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호텔에서처럼 그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다른 걸 기대하는 건가.
시현은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얼마 전에는 술 취한 여자는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자신을 갈망하는 눈빛에 흠칫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에게 끌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같이 사는 것도 생각해 봐.”
“뭐라고요?”
“네가 할머니의 돈을 받고 날 버렸어도 우리 사이는 견고하다는 걸 보여 주면 좋잖아.”
그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하자 장난 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이혼하지 않고 돈 받고 숨었으니 무언가 남겨 둔 것 같은 기분도 퍽 달갑지 않았다.
왕 할머니한테 돈도 필요 없다고 했지만, 동생을 위협하는데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이젠 무진마저 동생의 안위를 가지고 겁박하고 있었다.
결혼이 즉흥적이었다면 이혼은 완벽히 계산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시현은 돈을 받은 것도 괜찮다며 계약을 운운하는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도망가지 않고 그의 할머니가 괴롭히면서 돈 봉투를 주었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난 우리의 결혼 생활이 계약만큼 중요해. 특히 할머니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걸 방관하고 싶지 않아.”
그의 애인이 되는 계약에서는 호흡이 잘 맞았다.
결혼해서도 상처 주거나 다툼도 없이 잘 지내 왔다.
그러나 왕 할머니의 비서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대놓고 돈 봉투만 주었다면 무진에게 하소연이라도 했을 텐데.
상황이 너무 나빴다.
왕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돈을 받고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계약이 유효하니까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넌 내 손주의 장난감에 불과해.’
악독한 말은 아무리 다른 것으로 덮으려고 해도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같이 사는 게 계약을 끝내는데 좋은 건지.”
“긍정적인 답을 바랄게.”
원래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 채 지루하고 반복적인 대화는 시현이 그의 집을 나서면서 끝났다.
***
소연은 백야 그룹 대주주라는 강무진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남자만 잡으면 10억 원이라는 돈이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릿하게 웃었다.
“부자들은 별짓을 다 해.”
그저께 정 비서라는 사람을 만나서 한 달 안에 강무진이라는 남자한테 접근해서 바람을 피우게 하라는 괴상한 제안을 받았다.
저번에 왕 할머니를 만났을 때와 사뭇 다른 제안에 고개가 갸웃거렸다.
어차피 접근 자체가 잘되지 않아서 곤란하던 차였기에 방송보다 이번에야말로 한 몫 제대로 잡을 건수로 돈을 선택했다.
정 비서의 말로는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어느새 빠져나간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남자라고 했다.
결혼한 상대가 있으니까 완벽하게 흔들고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손주를 불륜남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할머니라니, 조금 소름이 끼치네.”
착수금으로 1억 원을 받은 소연은 실패하더라도 1억 원은 반환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제안받은 것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지만, 왕 할머니 측이 급한지 강무진에 관한 정보를 술술 불어넣어 주었다.
정해진 상대와 결혼하지 않아서 강무진의 할머니라는 사람이 몹시 화가 났다는 정보에 그간 접근 자체를 못 할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면서 비싼 곳에서 사네.”
원하지 않는 손주며느리 때문에 별짓을 다 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큰돈이 들어오는 게 흡족해서 빨리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강무진의 주변을 맴돌면서 파고들 만한 상대가 아닌 것을 알아챘다.
일만 하는 남자한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흥이라도 즐기면 어떻게 할 만한데, 그동안 살펴본 결과 버거운 상대라는 거였다.
소연은 무명 기간이 길어지자 몇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받아서 불륜을 조장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로 방황하고 허송세월하는 남자를 유혹해서 돈을 갈취하거나 이혼에 유리하게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한 일이지만 꽤 쏠쏠하게 들어오는 돈 때문에 끊지 못했다.
정 비서가 준 정보가 너무 미약해서 스스로 알아보고 있었다.
“이거 양쪽에서 돈을 받아도 될 거 같은데.”
강무진의 사진을 다시 쳐다보며 소연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소연은 아무 데서나 능력을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외모로 안 넘어온 남자가 없어서 자신만만했다.
“지금껏 만난 남자 중의 최고네. 생긴 것부터 마음에 드는 건 두 번째인가.”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웃었다.
소연은 누가 봐도 예쁘다고 말할 정도로 눈에 띄었고 오뚝한 코에 눈이 크고 늘씬했다.
강무진에게 접근하기 편해지라고 자동차까지 받은 소연은 백미러로 살짝 자기 얼굴을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에 매력적인 남자라니.
강무진하고 결혼한 여자의 사진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꽤 예쁜데 어디서 봤을까.”
소연은 철저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정 비서가 준 최소한의 자료에서 틈을 찾고 있었다.
이시현이라…… 모르는 이름인데.
묘하게 누군가를 닮은 듯한데, 계속 보니까 자신과도 비슷한 생김새였다.
“푸핫. 이 남자 아내가 날 닮아서 찾아온 건가 보네.”
사진을 자세히 볼 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처음 제안할 땐 여자에 관한 것이 없었기에 잘만 건드리면 거액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소연은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본 듯 방긋 웃었다.
똑똑-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깜짝이야. 오면 전화부터 하라니까.”
“이 차는 어디서 났어?”
“저번에 받은 일이 있는데 그쪽에서 잘 부탁한다고 받은 거야. 나중에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 것이고.”
“지금은 몸을 사릴 때잖아. 바로 일하기에는 위험해.”
“몰라. 타기나 해.”
한 팀으로 일하는 기태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강무진을 상대하려면 그의 아내까지 방어해야 하기에 적당한 상대로 기태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큰 건이라도 저번 일이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았어.”
차에 타면서 김기태가 경고하듯 말했다.
“괜찮아. 단위가 억이야. 억. 그런데 안 할 수 있겠어? 이번에 한 방으로 끝내고 우리도 이딴 일 쉴 때가 되었어.”
위험한 눈빛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소연은 웃기만 했다.
***
박 실장이 외부 일을 하느라 시현은 며칠을 몇 년처럼 일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강무진의 일과에 투입되어 입 안에 혓바늘이 돋을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바빠서 같이 사는 것에 답을 주지 않아도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동안 애인인 척하면서 식사를 몇 번 같이 할 뿐이었다.
분식집까지 쫓아와서 간담 서늘하게 하더니, 왕 할머니 쪽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리고 그는 바빠서 계약이니, 이혼이니 하는 말을 할 시간이 없어 보였다.
일하면서 주말만큼은 바빠도 그녀를 불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만에 그것마저 깨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시현은 가방을 쥔 손이 긴장으로 땀이 날 지경이었다.
또 계약으로 불러낸 무진을 생각하니 초조하고 누군가 지켜본다는 생각에 불안한 기분이 깃들었다.
들숨 날숨을 쉬며 이 계약이 언제 끝날지 생각하며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무진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타이를 하지 않아 조금 느슨하게 보이는 무진을 보자 시현은 긴장감이 더 커졌다.
오늘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감시자에게 보여 줘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를 사 줄 테니까 타고 다녀.”
대뜸 차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작정하고 부려 먹을 생각인가.
“됐어요.”
“유지비 때문이면 그것도 내가 처리할게.”
“괜찮아요.”
지난번에는 혼자 차에 타라고 하더니, 밖에서는 누가 볼까 싶은지 차 문을 열어 주고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시현은 그의 차에 타고 클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텔 라운지에 갔다.
특별한 게 없고 가볍게 마실 만한 술을 파는 곳이었다.
호텔 최상층에 자리한 라운지는 밤이 되면 시티 뷰가 멋들어지는 걸 감상할 수 있었다.
창가로 안내받고 시현은 칵테일을 주문하고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시현은 영롱한 푸른빛을 내는 칵테일부터 노란색 망고가 들어간 피나 콜라다 칵테일을 마셨다.
이런 데 와서 말도 없이 칵테일만 마시는 게 의아했다.
“호텔에 투자할 거예요?”
“그러길 바라?”
“그건 무진 씨의 권한이잖아요. 난 일개 신입 비서일 뿐인걸요.”
“우린 혼전 계약서도 없으니 내가 죽으면 자산은 거의 이시현 몫이 될 텐데 관심이 없어?”
비아냥거리는 입을 막고 싶었다.
편하게 위어야 하는 주말에 상사한테 불려 나온다면 어떤 직원이든 사표를 내던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혼자 집에서 땅굴을 파듯 축 늘어진 것보다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맛보는 게 나았다.
속으로는 백만 번이라도 욕하며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달짝지근한 칵테일은 빛깔과 맛이 좋아서 목 넘김이 편해 잔이 비면 자꾸 주문했다.
그와의 의미 없는 데이트가 왕 할머니를 포기하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애꿎은 칵테일 잔만 비웠다.
알딸딸해진 시현은 무진을 보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할 말 있어?”
“이런 거 몇 번 하면 계약이 끝나요?”
“왜 끝나길 바라지? 평생 놀고먹고 살 만큼 버는 게 좋잖아.”
“그 말 그대로 할머님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게 피차 편하지 않겠어요? 난 돈 벌고, 무진 씨는 더 큰돈을 벌고요.”
시현은 취기가 오른 게 아닌데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진이 여자를 하찮게 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뿐인가? 애인 역할로 데이트 한 번 하는데 천만 원을 주는 남자였다.
“사랑한다는 말은 안 믿어?”
그런데 왕 할머니한테 돈을 받고 숨은 이후 그는 사랑 타령을 하고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무진의 말을 듣고 있으면 흔들렸다.
즉흥적인 결혼에서 두 사람은 좋은 감정이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현은 그가 이상해 보였다.
어차피 그의 아내라서 의무든 권리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 마요. 어울리지 않아요.”
“내 입도 틀어막으려고?”
“미친 거예요?”
“미친 게 맞을지도. 날 미치게 하는 게 이시현이니까.”
계속되는 말장난에 지쳐서 애인이냐, 아내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