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74)
  • 12.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시현은 퇴근하기 전까지 자신이 벌인 일에 정신이 쏙 빠졌다.

    솔직히 기분이 더러웠다.

    부모가 없고 돈이 없으면 무시당해도 소리 한번 지르는 게 전부일까.

    하필 그의 장난감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무진하고 마주치다니.

    등 뒤로 비치는 조명이 유난히 환하게 보였다.

    시현은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지금 술 한잔이 간절했다. 그리고 때마침 보기 싫은 무진이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퇴근하다 말고 그 꼴은 뭐야?”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런 꼴로 어디를 가려고? ”

    그제야 자기 모습을 보니 어디 가서 쉴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화를 식히려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머리카락에 물이 많이 묻은 것도 모르고 하염없이 걸었다.

    그런데 회사 앞이라는 사실이 황당했다.

    “바래다줄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시현은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몰라서 무진의 손을 그저 바라보았다.

    “회사 앞에서 얼굴을 팔리고 싶은 건가?”

    “그러면 안 돼요?”

    “보기 흉해.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잡자 쭈그리고 앉은 시현을 가볍게 일으켰다.

    왜 정신없이 걷고는 다시 회사 앞으로 왔는지 모른다.

    시현은 그에게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정말 서 있을 힘이 없어서 주저앉을 것 같았다.

    “괜찮다고 말하지 마. 얼굴이 엉망이야.”

    “그게 사장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회사 밖이니까 애칭으로 불러 줘. 누가 듣다가 일이 어긋나면 어쩌려고.”

    그는 갑자기 시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정쩡하게 안긴 상태로 주차장까지 걷는데도 시현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죠?”

    “우연히.”

    “그런 말 싫어하잖아요. 세상에 우연한 건 없다면서요. 이렇게 남을 돕지도 않고요.”

    “어쩌겠어. 지금은 우린 동지니까 돕는 척이라도 해야지.”

    강무진다운 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작은 친절조차 베풀지 않을 것일 텐데, 지금은 상호 관계가 되었으니까.

    그가 더욱 시현을 바짝 끌어당겼다.

    “설마 내 사생활을 침해한 건 아니겠죠?”

    “대충 넘어가. 당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봐줄 부모가 없으니까 확실하게 써먹으려는 거네요. 돈도 주고 일자리도 유지하게 하면서, 그런 거예요?”

    “이시현식 표현은 과격해. 우리가 거래한 게 있지만, 네가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아.”

    그럼 그렇지.

    이 남자는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가 다정하게 대할 때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걸 알고도 즉흥적으로 결혼했다.

    정에 굶주린 것인지, 또다시 그와 엮이면서 돈에 무시당해서 그런지 울적해질 것 같은 날이었다.

    “난 당신이 쉽다고, 부모가 없다고 널 선택한 게 아니야.”

    “궁금하네요. 날 선택한 이유.”

    그는 시현의 말에 즉각 대답했다.

    “거머리를 떼어 놓을 때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상황에 맞게 행동했지. 우린 호흡이 잘 맞았어.”

    역시나 말하는 것을 보니 사람을 전부 무시하는 집안인 듯했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 아주 재주가 좋은 남자였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고 그녀가 취업한 투자 회사를 사들인 것인지.

    3년 전부터 그의 회사라는 곳에 입사 지원서를 넣은 게 운명인지.

    그가 하는 일에는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무진은 왕 할머니처럼 교활해 보였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았다는 건, 정 비서를 만난 걸 알고 있는 거죠?”

    “아마도.”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은 했어요?”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주차장에 도착했다.

    무진의 차에 타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며 그가 직접 운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현이 사는 곳과 반대로 가고 있지만, 거지 같은 기분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진의 차가 멈춰 서고 따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올라가자 그가 먼저 내렸다.

    한 층에 한 집만 있는지 그는 묵직한 현관문 앞에서 키패드를 누르고 시현을 먼저 안으로 밀었다.

    지난번 집과 또 다른 그의 집.

    부동산을 사들일 생각이 없었다면서 여러 채를 산 건가.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서 들어오라는 걸까.

    “대충 걸칠 만한 옷이 있으니까 샤워하고 얘기 좀 하지.”

    “됐어요.”

    “따라온 거는 당신도 할 말이 있는 거잖아. 다시 운전해서 바래다줄 생각 없으니까 들어가.”

    현관 앞에서 실랑이해 봤자 무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뭘 했는지 몰라도 많이 젖었어.”

    “뭘…….”

    그제야 시현은 세수하면서 머리카락만 젖은 게 아니라 옷 앞섬이 젖은 걸 알았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무진이 한마디 더 하며 문을 닫았다.

    “당신 몸 구석구석 잘 알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대화는커녕 키스도 못 하겠어.”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민망했다.

    이런. 세수만 한 게 아니라 물을 완전히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속이 타서 막 얼굴에 물을 묻히면서 옷을 적신 모양이었다.

    얇은 셔츠가 물에 젖어 버리니 속옷이 고스란히 드러나 몸에 달라붙었다.

    시현은 신발을 벗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젖은 셔츠를 벗고 서둘러 몸을 닦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욕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을 만한 옷을 샀어. 편한 거로.”

    문을 열어 보니 옷을 두고 간 무진이 보이지 않았다.

    시현은 헐렁한 티셔츠에 바지를 입으면서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계를 쳐다보니 8시. 남편이어도 남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될 듯싶었다.

    속상할 때 그와 대화하는 게 잘될 것 같지 않았다.

    “먹을 건 마땅치 않은데 한잔해.”

    무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시현은 그냥 가겠다고 말하려고 젖은 셔츠를 챙겨서 그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앉아.”

    “가야겠어요.”

    “아무것도 안 할 거니까 앉아서 한잔해. 우리가 나눌 대화는 사적인 거잖아.”

    “하…….”

    시현은 긴 숨을 내쉬고 터벅터벅 걸어서 길게 뻗은 바에 가서 그와 마주 앉았다.

    한두 달 숨어 있으면 된다고 했기에 솔직히 한국에 와서 그와 다시 이렇게 마주 앉게 될 줄은 몰랐다.

    그를 바라보는데 픽, 웃음이 나왔다.

    “웃을 만한 일인가?”

    “그냥요. 그런데 우리가 나눌 대화가 뭘까요?”

    “결혼과 계약에 관해서.”

    지난번에 한 얘기를 또다시 하자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현이 먼저 말했다.

    “무진 씨 할머니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워요.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어. 앞으로 어디든 이시현과 함께 움직일 거야. 다른 사람을 찾아서 가족을 상대하게 하는 것보다는 당신이 하는 게 낫거든.”

    그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말하는 게 거슬렸다.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여전히 그의 아내, 애인처럼 온갖 곳에 동행해야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시현의 생각을 읽은 듯 그가 말을 덧붙었다.

    “대외적으로 아내가 있고 완전히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소문이 필요해. 그러면 할머니뿐만 아니라 별의별 인간들이 당신에게 접근할 거고.”

    “단순히 할머니의 지시로 접근하는 사람들만 물리치는 거 아닌가요?”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당신 선에서 제거하게 하는 게 첫 번째. 결혼 문제를 다시 들먹이지 않게 하는 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없는 거예요?”

    돈을 받고 무진과 헤어지겠다고 했는데, 자꾸 되돌이표처럼 같은 말을 듣고 있었다.

    내 손자와 헤어져!

    돈은 얼마든지 줄게.

    손자와 어울리지 않아!

    무진하고 엮이면서 쭉 들어왔던 말이었다.

    그가 아는 말일 텐데,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했다.

    “할머니가 주는 돈은 받아. 그걸로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주는 돈이야 받을 거예요. 그런데 그 돈은 무진 씨하고 헤어지는 조건으로 받는 거예요.”

    “그게 뭐?”

    쯧. 그가 짧게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돈만 받고 입을 싹 닦을 수 없다는 거예요.”

    “넌 그래도 돼.”

    그래도 된다고? 그게 가당키나 할까?

    시현은 그가 할머니에 관해 아는 게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말을 너무 쉽게 하니까.

    그때 생각을 확 깨는 말을 들었다.

    “처남 생각 안 해? 끔찍하게 생각하는 가족이잖아.”

    “왜 우리 남매를 괴롭히는 거예요?”

    “끔찍하게 가족을 위하는 네가 나도 안 챙기니까 처남을 미끼로 쓸 수밖에 없지.”

    그가 투명한 유리잔에 노란색 술을 채우고 시현에게 내밀었다. 시현은 술 한 모금을 마시고 접시에 담긴 치즈를 한입에 넣었다.

    그리고 무진이 술잔 옆에 내민 메모를 힐끔거렸다.

    일이 마무리되면 5억 원, TS 투자 자산 운용사에서의 부서 이동, 부수적인 것은 받아도 된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시현은 그의 멋들어진 미소와 메모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대외 활동을 하고 돈을 받느냐, 동생 세현까지 고달픈 생활로 잡아끄느냐, 그게 문제였다.

    대충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만 털어 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현은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술을 마시는 걸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계약이라면 계약이 맞는데, 5억 원은 위자료인가?

    딱히 정해진 기한이 없는 건 노예 계약이라서 하고 싶지 않았다.

    2년 계약에서 1년이 지나는 이 시점에서 추가 계약하는 것 같은 찜찜함을 털어 내지 못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것도 화가 날 지경인데, 돈을 받고 결혼을 유지하고 애인인 척해야 한다고?

    “돈은 일시금으로 줄게. 당장 필요하면 입금도 가능해.”

    “무진 씨 할머님한테 받은 돈이 있다는 거 몰라요?”

    “알아. 하지만 한 푼도 안 썼잖아. 알뜰한 이시현을 내가 잘 알지.”

    결혼부터 아니, 그와의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술잔을 꽉 움켜잡았다.

    위자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결혼을 유지한 채 무진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할까.

    문제는 그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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