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4)
  • 3.

    테이블에 놓인 흰색 봉투에 시현의 시선이 닿았다.

    왕 할머니의 비서가 봉투를 시현 쪽으로 밀며 말했다.

    “부족하다면 더 줄 수 있답니다. 자리 잡는 동안 필요하다면 일정 기간 이시현 씨의 후원도 가능합니다.”

    “이건 넣어 두세요.”

    돈 봉투를 또 받을 수 없어서 비서 쪽으로 슬며시 밀었다.

    그러자 그분의 비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설마, 강무진이 누구인지 알게 되어 딴마음을 먹은 거라면…….”

    그때, 호텔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 있던 시현과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그분의 비서는 경악하며 객실 안으로 들어온 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좁은 호텔 객실에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숨이 막혀 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현과 정 비서를 번갈아 가며 보던 무진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이 조합 웃기네.”

    정 비서는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얼어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치를 보는 시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돈입니까?”

    정 비서가 빠르게 숨기려던 흰색 봉투를 본 무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호텔 객실에서는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날카로운 무진의 말만 울렸다.

    “대답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 정 비서는 이만 가는 게 어떻습니까?”

    “무진 님. 어르신께서…….”

    “여기서 피를 보고 싶은 겁니까?”

    “아닙니다.”

    “내 아내는 서 있고 정 비서는 앉아서 거만 떨고 있으니까 내 기분이 거지 같은데.”

    시현은 그간 두 번 만났던 정 비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도 그는 거침없이 말하자 움찔했다.

    양쪽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면서 숨을 죽였다.

    “우리 일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전해요. 참는 것도 한 번이라고.”

    뭐라고 반박하지도 못한 정 비서는 한참을 서 있더니 돈 봉투는 그대로 두고, 무진에게만 고개를 숙이고는 객실을 나갔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무진이 시현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또 도망가려고?”

    “…….”

    “정 비서하고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을게. 할머니가 주는 게 있으면 받아. 주는 것은 전부 다 받아서 네 것으로 해.”

    무진의 말을 듣고 있던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알고 하는 말인지 표정을 살펴도 딱히 드러난 게 없어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이전에 받은 거 말해도 소용없잖아.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일일이 저런 여자 상대하지 마.”

    “그분…… 무진 씨 할머니라면서요. 우리 결혼이 못마땅하면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린 성인이야. 누가 뭐라고 하든 계약은 이행해야지. 안 그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의 애인 대행 제안과 황당한 프러포즈로 시작된 결혼을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

    시현은 어이없어 벌어진 입으로 반박할 말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가 봐. 지옥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당신뿐만 아니라 처남까지 어디서든 발붙이고 살기 힘들어질 거야.”

    “우리 이혼이 동생하고 무슨 상관인데!”

    참고 억눌렀던 소리가 터졌다.

    무진의 할머니나 그나 협박이 일상인 거 같았다.

    이래서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괄시하고 멋대로 휘젓는 것을 당연시하는 듯했다.

    “무진 씨가 부자였으면 결혼 같은 거 안 했어. 공부만 하다가 취업했을 거라고!”

    “취업으로 결혼도 괜찮다고 한 건 너야. 내가 아니라 이시현이라고.”

    부들부들 떨면서 반박은커녕 1년 전 일이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터질 듯한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게 영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씩씩거렸다.

    시현은 말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때 그가 테이블에 있는 돈 봉투를 집어 시현의 손에 쥐게 했다.

    “가져. 할머니 돈은 나와 상관없으니까 다 가져. 그리고 일해도 되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마.”

    “그럴 수 없어요.”

    “그럼 강무진 아내로 대외 활동을 하든가. 이것도 일종의 취업 아닌가?”

    “그건 더 싫어요.”

    용기를 내서 거절 의사를 내비쳤지만, 그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했다.

    시현이 싫다고 한마디 하자 무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박 실장, 이세현을 잡아 흔들 만한 것을 조사해. 탈탈 털어서 먼지가…….”

    “잠깐! 잠깐만요. 전화 끊어요.”

    다급하게 무진의 팔을 잡고 늘어진 시현은 애걸하듯 양손을 맞잡고 비는 모습을 보였다.

    군에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동생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무진이 한 말이 빈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애처로운 눈빛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전화 끊어요.”

    “끊으면?”

    “무진 씨가 바라는 대로 할게요. 세현이는 그냥 둬요. 도망 안 가요.”

    “박 실장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무진이 박 실장과 통화를 끝내고 시현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거 알지?”

    시현은 그의 물음에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한 번의 실수로 지독한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 

    가진 게 많이 있는 사람치고 거절을 용납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남자를 만난 것부터 시현은 시한폭탄 같은 문제를 끌어안은 것이다.

    상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혹적인 무진에게 빠져들어서 이 사태까지 왔다.

    빈털터리가 인생에서 단 한 번 돈에 굴복해서 만나게 된 남자.

    역시나 있는 것들과 엮이면 안 된다는 것을 또다시 느낀 재회였다.

    시현은 협박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 무진이 무섭고 소름 돋으면서도 그를 향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괴로웠다.

    “뭘 모든 걸 다 준다고 해. 나쁜 놈.”

    그분의 비서는 시현을 괴롭히려고 작정했는지 끊임없이 연락하지만, 시현은 무진이 더 무서웠다.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 조금이라도 있으려는 핑계인지도 모른다.

    협박했어도 거절하는 것이 옳았는지, 무진이 무슨 생각으로 계약과 결혼을 이어 가려는지 궁금했다.

    그때는 막 잠들었을 때 들어서 몰랐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그가 한 말은 회사에 오라고 했던 거 같았다. 그는 시현이 어느 회사에 입사했는지 아는 듯했다.

    시현은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채용 공고, 그리고 지원서를 제출하고 간단하게 면접도 봤다. 찜찜하고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몸을 돌려 빠르게 인터넷을 검색하니 그간 잊고 있었던 일이 보도된 것을 볼 수 있었다.

    [백야 그룹 후계자의 색다른 행보]

    [TS 투자 자산 운용사 인수로 외국 자본 유치]

    [투자금 독식이 우려되나 TS는 실리콘밸리 중심의 무역, IT 기업, 게임 회사 위주로 투자한다고 발표]

    백야 그룹 최대 주주이자 승계가 유력했던 강무진이 투자 회사에 간다는 것이다.

    인수 합병 문제가 있다고 들었지만, 수년간 준비했을 텐데 하필 합격 통보를 받은 곳이 TS 투자 자산 운용사였다.

    “미쳤어. 왜 여기야!”

    호텔에 숨어 있다가 백야 그룹하고 상관없는 회사에 출근하면 잊힐 줄 알았다.

    잠시 몸을 숨긴 동안 이혼과 그의 재혼이 이루어질 거라고 그분이 말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시현은 외국어 능통, 비서 업무도 익혀서 투자 회사 비서직에 지원했다.

    통역이 가능하며 해외 출장에 결격 사유가 없고 행정 및 관리도 되며 사장의 보좌 임무를 수행할 비서 모집에 200여 명이 지원했다.

    짧은 공고 기간에 비하면 많은 지원자가 있었고 학벌, 외국어 수행 능력이 뛰어나 최종 면접 5인에서 합격자가 되었다.

    강무진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볼 수 없었다.

    면접 전까지 이력서에는 사진과 학벌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진짜 같이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백야 그룹의 계열사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회사는 전부 빼놓았는데, 합격한 곳이 강무진의 회사였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복잡한 속내를 갈무리하듯 표정을 싹 지웠다.

    거울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도 동생마저 무진에게 목줄이 잡힐까 봐 서둘렀다.

    사랑하는 거 아냐고?

    그딴 말에 휘둘리지 않을 거야.

    *** 

    TS 투자운용사 사장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우스꽝스러웠던 시현의 결혼식에서 증인을 섰던 박 실장이 보였다.

    1년 전에는 무진의 학교 후배라고 소개받았는데 막상 직속 상사로 마주하니 기분이 퍽 좋지 않았다.

    빠르게 표정 관리하며 몸을 90도로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처음 출근한 이시현입니다.”

    박 실장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계 절차로 아직은 간단한 일만 하면 되니까 어려움 없을 겁니다.”

    “네.”

    “저쪽에 책상을 마련했고 당분간 시현 씨가 할 업무 관련한 것을 숙지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박 실장을 보며 시현은 맞은편 책상에 앉았다.

    짐이라고는 합격 통지와 이후 사무실이라고 안내받고 가져다 놓은 상자 한 개뿐이었다.

    백야 그룹 일로 해외 출장 중이었던 그가 TS 투자 자산 운용사의 사장이 된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듯 인수 합병이 한두 달 사이에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시현은 무진의 행보가 놀랍기만 했다.

    그가 쳐 놓은 그물에 생각 없이 뛰어들어 잡힌 꼴이니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협박에 무너진 것이지만, 그가 바라는 것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뭐.’

    엮이고 싶지 않아도 법적인 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에게 벗어나는 게 어려웠다.

    ‘사랑하니까 놓아준다는 진부한 얘기도 안 먹히겠지.’

    한 달이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출장을 간 무진이 그리워 몸부림친 걸 생각하니 그저 닥친 상황이 야속할 뿐이었다.

    태연하게 웃으며 박 실장과 인사하는 자신조차도 소름이 돋았다.

    아는 사이니까 사장과 신입 비서의 인사 따위도 없이 사무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시현은 상자를 열고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다정히 불렀던 무진을 잠시 떠올렸다.

    “후유…….”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인형이 되어 주기로 계약해 놓고 도망쳤으니 화가 날 만하지.

    그렇다고 남동생까지 끌어들여 그녀를 옭아맨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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