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74)
  • 11.

    몇 달 동안 그와 질척이고 뜨거운 밤을 보낸 시현은 온몸을 휘감는 감각에 자신을 맡겼다.

    달뜬 신음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읏…….”

    무진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는 데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뜨거워서 타 버릴 거 같아.

    울긋불긋한 불꽃과 집요한 무진의 손과 입술에 참을 수 없는 감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를 밀어낼 수도 없는 폭풍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쾌감에 버둥거릴수록 무진의 강한 손에 잡혀 시현은 헤어 나오지 못했다.

    무진의 입술이 어디를 지나가고 어느 곳에 머무는지…….

    시현은 무진이 닿을 때마다 미칠 듯한 흥분으로 발끝이 저렸다.

    입 안 가득 위스키의 독한 향이 풍기는 듯 몽롱해지고 취기가 점점 강하게 오르는 듯했다.

    무진의 시선이 시현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무진의 눈길이 불에 타오르는 듯 이글거렸다.

    시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마구 뛰었다.

    그가 거침없이 입을 맞췄다.

    키스만큼 달콤한 게 없는 듯 달짝지근한 것이 계속 입안에 머물기를 바란 듯 집요했다.

    무진의 강한 팔이 시현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거침없는 몸짓과 입맞춤.

    거칠었다가 부드럽게 입술을 살짝 머금으며 간질였다.

    아직도 위스키의 잔향이 서로의 숨결과 엉켜 취기를 끌어올리는 듯했다.

    시현은 그와 입술이 맞물려 거세게 휘감겨지더니 입술이 떨어졌다.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지 마.”

    “…….”

    “술 취한 여자를 안는 건 당신 말대로 내 취향이 아니야.”

    “그래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거칠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던 게 떠올라서 얼굴이 새빨갛게 물었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무진과 달리 시현은 헐떡이고 있어서 민망했다.

    잠자리 안 하겠다고 말했으면서 그녀가 그에게 달려든 꼴이니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시현은 열기에 휩싸이고 순식간에 절정에 다다른 느낌이었기에 중간에 멈춘 무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묘한 미소를 본 그녀는 당황했다.

    술에 취한 여자는 안지 않는다고 말한 의미를 곱씹었다.

    이유를 알지 못해 시현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가 다시 몸을 어루만지고 입술을 포개졌다.

    들썩이던 몸이 구름 위를 걷듯 아찔하고 짜릿했다.

    그가 자꾸 뜨겁게 몰아붙이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왜 이러는 건데?’

    꼭 그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 같아서 흠칫했다.

    그가 주는 열기로 만질 수 없는 구름에 오르듯 말 듯, 짜릿했다가 푹 꺼진 느낌에 시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무진이 다정한 손길로 시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기 들어와서 살아.”

    시현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현은 정신을 차렸지만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어리둥절했다.

    무진이 시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린 결혼한 사이고 이혼은  계약이 끝날 때쯤 생각해 볼 거니까. 같이 살아도 문제가 없잖아.”

    “…….”

    “아, 같이 안 사는 게 문제지.”

    시현은 술이 확 깨서 무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술에 취한 게 강무진일까, 이시현일까.

    그가 잘못 말한 것인지, 그녀가 잘못 듣고 오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땡 하고 맞은 거 같아서 주춤한 시현이 따지듯 그에게 물었다.

    “왜 같이 살아야 하는 거죠?”

    “대외적으로 강무진의 아내 노릇을 하라는 게 아니야. 할머니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지. 넌 우리 계약이 빨리 끝나길 바라지 않아?”

    어이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호흡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물었다.

    “어차피 계약도 끝날 거고 이혼으로 마무리될 텐데 굳이 같이 살아야 하는 게 이상한데요. 왜죠?”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할머니의 욕심이 하늘을 뚫고 갈 기세라서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면 좋겠어.”

    강무진이 결혼했다는 게 알음알음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알려진 거로 아는데.

    여전히 그의 할머니가 여자를 계속 붙인다는 게 시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돈과 돈으로 혼약해서 얻는 것이 고작 돈이라는 게 싫다고 무진은 말버릇처럼 말해 왔으니까.

    “같이 살면 퇴치도 잘되고 할머니가 포기하는 게 빨라진다는 거예요?”

    “아마도.”

    “다른 이유 없고요?”

    설마,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짜일까 싶어서 알량한 자존심에 시현은 그에게 확인하려고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무진의 할머니는 시현이 그의 장난감에 불과하며, 질리고 망가지면 언제든지 버리는 게 무진의 성향이라고 했다.

    남에게 전해 들은 말이어도 맞선을 보는 것은 그도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에 수긍했다.

    쉴 새 없이 맞선을 본 이후 여자들이 들러붙는다는 해괴한 말로 애인인 척할 그녀를 고용하지 않았던가.

    그가 말하는 사랑은 아직 장난감이 필요해서 곁에 두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굳이 같이 살아야 해요?”

    “부부니까.”

    같은 말이 반복되는데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부부니까 함께하는 것이 그와 그녀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

    그의 할머니가 무섭고 무진의 협박에 굴복했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버리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때에 시현은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계획했으니까.

    “생각해 볼게요.”

    “생각은 무슨. 여행 가방 하나가 이시현의 짐이잖아. 내일 당장 들어와.”

    “생각해 본다니까요.”

    “그럼 지금 자고 내일 아침에 대답해.”

    불꽃이 일렁이고 활활 타오르는 듯하더니 그는 중간에 멈추었다.

    그리고 시현을 옴짝달싹 못 하게 끌어안았다.

    “자면서 생각해. 결정되면 아침에 말하고. 됐지?”

    “무진 씨.”

    “그래 둘이 있을 때는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집어치워.”

    말을 마친 그는 시현을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아 버렸다.

    시현은 무진의 행동을 따라갈 수 없어서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잠든 그를 보며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정말 이대로 잔다고?

    풀기 어려운 숙제를 던져 놓은 것처럼 그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고, 시현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 

    며칠 후, 왕 할머니의 비서가 시현을 찾아왔다.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았다. 무시하든 화를 내든 멋대로 할 게 빤해서 시현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무진이 말한 대로 늘 감시가 붙어 있을 거라고 하더니 어제 시현이 무진의 집에 들어간 걸 알고 온 듯했다.

    하지만 시현은 엄마의 존재로 협박하며 돈을 준 왕 할머니보다 남동생의 안위를 잡고 협박한 무진이 무서웠다.

    시현의 감정을 보태면 무진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무진의 할머니가 보낸 정 비서를 보자 시현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차 한잔해요.”

    “네.”

    북적한 점심시간에 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 정 비서가 타고 온 차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미리 준비한 얼음이 잔뜩 들어간 음료를 건네받았다.

    정 비서가 어르신의 말을 전달하러 왔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아십니까? 이번 주에 강무진 사장님은 중요한 자리에 가야 합니다.”

    “…….”

    “그분께서 노발대발하시며 이시현 씨를 외국으로 쫓아내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나는 이시현 씨가 말귀를 알아듣는 거 같아서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할 말 없습니다.”

    시현은 무진의 집에 들어간 이상, 애인인 척, 헤어지지 않으려고 무진의 발목을 잡는 척을 해야 했다.

    정 비서가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는 듯이 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주말에 강무진 사장님은 전 국무총리 손녀와 맞선이 있어요. 아니, 상견례 같이 가족이 모이는 자리인데.”

    시현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건 짐승들도 아니고.”

    “지금 이시현 씨 누구보고 그런 말을!”

    시현은 눈을 치켜뜨며 짐승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정 비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진의 인형, 장난감이기 전에 확실히 짚고 가야 할 게 있다고 생각했다.

    “짐승이죠. 강무진은 엄연히 결혼해서 아내가 있는데, 가족 모임을 상견례라고 말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무진 씨한테 중혼하라는 거잖아요.”

    정 비서가 말문이 막혔는지 눈을 부라렸다.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긴말을 내뱉었다.

    “짐승이 아니고서는 법을 어기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 국무총리 손녀도 다 알고 이러는 거면 동물의 왕국처럼 수컷이 암컷을 두 마리 이상 거느리는 건가요?”

    “이시현 씨, 말조심해요.”

    “궁금해서 그래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노려보는 정 비서의 눈빛을 받아 내며 쇼를 해야 하는 게 퍽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당분간 투자 회사에서 경력이라도 쌓아야 하니 일에 집중하고 무진을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무진의 할머니가 무섭긴 해도 현재는 이혼하지 않으려는 무진을 달래고 계약을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다.

    되바라진 시현의 말에 제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정 비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여러 색으로 뺨이 물들더니 헛기침하며 말했다.

    “이대로 전해 드리면 이시현 씨는 한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요?”

    “죽이지만 마세요. 무진 씨는 제 목줄을 잡고 흥정까지 하니까요.”

    “시현 씨, 똑똑한 줄 알았는데 멍청한 데다가 무모하기까지 하네요. 그분께서 나서지 않는 것은 그래도 강무진 사장의 장난감 노릇을 잘하기 때문이었는데.”

    시현은 정 비서를 바라보며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가치를 증명하게 만든 건 그분이죠. 여쭙지 않은 돈과 협박은 먹히지 않으니까 잘해 보세요.”

    시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 문을 열었다.

    “에이드는 잘 마실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대로 한 방 먹은 얼굴인 정 비서를 뒤로하고 시현은 회사 건물로 뛰어갔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어쩌자고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엄한 사람에게 퍼부었는지 미안해 죽을 맛이었다.

    어디로 내쫓기는 것이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닌 듯해서 강하게 되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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