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4)
  • 6.

    시현의 생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마틴한테 들었는데 뭐더라.”

    “이시현입니다.”

    “아, 시현 씨.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무슨 호구 조사 하니?

    그는 쓴 커피를 벌컥벌컥 물처럼 마시더니 시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앉아 있는 자세를 훑어보는 시선이 불쾌했지만,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꾹 참고 오롯이 시선을 받아 냈다.

    용건을 말해.

    차에 태워서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왜 왔어!

    하고픈 말은 목구멍에서 삼켜지고 양손은 꽉 마주 잡은 채 입꼬리는 올렸다.

    그제야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본론을 꺼내는 남자.

    “돈이 필요하다지?”

    “…….”

    “이시현 씨가 나하고 같은 학교 동문이어서 이런 제안도 가능한 거야.”

    “무슨 말인지…….”

    “내 말을 무조건 듣는 애인인 척하면 시현 씨가 필요하다는 그 돈을 바로 주지.”

    돈을 쓰고 싶으면 쇼핑하든 술을 처먹으면 될 텐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돈을 주면서 뭘 시켜?

    중학교 때 미국에 와서 한국인을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껏 본 인간 중 가장 최악이고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돈으로 뭔가 하려는 인간치고, 정직한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시현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를 쳐다보면서 할 말을 머리로 굴렸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가 말을 덧붙이며 설명했다.

    “들러붙는 여자들 때문에 내가 아주 곤경에 처했거든. 짧게는 반년, 길면 2년 정도.”

    “…….”

    “당장 필요한 돈은 계약금. 이후 애인으로 만날 때마다 천만 원을 지급하지.”

    와. 돈 있는 것들은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스케일이 다르구나.

    시현은 손뼉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되물었다.

    “애인 대행 같은 거예요? 그 정도의 일에 그런 큰돈을 준다고요?”

    “시현 씨의 시간을 비싸게 사겠다는 거야. 필요할 때만 미소 짓고 자리만 지키면 되는 건데 괜찮지 않아?”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런 일을 할 만한 여자가 꽤 많을 것 같은데요.”

    시현은 일부러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시간을 사겠다면서 돈 자랑하는 게 퍽 좋지 않았으니까.

    나쁜 일 같기도 하고 여자한테 못되게 하는 것을 봤기에 받아들이기에 망설여졌다.

    “내가 필요로 할 때 애인 역할 좀 하라는 건데 모르겠어?”

    “시간을 사겠다는 것은 시간,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근무라는 거잖아요. 그런 게 일이라고 할 수 없죠.”

    “필요할 때만 하는 일이어서 대기하는 거니까 계약금과 만날 때마다 돈을 주겠다는 거야.”

    “여자 많잖아요.”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니야.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거든.”

    돈이 필요했다.

    경영 대학원에 다녀도 취업한 게 아니어서 대출은 받을 수 없었다. 당장 돈을 구하지 못하면 동생의 처벌을 피할 길이 없었다.

    한국에 가서 대학에 다닌다더니, 동생 세현이 임시 면허로 사고를 냈다. 거기다가 집 보증금 사기까지 당했다.

    공부 빼고는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동생은 시현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한국에 같이 가지 못해 벌어진 일이어서 시현은 오롯이 책임을 지려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남자를 잘 알지 못해도 마틴의 친구라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돈이 많아 보였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 같았다.

    “대기하라면서 못 만나게 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야 할 거야. 그러니 한 달에 천만 원 혹은 2, 3천만 원을 버는 일이지.”

    돈지랄하는 남자가 재수 없었지만, 솔깃한 것은 사실이고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시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크게 숨을 내쉬며 확인차 물었다.

    “애인 대행이 육체…….”

    말이 잘렸다.

    “그런 거 하기에는 시현 씨가…… 좋은 몸을 가졌지만, 내 취향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뭐? 이 남자 계약하자면서 말을 못되게 하네.

    시현은 안심하기는커녕 몸매 품평을 들은 게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먼저 그녀가 육체 얘기를 꺼냈으니 그가 답변하는 것에 반박하면서 딴지를 걸 수 없었다.

    시현은 위험한 일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너무 타이밍이 좋게 큰돈을 바로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돈이 필요해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짧게 반년, 길면 2년이라고 한 말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저는 졸업하고 한국에 갈 건데요. 짧게 반년이면 상관없지만요.”

    “한국에서도 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넉넉하게 계약 기간을 2년이라고 생각해.”

    망설일 틈이 없었다.

    돈을 쓰고 싶어 환장한 놈한테 돈을 받고 애인 대행하는 일이 뭐가 어려울까 싶었다.

    동생의 일이 해결된다면 위험한 돈이라도 끌어다 쓸 생각이었으니까.

    시현은 바른 자세로 앉아 고개만 휙 돌려 남자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그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신뢰는 이 악수로.”

    “아, 네.”

    얼떨결에 잡은 남자의 손 덕분에 필요한 돈이 생겼고 동생은 한국에 정착할 준비를 마쳤다.

    부모 없이 남매 둘이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그의 도움은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다.

    *** 

    최소한의 정보만 가진 채 강무진의 애인인 척하는 것은 수월하지 않았다.

    가벼운 제안이었지만 큰돈을 받은 만큼 일이 쉬운 게 아니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둬야 했고, 주말에 하던 다른 아르바이트도 일주일 만에 정리해야 했다.

    남자에 관한 정보는 이름, 나이뿐이었고 뭘 하는 사람인지 아는 게 없었다.

    강무진, 나이 서른. 같은 학교라고 했으니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생, 잘생기고 돈이 많다는 정도였다.

    반대로 그가 시현에 관해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

    서로의 사적인 공간을 위협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일도 거의 없었다.

    대신 애인 역할에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면 짤막한 메시지로 할 일, 대사가 있었다.

    -마틴 레스토랑에 5시까지 와.

    -오늘은 행동을 좀 보여야 해.

    지난주까지 일하던 레스토랑에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하라는 대로 짧은 치마에 발목이 부러질 것 같은 하이힐을 신는 게 못마땅했다.

    돈을 받는 일에 불평을 토로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상기하고 마틴의 레스토랑에 갔다.

    장사가 잘되는 레스토랑에 손님이 없을 시간을 잘도 맞춰서 여자가 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지난달부터 카사노바가 출몰한 것도 아닐 텐데, 마틴의 레스토랑이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게 조금 못마땅했다.

    시현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방긋 웃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무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시현을 힐끔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무진 씨, 이 여자 뭐야?”

    “…….”

    “뭔데 우리 테이블에 와서 눈을 번뜩이는 건데? 벌써 여자 생긴 거야?”

    아, 지저분한 일에 사람을 고용한 거구나.

    그가 애인 역할을 제안하면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한 탓이었다.

    상황이 퍽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를 떼어 내는 방법도 치졸하다고 생각하는 차에, 그가 여자에게 짜증 나는 투로 말했다.

    “부모를 들먹이는 것은 그만두고 돌아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정해 준 대로 사는 게 순리잖아. 무진 씨가 이런다고 달라질 거 같아?”

    “달라지는 것에 관심 없어.”

    “관심이 없어도 그렇지. 맞선 본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벌써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예의는 어른들한테 찾아. 난 거절했으니까.”

    멀뚱멀뚱 서 있는 시현은 자신에게 눈짓하는 무진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무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몸을 기울였다.

    촉. 순식간에 그가 시현의 뺨에 입맞춤했다.

    미국이어서 누가 보면 가벼운 인사로 보이겠지만, 시현은 황당하고 어리둥절해서 손이 올라갈 뻔했다.

    여기서 무진의 뺨을 때리면 모든 게 끝이 나는 것이라 꾹 참았다.

    “뭐야? 두 사람?”

    여자가 앙칼진 소리로 물었다.

    “보다시피 난 만나는 사람이 있으니까 부모님 앞세워서 질척거리지 마. 누가 뭐래도 난 결혼에 관심 없어.”

    “그럼 맞선을 보지 말아야지.”

    “거절했다고 몇 번을 말해? 다 알면서 나온 거잖아. 아니라고 발뺌 못 할 텐데.”

    무진의 말에 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번지고 가방을 쥔 손이 새하얗게 되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런 건 예의가 아니지. 내가 질척거려? 부모님만 아니었으면 성격 더러운 너한테 이러지 않아!”

    “그러니까 싫다는 사람 앞에 알짱거리면 안 되지.”

    “나한테 모욕 준 거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거야. 두고 봐!”

    여자는 분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잔을 바닥에 던져 깨고는 쿵쾅거리며 레스토랑을 나갔다.

    깨진 잔을 보면서 시현은 남녀의 치정극에 끼어든 게 불편하고 짜증이 났다.

    애인 대행이라는 것이 데이트나 하고 가벼운 포옹 정도로 그럴싸하게 남들에게 보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짐작했으면서 돈이 급하다고 생각 없이 저지른 결과에 참담함을 느꼈다.

    집안끼리 어울리는 남녀 사이라면 결혼 얘기가 있었을 텐데,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상처를 입힌 거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시현은 무진에게 기댄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청소 도구를 찾으려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다른 직원이 치울 수 있지만, 빨리 벗어나려면 먼저 움직여야 할 거 같았다.

    그때 마틴이 다가와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된 거야?>

    <그게……, 죄송합니다.>

    <시현이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순진한 애 꼬드겨서 상처 주지 마, 무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현과 달리 그는 어깨만 으쓱였다.

    돈을 받고 하는 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궁한 시현은 강무진의 애인 대행을 몇 번 더 하고 일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인 대행은 두 사람의 즉흥적인 결혼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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