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현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격하게 반응한 게 후회되었다.
혹여 그가 눈치를 챌까 봐 걱정되었다.
무슨 일이든 빨리 헤쳐 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 이름을 왜 보게 되었는지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집안일은 전혀 안 하면서 이건 어떻게 만들었어요?”
빠르게 화제를 바꾸었다.
시현은 흐트러진 서류를 봤는데도 타박하지 않는 걸 보면 무진이 뭔가 아는 것 같았다.
보안을 엄청나게 중시하는 무진의 성격에서 볼 수 없는 느긋함에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과일청에 탄산수를 섞으면 된다고 하더군.”
“시키지도 않는데 만들었다고요?”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술이나 마셨지, 내가 너한테 뭘 해 주지 않았더라고. 이제라도 하나씩 하려고 해.”
“계약이 끝나면 이혼할 건데요. 왜요?”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좀 들어.”
이 남자가 정말 미쳤나.
왜 사람 속을 이런 식으로 뒤집을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 사랑 타령을 하고 있으니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돈 받고 숨어 버린 자신을 벌하려고 갖은 술수를 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 비서가 찾고 있다는 사람을 덩달아 찾는 게 말이 돼?
하나 같이 자신을 궁지에 몰려는 짓이니까 그게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시현은 그가 만든 에이드를 잔을 들고 머릿속은 이리저리 끝이 어디로 향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왕 할머니보다 그가 먼저 어머니를 찾아내는 게 나을까.
백혜련이 누구인지 말하면 무진이 무슨 일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질문이 생각나도 시현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백혜련이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지긋지긋하고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시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가 건넨 차가운 오렌지에이드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시현이 자꾸 서류를 힐끔거리는 걸 알아챘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뭔지 모르지만 정 비서가 수십 명을 풀어서 백혜련이라는 사람을 찾아냈어. 할머니가 뭔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해서 나도 뒤를 쫓는 거고.”
“그렇군요.”
“그런데 새침한 그 표정은 날 도발할 때 짓던 거 같은데.”
“무슨 헛소리예요.”
시현은 무진의 말에 흠칫 놀라 눈으로 흘기며 유리잔에 남은 얼음을 입에 넣었다.
그의 가족사를 모르는 것처럼 그도 자신의 가족에 관해서 아는 게 없었다.
공통점이라고는 아버지를 여의고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 자신은 남동생뿐이라는 것뿐이었다.
다른 점은 그는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이고, 왕 할머니의 말대로 그녀는 돈 없는 거지라는 것.
그들의 기준으로 들어야 했던 말은 돈을 받고 무진을 버려야 할 만큼 모욕적이었다.
얼음을 씹던 시현은 무진이 일부러 자신이 볼 수 있게 올려둔 것 같았다.
서류 한 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강무진이었고, 결혼해서 그런 것에 예민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만 갈게요.”
“가지 마.”
“11시가 넘어가요. 자정이 지나서까지 우리를 지켜볼 사람은 없을 거 같은데요.”
“있다면 안 갈 건가?”
또 말장난하는 무진을 눈으로 흘기고는 일어섰다.
그가 같이 일어서 시현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예요?”
“난 네가 할머니한테도 굴복하지 않아서 좋아.”
“잊은 모양인데 나 할머님한테 돈을 받았어요. 얼마인 줄 알아요?”
“신경 쓰지 마. 할머니한테는 껌값일 테니까.”
그 껌값에 내가 미친다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은 걸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무진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손을 뿌리치자 이번에는 몸을 숙여 뺨에 입술을 댔다.
손은 거침없이 시현의 몸을 스쳤다.
“뭐 하는 거예요?”
“친밀함. 우리가 아직 부부라는 것. 그리고 애인이라면 하는 짓.”
“이런 건 계약에…….”
시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계약을 입에 담는 순간, 계약 중 몇 개의 조항이 떠올랐다. 필요에 따른 스킨십은 강무진이 주도한다.
그를 확 밀치고 나가고 싶은데, 백혜련이라는 이름 때문에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뒤죽박죽 섞이고 그는 사랑 타령에 이젠 부부라는 말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부부의 의무도 저버리지 않으면 계약이 빨리 끝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돈 받고 날 버릴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깟 푼돈에 강무진을 버린 여자는 너뿐이야.”
“이런 건 처음이야. 그래서 반했어. 이런 말이라도 하게요?”
하하. 그가 시현을 끌어안은 채 껄껄거리며 웃었다.
“날 웃게 하는 여자도 네가 처음이야.”
시현은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무진 씨는 못됐어요.”
“알아.”
“협박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 모순이에요. 나쁜 거라고요.”
“안다니까.”
그는 시현의 약점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무엇이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동생과 미국에서 공부하며 버티고 살아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걸 알았다.
그걸 이용당하는 느낌이 시현을 미치게 했다.
“떨어져요.”
“안 갈 거지?”
부부한테는 사랑보다 중요한 게 믿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은 상대를 잘 믿지 않았다.
시현은 같이 일하는 것도, 그가 장난처럼 말하는 사랑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기분이었다.
“무진 씨, 정말 왜 이래요?”
“내가 왜 이러겠어.”
“모르니까 묻는 거잖아요. 애인인 척도 하고 있고 우리가 함께하는 것처럼 할머니한테 알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정 떼려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물어보려다가 그가 더 세게 끌어안자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할머니가 노망난 게 아닌가 싶어. 버젓이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만나라는 헛소리를 하고 줄줄이 약속을 잡으려는 게 이상하잖아.”
“나보다 좋은 여자 있으면 만나요.”
“난 널 사랑한다니까.”
우리는 다시 함께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몰라요?
왕 할머니가 어떻게 괴롭힐지 몰라서 그래요?
묻지 않았다.
그에게 폭 안겨서 시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는데 저절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시현의 약해진 곳을 파고들었다.
입술이 닿았다.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시현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입 안으로 숨결이 훅 들어오자 시현은 움직일 수 없었다.
헤집은 그의 입술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껏 도망쳤다가 붙잡혔으니 그를 탓할 수 없고, 돈 받고 그와 헤어지길 바랐으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왕 할머니의 뜻대로 하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새로운 회사를 인수한 것까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를 그가 찾아보고 있었다.
왕 할머니의 비서가 찾아냈다고 하니,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겁이 났다.
그가 조금 돈이 많은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시현은 왕 할머니가 무참히 자신의 마음을 짓밟은 걸 단순하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 버린 것과 같았으며 가슴에 남은 사랑조차 뭉개 버리는 위협이 멈추기만을 바랐다.
“두 달 사이에 변한 건가? 키스하는데 딴생각이라니.”
“무진 씨의 매력이 반감되었나 봐요.”
“거짓말까지 한다니 놀라워.”
거짓말이라는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시현의 표정이 무진의 기분을 고조시켰다.
“내 앞에서는 거짓말하지 마.”
“이려고 집에 들어오라고 한 거예요? 술도 권하지 않고?”
“그건 아닌데, 예전의 감각을 되살리기에 적당한 날인 거 같아.”
시현은 단단히 꼬여 가는 상황인데도 싫다는 말보다는 키스로 불러오는 감각에 아찔했다.
두 달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버둥을 치며 벗어날 궁리만 했는데 도망도 못 치고, 취업한 곳은 그의 회사였다.
계약이 끝난 후에 이혼할 생각이 있긴 할까.
시현은 백혜련이라는 이름과 무진의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가 적당한 날이에요?”
그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같이 있으니까 좋은 날이라고.”
“그건 별로 좋은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잘 맞았잖아. 할머니가 보낸 사람도 물리치고 결혼 생활도 만족했고.”
그랬다. 그가 제안한 계약을 받아들이고 안 좋은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즉흥적이었지만 결혼 생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숨어 있던 호텔에서는 무작정 달려들더니 이제는 살살 달래가며 휘어잡으려는 무진이 미워지려고 했다.
시현은 그가 주는 희열을 잠시 떠올렸다가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할머니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한, 감정이 남아 있어도 관계 개선이나 변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에게 끌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분명히 다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갇힐 것 같았다.
진한 키스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데.
무진의 따듯한 손에 서로 잘 맞았던 날이 생각났다.
벗어나지 못할 걸 후회하면 어쩌지?
맞고 안 맞고의 문제보다 더는 어울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잘 맞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마음은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데, 머릿속은 깨진 부부이기에 더는 엮이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현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너도 못 벗어나.”
“…….”
“우리한테 직면한 건 결혼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계약이 유효하다는 거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할머님이 포기하기 전까지는 부부이고 애인이고 전부 다 해야 한다는 거예요?”
“맞아.”
무슨 억지스러운 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할까.
시현은 무진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자는 의미일까.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상황을 만들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