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74)
  • 7.

    백야 그룹을 손에 꽉 쥐고 있는 왕 할머니 순자를 만나고 나온 소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나올 거 같아서 입술을 꽉 물고 있었다.

    처음 백야 그룹에서 연락이 와서는 광고나 스폰 같은 게 붙는 줄 알고 들뜬 마음이었다.

    백야 그룹의 실세라는 분의 비서가 직접 데리러 왔으니 기대감은 쭉쭉 하늘에 닿을 듯 올라갔다.

    하지만 돈이 생기는 일에 연기 재능을 써야 한다는 게 꺼림칙했다.

    거절하지 못하고 덥석 물어 버렸지만.

    소연은 미모라면 국내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줄이 없어 인정은커녕 제대로 된 배역을 맡지 못하는 무명 배우였다.

    오뚝한 코에 눈이 크고 늘씬한 체형이며 어느 한 군데도 의술을 빌리지 않은 자연산이었다.

    “누굴 싸구려로 보고 참나.”

    손자를 확실하게 흔들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 가능한 배역과 돈, 소형차를 받았다.

    “남자를 유혹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하라는 거니까 어렵지는 않은데……. 여자가 평범하네.”

    차 키를 손에 쥐고는 강무진과 이시현의 신상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지웠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 사장을 흔드는 게 저 할머니한테는 중요한 건가.”

    영화 한 장면 찍는 거라고 쉽게 생각하며 받아들인 일이었다.

    왕 할머니라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강무진에게 전화, 우연한 만남으로 귀찮게 하면 되는 것이다.

    왕 할머니하고의 거래는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는 조건에 따라 받은 돈은 상당했다.

    소연은 조금 전 으리으리한 저택을 나오기 직전에 비서라는 사람이 경고하듯 한 말을 곱씹었다.

    “일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은 처리해 줄 테니 싸구려처럼 보이지 마세요.”

    “네.”

    “일을 잘 마치면 성과급이 있으니 절실하게, 확실히 해야 합니다. 강무진에 관해서 어떤 것도 담아 두지 말고요.”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잘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우연한 만남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잠시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돈을 쓰는 스타일이 놀라울 정도였다.

    계약금과 일을 바로 착수한다는 조건으로 받은 소형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강무진의 움직임에 관해 메시지가 떴다.

    소연은 수월한 일에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냥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쉽지.”

    곧장 차를 돌려 강무진이 있다는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탐색할 것도 없이 바로 일을 시작해서 초조하지만, 핸들을 잡은 손의 감각을 느끼며 돈과 배역만 생각했다.

    위험한 눈빛과 비릿한 미소는 이번 일로 얻게 될 달콤한 성과와 전혀 달라 보였다.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일을 덥석 접었지만, 완벽하게 끝낼 생각이었다.

    무명 배우로서의 마지막 연기를 펼치고 멋지게 배우로 인정받거나 받은 돈으로 새로운 것을 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쓰이는 연기가 불쾌해도 돈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 

    시현은 바쁘게 일하는 무진과 박 실장 사이에서 아직 중대한 업무를 맡지 않아 한가로웠다.

     투자 관련 메일을 번역하고 올라오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일정을 매시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집에 가서 그와의 관계를 고민하다 잠을 설쳐서 입안에 혓바늘이 돋는 게 문제일 뿐.

    출근해서 하는 일은 피로감을 주지 않았다.

    열심히 번역해서 자료를 만드는데 박 실장이 나직이 말했다.

    시현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없이 업무 지시처럼.

    “시현 씨. 내일은 퇴근하고 사장님과 동행해야 하니까 시간 비워요.”

    “사장님과 동행이요?”

    “파트너가 필요한 자리여서 시현 씨가 가는 건데 어렵습니까?”

    “아뇨. 준비하겠습니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말하는 거 같아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박 실장이 무진과 그녀의 관계를 잘 아니까 가타부타 반박하거나 거절 의사를 내비치기가 어려웠다.

    다음 날, 업무는 늘 같았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으로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어떤 자리에 왜 가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불안한 기분이 깃들었다.

    시현은 시계만 힐끔거리며 퇴근을 기다리면서 들숨 날숨 쉬고 있었다.

    책상을 정리하던 박 실장이 시각을 확인하고 시현에게 퇴근을 알렸다.

    “시현 씨는 지금 퇴근하고 주차장으로 가면 됩니다. 사장님 차는 알죠?”

    “네.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무진과 함께하는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차장에서 그를 보았지만, 시현은 말없이 조수석에 탔다.

    잠시 후, 무진의 차를 타고 회사에서 멀지 않은 K호텔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했다.

    가볍게 한두 잔 마시는 분위기지만 특별한 게 없었다.

    창가로 안내받은 무진과 시현은 칵테일을 주문하고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현은 마티니를 두 잔 마시고 상사인 무진을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사장을 수행하라고 박 실장한테 지시를 받고 나서 조금 힘을 주듯 옷을 차려입었다. 그런데 이건 미국에서 무진의 애인 대행하던 것처럼 데이트하는 방식이었다.

    마티니를 석 잔 마신 시현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수행할 일이 뭔가요?”

    “애인 대행하는 거 아직 유효하잖아.”

    “업무가 아니라는 거네요. 지금.”

    “지금 업무가 아니면 계약 이행인가? 아, 복잡하게 그러지 말고 단순한 데이트라고 생각해.”

    용건도 없이 시간 허비하는 남자가 아니기에 자리가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업무라고 생각해서 별수 없이 수행했건만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와서 칵테일만 마시고 있었다.

    시현은 며칠째 잠을 설친 상태에 마티니를 석 잔 마셔서 알딸딸한 기분이었다.

    이런 거 쓸데없는 연장 근무 아닌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가 이 자리를 만든 목적을 생각해 보았다.

    알코올이 몸에 들어가니 몸은 힘들어서 축 처지는 기분인데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는 기이한 현상에 시달렸다.

    머리가 맑아진 거 같은데 생각이 많아지니 찌근거렸다.

    시현은 불편하다고 내색하지 않으며 무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가 돈이 많은 줄 알았다. 한국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인 줄은 몰랐다.

    돈 많은 무진 덕분에 숨통이 트이고 동생을 구제할 수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가 누구의 자식이든 가진 게 무엇이든 그런 것이 시현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마티니를 마셨다.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무진의 할머니가 보낸 비서를 보자 시현이 올라선 곳은 모래성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무진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면 동생과 함께 파묻혀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그 같은 협박에 시달렸으니까.

    그런데 지금, 시현은 무시무시한 왕 할머니로부터 돈을 받고도 버젓이 강무진 곁에 있었다.

    이런 불필요한 일을 왜 하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귀찮은 일이 생길 거야. 마음의 준비하고 계약대로 잘하길 바라.”

    “끝까지 계약은 진행하는 거네요.”

    “오늘 당장 누가 오는 건 아닌데 한국에서도 연습이 필요할 거 같아서 시간을 냈어.”

    “이혼하자니까 계약을 끌고 온 거네요.”

    퉁명스럽게 맞받아치니 무진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미국은 바다 건너 멀어서 뭘 어쩌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것이 할머니한테 유리하거든.”

    무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되묻는 뉘앙스로 말끝이 올라갔다.

    “……네?”

    그는 무심하게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시현에게 못을 박듯 말했다.

    “이혼하고 싶으면 계약이라도 잘 이행하라고. 미국에서 하던 일이니까 잘할 수 있잖아.”

    “결혼했으면서 무진 씨 사정에 따라 애인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상황 파악은 스스로 해.”

    시현은 짜증 섞인 그의 말에 눈길을 내려 테이블에 놓인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렸다.

    마티니는 향이 좋으나 쓴맛이 강했다.

    어쩌면 그녀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 보기에는 좋으나 인생의 쓴맛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투명한 칵테일 속의 올리브를 보다가 남은 마티니를 쭉 들이켰다.

    상황 파악을 어떻게 하라는 건데?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딱히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카이라운지는 클럽 분위기에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이 그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혼자서 바텐더와 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시현과 무진에게 관심을 보지 않았다.

    애인인 척?

    이혼 합의서를 법원에 제출도 못 했는데 무슨 애인?

    그냥 아내가 있으니 접근하지 마! 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누가 그에게 질척거리면 ‘나 이 남자 아내거든!’이라고 한마디만 해도 나가떨어질 텐데.

    어려운 쪽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의도는 정말 뭘까.

    알딸딸한 상태에서 머리를 굴려도 딱히 마음에 드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티니를 한 잔 더 주문해서 마셨다.

    취기가 오르는 듯 시현의 뺨이 붉게 물들어 갔다.

    시현은 차가운 손으로 뺨을 감싸며 그에게 따져 묻는 듯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무진 씨, 나한테 원하는 거 있어요? 말해 봐요.”

    “원하는 거라…… 너.”

    나직이 말하다가 짧게 한마디 툭 던져 놓자 시현은 딸꾹질했다.

    히긋. 이게 뭐야!

    헛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여기서 발끈하면 되는 걸까.

    히긋. 딸꾹질에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숨을 참던 시현은 장난기 서린 그의 얼굴을 보고 참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발끈했으면 꼴이 우스워질 뻔했다.

    결혼보다 계약이 우선일까.

    시현은 차분하게 물었다.

    “계약만 이행하면 돼요?”

    “아마도.”

    “그런데 왜 이 회사예요? 백야 그룹에 갔으면 애인인 척하는 거 더 쉽지 않겠어요?”

    “착각하지 마. 네가 여기에 지원서 넣은 줄도 몰랐고 TS 투자 자산 운용사는 3년 전부터 내 회사였어.”

    술에 취해 진짜 헛소리를 듣고 있나 보다.

    TS 투자 자산 운용사가 그의 회사였다고?

    “확정된 게 얼마 안 되었을 뿐이야.”

    의심의 눈초리로 무진을 빤히 쳐다보니 그가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난 멀쩡해. 날 미치게 하는 건 너지만, 헛소리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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