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74)

13.

TS 투자 자산 운용사까지 사들여서 뭘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의 회사에 왜 입사해서 일을 더 꼬아댄 것인지.

시현은 자신을 탓하며 술잔에 시선을 던졌다.

자신을 따라와 올가미를 씌운 것도 아닐 텐데,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한참 말이 없자 그가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돈은 많을수록 좋잖아.”

“할머니가 원하는 결혼이 싫으면 날 방패로 삼지 말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요.”

“정상적인 거? 그건 네가 도망가지 않았을 때 가능했던 거지.”

도망을 왜 간 건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늘 혼자 고민하고 결정해 왔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실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무진처럼 집요하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다.

시현은 강무진의 의도를 몰라서 계약을 연장하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무진하고 관련된 일에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취업부터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자신에게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결혼한 상태로 연애하는 척이라니, 할머님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할머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다른 방법은 없어요?”

“우리 사이가 굳건하면 돼.”

그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취하고 싶지 않았지만, 술이 필요한 밤이었다.

동생까지 계속 물고 늘어진다면 방법이 없긴 했다. 마음 같아서는 왜 이러느냐며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진의 할머니한테 얼마나 많은 모멸감을 느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먹구름이 낀 듯 우울함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었다.

그는 시현의 마음을 모르는지 비스듬히 기댄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한 줌 쥐고 만지작거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남은 술을 마셨다. 알싸한 향이 입 안에 가득 차올랐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 하고픈 말이 많은데 돈 때문에 그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것 같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와 시선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시현의 술잔에 잔을 부딪쳤다.

“뭘 고민하는지 아는데, 내가 끝낼 때 끝나는 거라는 걸 아직도 잊은 모양이야.”

즉흥적인 결혼을 깨려면 그가 말한 대로 계약을 이행해야 했다. 무슨 말장난인지 몰라도 계약을 끝낸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미국에서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이행하지 않으면 위약금은 그가 제시한 5억 원보다 세 배나 많았다.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면 돈을 받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그대로 다녀도 되는 거죠? 내 능력껏 취업한 거 맞죠?”

“채용 공고에 관여한 적 없어.”

“정말인 거죠?”

“박 실장을 도울 비서가 필요했지만, 지원자 중에 네가 있는 걸 내가 알 턱이 없지. 전공도 다른데.”

시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술병을 움켜쥐었다. 잔에 술을 가득 채워서 한잔 쭉 들이켰다.

너무 쓰다.

술은 그녀의 인생을 대변하듯 썼다.

시현은 취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무진이 싫어하는 짓이라도 벌이려면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다.

몇 잔 마시지 않아도 알딸딸해져 손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현은 무진이 여자의 유혹을 끔찍이 싫어하는 걸 생각해 냈다.

그가 싫어하는 짓을 해서라도 깔끔한 이별을 원했다.

술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를 유혹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 낼 생각이었다.

“바라는 게 애인인 척하는 거 맞죠?”

“뭐, 그런 거지.”

“좋아요. 무진 씨한테 결혼해 달라고 붙는 여자,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를 전부 떼어 놓는데 합세하죠.”

“잘 생각했어. 네가 손해인 건 없을 거야.”

시현은 술 두 잔에 머리가 핑 돌고 눈이 흐릿해졌지만, 무진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탄탄한 복근이 있는 곳을 손으로 쓸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애인인 척할 땐 뭐든 해도 되는 거죠?”

무진이 시현의 손길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시현은 알코올의 힘을 과도하게 얻었는지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늘 반듯하던 무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이 남자는 자기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까.

내가 왜 이렇게 그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시현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뭐가 웃긴 지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날 유혹해 보겠다는 건가?”

“애인인 척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할머님을 속이려면 확실히 해야죠.”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아.”

그를 원하는 여자는 끔찍이 싫어하더니, 거절하지 않는다고?

시현은 그의 반응이 달라서 당혹스러운 상황에 놀랐지만, 애써 아닌 척하며 유혹하듯 그를 끌어안았다.

“아직 결혼이 유효한 거잖아요. 유혹이라고 보기엔 우리는 부부…….”

시현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발꿈치를 들어 올려 그에게 입맞춤했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그도 놀랐는지 움찔하더니 이내 시현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유혹하는 여자가 싫다고?

시현은 남자는 다 똑같다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의 목적이 접근하는 사람을 가리고 가족으로부터 완벽한 독립인지 모르겠지만, 유혹에는 쉽게 무너질 듯싶었다.

시현은 끝까지 그를 유혹하기 위해 부지런히 그의 탄탄한 복근을 쓰다듬었다.

입맞춤은 점점 격해지고 숨결이 서로를 잠식해 나갔다.

시현은 그에게 매달리듯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입 안 가득 알싸한 알코올 향이 남아 있었다.

분위기 탓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키스가 격해질수록 취기가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눈빛이 야릇해 보이고 그녀를 옭아매는 듯했다.

시현은 무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흐릿하게 바라보며 셔츠 안에서 자유롭게 손을 움직였다.

알싸한 알코올 탓일까.

자극적이지 않은 건지 만지는데도 그가 가만히 있으니까 뭔가 잘못된 거 같았다.

“무진 씨도 날 만지게 해 줄까요?”

“유혹을 다 한 건가?”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불을 머금고 이글거렸다.

시현은 그를 도발하며 바짝 몸을 기대고 등을 쓸어내리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당장 달려들 것처럼 그가 시현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의 침실은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듯 새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현을 침대에 눕히고 붉어진 입술을 매만졌다.

“이시현의 유혹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설레는데, 술 취한 건 별로야.”

감았던 눈이 저절로 번쩍 떠졌다. 설레는데 취해서 싫다는 건가.

“취하지 않았어요.”

“취했어. 이시현의 유혹은 이렇지 않거든. 내가 남편이어서 잘 알지.”

그가 웃음을 참으며 시현이 벤 베개를 고쳐 주고 쳐다보았다.

“침실에 들어온 건 당신뿐이니까 마음 편하게 자.”

“됐어요. 잠은 집에 가서…….”

“걷지도 못하면서 집에 어떻게 가? 술 마셔서 운전 못 해. 택시도 안 불러.”

소심하게 반항하듯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시현은 몸을 일으켜 집에 가야 했다. 하지만 슬슬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뭐라고 나직이 말하는데도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시현은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전남편이 될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운 마음에다 상황은 지옥이었다.

그가 대충 쓴 메모를 떠올리면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나쁜 건 아니었다.

일이 잘 성사되면 돈이 생기고, 부서 이동으로 그와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현재 게임 산업에 투자하고, 또 운용사의 투자 유치로 바빠서 그의 얼굴을 볼 새도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며칠 전 그의 집에까지 간 것을 알고 할머님의 비서한테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그와의 계약이 여전히 진행 중이어도 거절하는 게 옳았다. 대외 활동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얘기조차 나누지 않았으니까.

미국에서 만나 결혼한 사이라고 말하고 다니면 관계 청산이 빨라질까.

시현은 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왕 할머니는 돈과 사람을 보내 위협했다.

그는 끝까지 계약이 중요한 것처럼 함께 지내기를 바랐다.

미국의 집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며칠 사이에 각각 다른 집을 보여 주었다. 그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면서 일만 하는 그가 지독해 보였다.

그를 떠나 한국에 귀국해서 호텔에 숨어 있던 한 달 동안 자신은 그리움에 사무쳤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자신을 찾으려고 했다는 건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기에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일할 수 있는 게 놀랍기만 했다.

백야 그룹의 다음 총수가 될 사람이 투자 자산 운용사는 왜 인수한 걸까.

3년 전부터 강무진의 회사였다면, 그건 또 뭘 뜻하는 거지?

난 어쩌자고 여기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을까.

매일 출근하면 같은 의문을 가지고 남편이자 사장인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엮이지 않고 뭔가 탈출구가 있는지 수없이 고민하면서 말이다.

시현은 왕 할머니와 정 비서를 상대할 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빨리 계약을 끝내 주기만을 바랐다.

사장 비서로 신입을 채용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채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현은 먼지 한 톨 없는 사무실에 앉아 박 실장을 걸친 업무 관련한 서류에 치이고 있었다.

당장 검토가 필요한 서류를 정리해서 파일로 보내고, 깜박이는 메신저에 일일이 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화풀이일까.”

돈 받고 도망쳤다는 것에 그의 화를 돋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 감정 따위 눌러 버리고 일을 해야 했다.

한숨을 내쉬는 시현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며칠 전에 잠들기 전에 그가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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