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74)
  • 14.

    출근해서는 박 실장을 통해 할 일에 대해서 알려 줄 뿐, 그의 무심한 눈빛에 생각이 많아졌다.

    시현은 발끝이 저리고 심장은 터질 듯 불규칙하게 뛰어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일하다가 숨 막혀 죽고 말지.’

    문 하나를 두고 무진하고 일하는 게 퍽 달갑지 않았다.

    계약을 끝낼 수도 없고 취업한 회사를 나가지도 못하니까 업무로 마주할 때는 말투만 딱딱해졌다.

    박 실장이 중간에 껴 있어도 사적인 것은 관여하지 않으니까.

    긴장감이 높아져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사하게 웃으려고 애써 보는데, 잘되지 않았다.

    한국에는 도망친 마누라를 잡으러 온 걸까.

    거대한 투자 회사까지 사들여서 함께 일하게 된 걸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왕 할머니 때문에 무진하고 관계를 청산하고 싶을 뿐, 악감정이 남은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각 부서장한테 내일 회의 때 데이터 정리된 자료 빼먹지 말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점심 먹고 자료 정리해 놓고.”

    “네.”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도 도가 튼 사람 같았다.

    갑자기 문을 열고 할 말만 빠르게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 정도 보조를 맞추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공적인 관계가 버겁기 시작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출근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박 실장이 외부 일로 잠깐 자리라도 비우면 일이 더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말만 쉬운 거지, 실수 없이 일하는 게 신입 비서한테는 몹시 어려웠다. 그렇다고 지시 사항에 토를 달며 힘들다고 할 수 없었다.

    매듭지어진 게 없는데, 한마디로 까라고 하면 까야 하듯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다.

    출근해서 며칠만 업무 파악하라고 일을 덜 준 것 같았다.

    투자 회사를 인수한 건 그가 시현을 만나기 전의 일이라고 해도 굳이 자신을 비서로 앉혀 둬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다시 도망치면…….’

    일하다 말고 고개를 떨구었다.

    세현하고 같이 도망갈 형편이 아니어서 무진의 말이 무섭게 콕 박혔다.

    그를 돕지 않은 상태에서 도망쳤다가 잡히면 계약대로 안 했다며 끝까지 숨을 조일지도 모른다.

    시현은 정말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계약대로 하라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후회해 봤자 의미 없는 걸 며칠째 붙잡고 있었다.

    강요와 부탁.

    그 어디쯤인 무진의 못된 성격에 코가 꿰인 것일까.

    시현은 그에게 잡히자마자 일까지 함께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왕 할머니보다 무진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업무 파악 정도만 하고 보조 역할로 자리만 지킬 줄 알았던 일은 박 실장이 없으니 끝이 없어 보였다.

    시현은 눈앞에 밀린 서류를 빠르게 정리했다.

    그나마 무진하고의 결혼 생활 중에 배운 게 있어서 일 처리는 느리지 않았다.

    ‘설마, 그때부터 부려 먹으려고 일을 가르친 건가.’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혼만큼은 시현이 시작한 거라서 무진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가득 쌓인 서류였다. 파일로 정리해서 전송한 것 외에 서류 관리까지 엄청났다.

    시현은 주식 동향,  인사이동에 필요한 자료를 한 아름 안고 무진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리한 자료입니다.”

    그의 지시로 정리한 걸 책상에 올려 두었다.

    “내일 회의 전에 출근해.”

    “업무 시간 전인데요?”

    시현이 싫은 티를 냈다고 생각했는지 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추가 근무에 따른 임금은 책정되니까 걱정하지 마.”

    “사장님.”

    능력, 외모, 재력이 전부 갖추어졌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일벌레처럼 일하는 데다가 성질은 아주 못된 놈이었다.

    시현이 부르는데도 고개조차 들지 않고 손가락만 까닥거렸다.

    “추가 근무는…….”

    “한다고 했잖아. 입사 지원서에 탄력적인 근무 시간도 괜찮다고 한 거로 아는데.”

    “그렇지만.”

    “박 실장이 바빠서 그래. 추가 근무 수당 외의 것도 챙겨 줄게. 됐나?”

    “알, 알겠습니다.”

    시현은 사무실 밖으로 나와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책상으로 가면서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람이 전부 자기처럼 일하는 줄 아나 봐.

    일이 늘어난 만큼 잡생각은 줄어든 시현은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신입 비서가 하기에 버거워도 애쓰고 있었다.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이 비서는 정시에 퇴근해.

    -알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퇴근하기 10분 전이었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해서 배려해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있는 사무실을 빤히 쳐다보았다.

    *** 

    시현은 정시에 퇴근해서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떡볶이에 김밥 한 줄을 먹는데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집 근처여서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분식집 밝은 조명 아래 정 비서의 모습을 보았다.

    시현은 출근 이후 왕 할머니의 말을 전하러 끈질기게 오던 정 비서를 보지 못했다. 포기를 한 것이든 다른 술수를 쓰는 것이든 우선 안 보이니까 작게나마 숨통이 트였다.

    일만 하고 무진과 관계를 정리하면 꼬인 인생 풀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자신을 감시하는 걸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정 비서가 보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분식집 밖을 돌아볼 때는 아무도 없었다.

    시현은 남은 김밥 반 줄을 포장하고 분식집을 나왔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서 밥을 먹다가 체할 거 같았다.

    서둘러 분식집을 나와서도 주변을 빙빙 돌았다. 정 비서가 아닌 다른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게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주변을 두세 바퀴 돌고 나서 겨우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시현은 긴장한 탓에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앉았다. 양팔로 몸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 미치겠다.”

    그의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여러 가지로 생각했지만, 방향을 바꾼 것 같아서 불안했다.

    밖에서는 밥도 먹기 어렵다니,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무진의 아내, 애인 역할을 제대로 하고 나서 완벽하게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전남편이 될 상사.

    어감이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계약을 끝내고 이혼을 앞둔 부부가 한 사무실에서 일하면 능률은 어떤가.

    왕 할머니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에게 벗어나야 하는 거지 같은 현실이 두려웠다.

    함께 일하는 것이 잠시뿐이라고 애써 생각하며 버틸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기는 할까.”

    결혼해서 무진하고의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막장 같은 상황에서도 참고 견딜 뿐이었다.

    “돈만 많은 놈인 줄 알았는데. 백야 그룹이라니…… 회장의 조카이자 차기 총수로 거론되는 강무진. 후유…….”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애인인 척하는 일로 돈만 받았으면 동생 세현이도 그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필요해서 한 일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사랑에는 계산적이지 않았고 결혼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그를 사랑했다.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잡혀도 왜 하필 이때 잡혀서.

    한국에서 정착하려고 고르고 고른 회사인데, 상사인 그의 얼굴을 안 보고 일할 수 없었다.

    “대놓고 애인인 척하면 될까.”

    무언가 시작하면 누구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밀어붙이는 그에게 솔직히 반격할 강단도 없었다.

    시현은 무진의 할머니가 몰고 올 거친 폭풍이 겁이 났다. 그리고 식당에서 본 잊힌 어머니가 무진을 아는 듯해서 몹시 신경 쓰였다.

    *** 

    평창동 왕순자의 저택.

    넓은 창을 통해 채광이 쫙 들어오는 거실에서 보이는 정원은 탁 트여서 시원해 보였다.

    고급스러움을 더한 저택은 창이 커서 상쾌한 분위기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힐끔거리며 왕순자는 서재로 걸음 했다.

    커다란 책상에 반듯하게 올려진 서류를 쭉 훑고는 앞에 서 있는 정 비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정 비서가 왕순자의 매서운 눈빛에 몸을 한껏 낮췄다.

    “아직 내 손자 옆에 있던데, 그 아이가 버거운 건가?”

    “죄송합니다.”

    “돈으로도 안 되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나서야 하는 게야?”

    왕순자는 무진이 인수한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 관해서도 뒤늦게 알았다. 무진이 평소처럼 백야 그룹의 일을 잘하고 있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기 사업도 병행하겠다는 엉뚱한 말로 시간을 번 것 같았다.

    결혼만 할미 말을 들으면 천하를 가질 수 있다는 데도 무진이 하찮은 아이 하나를 떼어 놓지 않았다.

    보고만 있어서 천불이 나고, 이제껏 뜻대로 안 되는 게 화가 치밀었다.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 게냐?”

    왕순자의 무표정과 높낮이 없는 말에 정 비서는 잔뜩 긴장한 채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애가 싫은데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지 말 좀 해 보게.”

    “제 불찰입니다.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강 사장이 백야 그룹 회장으로 오르기 전까지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정 비서의 단호함이네.”

    깍지를 끼고 쳐다보는 왕순자의 서늘한 눈빛에 정 비서는 움찔거렸다. 숨도 쉬지 않고 상황을 전환할 말을 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정 비서가 빠릿빠릿하고 능력이 좋아서 오래 곁에 두는 거네. 실수는 한두 번으로 끝내야 해.”

    “심려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애가 보통이 아니겠지. 그러니까 무진이 녀석이 홀딱 넘어간 게 아니겠나.”

    왕순자는 보잘것없는 애를 만난다고 해서 잠시 지켜만 보았다.

    몇 번 만나다가 끝낼 줄 알았던 애와 결혼까지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까맣게 몰랐다.

    백야 그룹을 온전히 손자한테 주려고 했는데, 기가 막힌 상황을 맞닥뜨렸다.

    앙큼한 애를 치워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집안과 결혼하면 되는 걸, 손자가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약점이라면 뭘 찾겠다는 건가?”

    왕순자의 말은 온화한 듯 들리지만, 높낮이가 없어서 듣는 사람이 긴장하며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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