내야 하는데도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몇 주째 자신 앞에 보이지 않는 정 비서가 백혜련을 찾아냈다는 것도 몹시 거슬렸다.

    시현은 자신이 아는 백혜련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어 찜찜한 채로 신경만 예민해졌다.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궁지로 몰아가는 사람이 그와 밀접한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현은 그가 회사를 인수해서 사장으로 온 날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은 잠시 접어 두었다.

    머리카락을 틀어서 올리고 일하는 자세로 있었다.

    결혼반지를 끼고 있어도 팔찌,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를 안 하고, 시계만 착용했다.

    입사한 지 한 달이 넘은 신입 비서로 출근하면 진한 커피를 마시고 컴퓨터를 켰다.

    외부 미팅이 많아서 무진과 박 실장이 사무실을 비워서 자료 정리만 몇 시간째 하고 있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정 비서가 보이지 않기에 불안감은 증폭되었지만 일하고 사는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진을 생각하면 정신이 팔린 느낌이었다.

    고개를 살짝 내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무 꼬였어.”

    그는 미국에서 처음 볼 때부터 아우라가 남달랐다. 누군가를 유혹할 생각이 없어도 페로몬이 뿜어져 나오는 마성의 남자로 보였으니까.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떼어 놓을 때조차 눈에 띄는 외모로 무심코 쳐다보게 되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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