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74)

15.

정 비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가족관계가 단순해서 지금껏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뭐가 있다는 거니? 고아라고 하지 않았니?”

“아버지가 안 계신 건 확인했습니다. 남동생도 저번에 보고드린 대로 현재 군에 있습니다.”

“뭐가 약점이 된다는 게냐? 군에 있는 그 애를 잡아 보겠다는 건가?”

왕순자는 탐탁지 않은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 비서는 지난번에 어설프게 시현을 건드렸던 어머니 쪽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보는 없고 시현의 아버지가 미혼부였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이시현의 어머니 쪽을 캐다가 말았습니다.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이시현을 물러나게 했는데, 확실한 것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다 알아본 게 아니었나?”

“정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미국에 갈 당시 이시현의 아버지는 미혼부로 남매만 데리고 갔습니다.”

왕순자가 책상 위에 있는 사진 한 장을 들었다.

시현이 흰색 원피스를 입고 해맑게 웃는 사진을 빤히 보면서 고개를 까닥거렸다.

예쁘장한 게 남자를 홀릴 만한지만, 그게 자신의 손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잘난 남자한테 여자가 꼬이는 건 자연의 섭리라고 해도 손자만큼은 예외가 되어야 했다.

장차 백야 그룹을 세계화하는데 손자의 능력은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

강씨 집안과 백야 그룹의 번창에는 결혼도 아주 중요한 쓰임새였다. 다른 손자들은 왕순자의 눈에 차지 않았다.

완벽한 무진이 허접한 여자를 만나서 제 가치를 떨어뜨리니까 할머니로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진의 결혼에 밤잠까지 설쳤던 걸 생각하면 그 애를 밀항선을 태워서라도 멀리 쫓아내야 했다.

그래도 모양새 좋게 하려고 시현에게 돈까지 줘가며 숨게 했는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현의 사진을 톡톡 건드리며 왕순자가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그 애 엄마가 누구인지는 찾을 수 있겠나?”

“이시현의 아버지하고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조사할 겁니다. 20년이 넘은 일이지만 흔적이 없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 애한테 약점이 그거면 찾아야겠지. 그거 외에 다른 방법도 있는 거겠지?”

“여러 방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만큼은 이시현을 강 사장한테서 떼어 놓겠습니다.”

왕순자는 정 비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이한테 줄 서는 집안이 한둘이 아니야. 지금껏 미뤄 둔 만남이 성사되게 해야 할 거네.”

왕순자는 무진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백야 그룹과 자신의 재산까지 전부 녀석의 것인데, 어릴 때도 하지 않은 반항을 하고 있었다.

백야 그룹에서도 일하면서 투자 회사는 왜 인수했을까.

의문이 들면서도 속을 모르니 나서는 게 조심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녀석이 인수한 회사는 어떤가.”

“기존 투자자가 발을 빼면서 문제가 있었지만, 강 사장이 나선 지금은 1년 안에 이익을 낼 거라는 게 전반적인 입장입니다.”

“그 회사로 뭘 하려는 건지 알아봐.”

“네.”

정 비서는 다음 일정을 보고했다.

“내일 강 회장하고 만찬이 있습니다. 중식당으로 정했습니다.”

“알았네. 이따가 송 박사가 오면 알려 주게.”

“네. 나가 보겠습니다.”

왕순자는 시현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봐 줄 게 아무것도 없는 하찮은 여자애였다. 아버지 없이 남동생하고 대학에 다니며 열심히 산 것은 칭찬해 줄 만하지만, 무진의 짝은 아니었다.

“돈이나 줄 때 받을 것이지.”

분명히 시현에게 돈을 주고 미국에서 출국시킨 뒤 호텔에 숨겨 두었다.

무진이 출장 중이었기에 아주 쉬운 일이었는데, 한 달 만에 찾아냈다니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제대로 떼어 놓고 백야 그룹을 무진에게 완벽히 넘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왕순자는 시현의 사진을 와락 구겨 넣었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 박 실장도 바쁘게 일하지만, 시현이 밀착하는 비서 같았다.

시현은 박 실장이 며칠째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던 걸 그의 통화로 알게 되었다.

역시 일에 미친 상사답게 투자 회사와 백야 그룹을 오고 가며 한 시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덕분에 어제, 오늘은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강무진을 이혼할 남편이 아니라 상사로 보면 지금 상황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

회사 일로 바빠서 아직 애인인 척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닥친 상황은 어떻게 변화할지 아무도 몰랐다.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상사로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왕 할머님한테 받은 돈도 돌려줘야 하고, 결혼도 정리해야 하고 시현은 자신이 꼬아 놓은 실타래를 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준비됐어?”

시현은 무진의 자동차 앞에 서서 눈을 깜박였다.

“멍해진 얼굴로는 누가 봐도 우리가 친밀하다고 생각 안 해.”

“미안해요.”

“차에 타기나 해.”

조수석 문을 가리키며 그는 운전석으로 갔다. 예전에는 문도 열어 주며 에스코트하더니 이제는 보는 사람이 없다고 부리는 사람으로 대했다.

그에게 아내나 애인 대우를 바라는 게 아니어서 별말 없이 차에 탔다.

운전기사 없이 무진이 직접 운전해서 드라이브하듯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식사했다.

평범한 데이트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 데나 내려 줘요.”

“애인뿐만 아니라 아내라는 것은 인식이 안 되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그것까지 쫓아와서 볼까요?”

“넌 할머니가 얼마나 집요한지 몰라. 확실한 것도 몇 번을 더 해야 믿을까 말까 하거든.”

시현은 무진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시현은 미국에 있을 때만 해도 그가 한국에 머무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그의 집에 갔던 걸 생각하면 아예 귀국한 게 맞는 듯했다.

누군가가 쫓는 게 맞는다면 기왕 하는 거 빨리 정리되게 적극적인 게 나았다.

문 앞에 서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의 집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내일 회사에서 뵙는 게 낫지 않겠어요?”

“널 혼자 보내면 우리가 잘못된 거라고 볼 텐데 괜찮겠어?”

“이 시간에 누가 우리를 보겠어요.”

“안 들어올 거면 같이 사는 건 어때?”

이혼할 부부가 같이 산다고?

불편하게 자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시현은 그가 다시 손짓하자 마지못해 무진의 집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어도 마른침을 삼키듯 꿀꺽 입 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삼켰다.

시현은 따로 시킬 일이 있어서 들어오라는 줄 알고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볼 수 없는데 집 안에서까지 애인 또는 아내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주방에서 뭘 챙기는지, 시간이 지나도 무진이 나오지 않자 소파로 가서 앉았다.

늘 깔끔한 무진이었기에 테이블에 흐트러진 서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흠칫했다.

뭐야? 왜 저 사람이…….

잊히지 않는 이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시현은 자신을 배 속에 열 달을 품고 낳아 준 어머니의 이름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백혜련.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이 수천, 수백 있겠지만 그래도 백혜련이라는 이름이 왜! 무진이 보는 서류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저 이름을 안다는 것부터 소름이 끼쳤다.

혹시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무슨 눈치를 챈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백혜련을 자신과 엮어서 생각한다는 게 이상한 거였다.

시현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서류에 적힌 이름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그에게 확인할 필요를 느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어떻게 될 걸까.

백혜련이라는 이름과 조사 내용으로 보이는 저 서류는 뭘까.

시현도 백혜련에 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아주 잘 산다는 것. 아버지를 버리고 돈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해서 호화롭게 산다는 것뿐이었다.

시현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때마침 그가 주방에서 마실 것을 가지고 나왔다.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에이드를 보니까 방금 본 백혜련의 이름하고 연관되어 보였다.

시현이 시선을 올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진과 시현의 눈이 마주쳤다.

시현은 서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뭐예요?”

침착하게 말하지 못하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빨리 대답하라는 듯 다급했다.

“뭐가?”

“이 서류는 뭐냐고요.”

손가락으로 가리킨 서류를 힐끔거리더니 그가 별일 아닌 듯 어깨만 으쓱했다.

“회사 일인 거예요?”

이름을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던 시현은 돌려서 물었다.

“뭘 보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이 서류를 말하는 거면 회사 일은 아니야.”

“그럼요?”

“뭐가 궁금한지 모르겠는데 정 비서가 누굴 찾는 모양이더라고. 그게 나와 관련된 것 같아서 알아보는 중이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설명하는 무진의 말에서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현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얼굴과 이름, 뭘 하고 사는지 그 정도만 아는데 누가 누굴 찾는다고?

어머니에 관해서 협박할 때 다시는 거론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진의 곁을 떠난 거였는데.

이게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시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시현은 정 비서가 하는 일을 무진도 똑같이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겁할 뻔했다.

“그런 거예요?”

“왜?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시현은 저도 모르게 격하게 부정하듯 대답하고는 흠칫했다.

이건 장난이 분명했다. 왜 왕 할머니의 비서가 백혜련 그 여자를 조사하고 있는지.

심장이 벌렁거리고 속이 뒤집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정 비서가 조사하는 걸 왜 무진까지 나서서 알아보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는 체할 수 없었다.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질러.”

“남의 뒷조사나 하면서……. 제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뭔 상관이에요.”

“그런가. 시원하게 마셔. 지금 얼굴이 붉어져 있어.”

무진의 말에 뺨에 손을 대니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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