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4)

8.

“진짜죠?”

“진짜 내막까지 알 거 없어. 도망갈 궁리만 하는 이시현한테 다 말할 수 없으니까.”

스카이라운지에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흐르는데 시현의 주변은 북극의 얼음을 가져다 놓은 듯 차갑게 얼어붙었다.

수행하라고 했으면서 목적 없는 사람처럼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말은 못되게 하면서 원하는 것은 ‘너’라는 미친 말을 보태서.

알려진 대로 백야 그룹의 지분을 제일 많이 가진 자가 강무진이었다.

백야 그룹 승계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투자 자산 운용사를 가졌다는 게 무슨 뜻일까.

무척 궁금한데 날카롭게 선을 긋고 딱 잘라 말하는 무진에게 꼬치꼬치 물을 자신이 없었다.

애인인 척하면서 수고비만 받았으면 이토록 복잡한 관계로 마주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봐도 우스꽝스러웠던 결혼은 그에게는 한없이 부족했고 그녀에게는 설렘 가득했다.

뭘 원하는지 모르니까 다시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할머니한테 반항하느라 그녀와 결혼을 유지하고 싶은 걸까.

백야 그룹 최대 주주인데 누구 눈치 볼 이유가 있을까.

생각은 많고 궁금한 것을 묻고 싶은데 시현은 까슬까슬한 입 안을 물로 축일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는 눈이 있어. 그러니까 애인, 아내로서 좀 적극적으로 해 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할머니가 보낸 사람들의 뒤통수치기.”

“그게 뭔데…….”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시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느새 밖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에 도착한 그는 누군가 볼 수 있도록 느릿하게 스위트룸 문을 열었다.

천천히 시현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에 기댄 채 무진의 팔에 갇힌 시현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가 생뚱맞게 말했다.

“아직 마땅한 집을 구하지 않아서 호텔로 온 거야.”

“집이요?”

“이시현이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부동산을 사들이지 않았을 거야.”

“…….”

“이사 준비가 덜 돼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백야 그룹의 계열사 백 건설은 해외 수주뿐만 아니라 국내 고급 아파트를 많이 지었다.

그런데 살 집이 없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백야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았으면 친구 집이나…….

할머니나 어머니, 혹은 친인척 집에 가도 되는 거 아닌가.

집 문제가 무진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시현에게 무진을 빼면 의식주 해결은 최우선이었다.

한참 부동산을 생각하는데 엘리베이터는 금세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여기는 왜 온 거래.

우물쭈물하는 시현을 스위트룸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가 억지로 침대에 눕히지 않겠지만  유혹을 뿌리치는 게 얼떨결에 온 스위트룸에서 벗어나기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신경 쓰는 듯 그녀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며칠 전 그녀를 호텔에서 찾아내고 아내의 환대를 기대한다며 밀어붙인 것과 많이 달라 보였다.

“당분간 이런 일이 있을 거야. 미국에서 하던 일의 연장선이지.”

“지금은 비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네가 도망쳤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어. 할머니가 지칠 때까지.”

“…….”

“통장 잔액 확인해 봐. 한 번에 천만 원이었으니까. 계산 끝.”

법적인 아내한테 애인인 척하라는 것도 웃기는 상황인데 돈도 주겠다고?

불쾌감에 시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계산 끝이라는 무진의 말에 서둘러 잔액을 확인하자 화들짝 놀랐다.

“미쳤어요?”

저도 모르게 미쳤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재빨리 틀어막을 새도 없었지만, 그는 시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생기는 돈은 다 받으라니까. 할머니든 남편이든 누가 주든.”

“무진 씨!”

“집에 짐을 전부 놓고 가서 입을 옷도 별로 없잖아. 다 버렸으니까 새로 사. 일은 제대로 해야 하잖아.”

돈을 못 써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건가.

시현에게 돈을 쓰려고 발악하는 남자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남편의 돈이 일의 수고비로 통장에 찍히니 묘한 기분에 착잡한 것을 떨칠 수 없었다.

돈을 쓰는데 환장한 남자에게 입금된 돈이 많다고 해 봐야 도로 가져갈 것 같지 않았다.

시현은 응접실에 그를 두고 객실 문 쪽으로 향했다.

복도에 카펫이 깔려 있으니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 렌즈로 밖을 보니 건장한 남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듯 서성거렸다.

남자가 비켜 가니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것 같았고 렌즈로 눈꺼풀이 보였다.

밖에서는 아무리 문 렌즈를 봐도 안이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렌즈로 여자의 눈꺼풀을 보고 놀란 시현은 소리를 지르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순간, 응접실에 앉아 있는 무진이 헛소리하는 것이 아닌 걸 깨달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 밖에서 무진과 시현을 염탐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강무진하고 맞선 본 여자나 무작정 찾아오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한 번은 잘못했다며 이별 통보해 놓고 그에게 매달려서 울부짖었다. 홧김에 실수했다지만 그를 대신해서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부모가 정해 준 여자는 절대 만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그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여자도 있었다.

집에서 들이미는 여자와 맞선을 안 보면 되는 것을 굳이 만나서 사달을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애인이 있다고 수십 번 말해도 먹히지 않는 듯했다.

언젠간 시현에게 그는 돈에 얽혀서 하는 결혼이 가장 싫다고 했다.

몇 번 애인인 척하며 만난 여자는 거의 비슷하게 그에게 애걸복걸했다.

기회를 달라며 인간 강무진을 사랑한다고 소리친 여자.

집안 빼고 자신만 봐 달라고 애원하던 여자.

몇 번 그런 여자를 보고 나서 오히려 시현은 무진에게 대차게 욕을 해 주고 정신 차리라고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맞선과 들러붙는 여자들은 결혼으로 완벽히 정리되었다.

결혼만큼은 돈을 받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소박하고 재미있게 치렀다.

그래서 돈 쓰는 것에 환장한 무진하고 그럭저럭 소소한 즐거움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강무진이 올라갈 수 없는 나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지금 생각해도 뺨 맞은 건 아파.’

그에게 매달리던 여자의 분이 풀리지 않아 때리는 것을 맞아 주고 오히려 그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욕을 먹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좀 자. 아무 짓 안 할 테니까.”

저렇게 말할 때면 아무 짓 좀 하고 놓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시현은 스스로 심술궂은 생각을 하고는 픽, 웃었다.

“회사를 그만둬서 공백이 생기는 것도 용납 안 해.”

“누가 뭐래요?”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느닷없는 말에 감정이 상했다.

결혼은 왜 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그가 맞선으로 만난 여자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실.

박 실장이 무진과 시현의 관계를 안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상하 관계였다.

시현은 직속 상사인 박 실장에게 업무 지시를 받았다. 박 실장이 자리를 비우면 사장 무진을 밀착해서 업무 보조를 맞춰야 했다.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 탓에 강무진은 사내에서 사장이라는 직책보다 연예인 같다는 말이 그녀의 귀에도 자주 들려왔다.

젊고 돈이 많고 얼굴까지 봐 줄 만하니 뭔 말인 듯 그에게 좋은 것이다.

인수 합병된 회사가 흔들림은커녕 위기 없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전부터 회사 주인이 강무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강무진이 백야 그룹의 후계자로 알려져도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별개로 생각되는지 외부에서는 흥미롭게 보는 듯했다.

늘 정시 출근하는 시현보다 먼저 와서 오전에는 얼굴을 볼 새가 없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보자 시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정리된 투자처 정보는 바로 올려.”

“네.”

짤막한 인사 뒤 그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는 박 실장을 보며 시현은 정리해 둔 자료를 파일로 전송하고 곧장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장실에 들어가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무진의 책상에 내려놓으며 간결하게 시현이 말했다.

“설탕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박 실장에게는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건넸다.

“투자처 정보는 전송했습니다.”

“수고했어.”

무진은 밖으로 나가는 시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훑고 전날 주식 동향을 살폈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무진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실무진은 능력에 따라 성과급이 주어져서 헛짓거리하는 직원이 없었다.

무진이 고개를 들어 박 실장에게 말했다.

“H 게임 회사는 투자만 있으면 되는 건가?”

“재무 구조가 좋은 편이고 개발자들이 우수합니다. 작은 회사지만 투자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송 실장도 그렇다고 여러 번 말하더군. 박 실장도 꼼꼼하게 검토했는데 평가가 좋다면 그쪽 대표와 개발자를 만나 보지.”

“일정 잡겠습니다.”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일에 우선해야 하지만, 과감한 투자는 늘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미래 지향적인 투자로 처음 계획한 대로 무역, IT 기업, 게임 회사에 투자를 늘릴 생각이었다.

“할머니 쪽은 어때?”

“젊은 여자가 자주 들락거리는 게 포착되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여자를 붙이는 게 할머니 생각인 게 소름 끼쳐. 현명한 분이 욕심이 생기니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봐.”

“사장님.”

“왜? 내 말이 심해? 내가 종족 번식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말씀하시잖아. 누가 심한 거야?”

박 실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자 사랑이 지독한 것은 아들들을 일찍이 보내서 허전함이라고 하기엔 왕 할머니는 욕심이 지나쳤다.

권력자에 빌붙어서 흥한 기업보다는 망한 기업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무진이 백야 그룹의 지분을 계속 사들이면서도 그룹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진의 친인척들은 할머니와 무진의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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