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시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말했다.
“그냥…….”
말도 안 했는데 듣기 싫은지 그는 다시 몸을 움직여 야릇한 소리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냥? 그따위 말이 이혼 합의서를 던진 것에 해명이 되는 거야?”
집요하게 밀어붙이며 거세게 움직이자 시현은 머리끝까지 짜릿한 감각에 젖어 가고 있었다.
괴롭히는 게 목적인지, 단순한 욕망에 잠자리가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시현이 거부하더라도 무너지게 해서 원하는 것을 가질 남자였다.
헉헉대며 시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 그만해요. 안 하고 싶어요.”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그의 욕망 때문에 몸이 들썩거렸다.
“안 하고 싶으면서 날 놓아줄 생각도 없잖아.”
그가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속삭였다.
무진의 거친 말이 귓가를 간질였다.
“입은 거짓을 말하고 몸은 진실하게 반응하는 건가. 네가 이렇게 열렬히 원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둬.”
끝까지 밀어붙이니 온몸이 다시 다가오는 절정에 비명을 질러 대는 듯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맹렬하게 파고들기만 했다.
시현을 끌어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놓아주지 않겠다고 꽉 붙들었다.
“널 놓아줄 마음 없어. 그러니까 이런 소모전에 날 끌어들이지 마.”
“그럼 언제 놓아줄 건데요?”
힘겹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시현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말장난은 나한테 안 통해. 나하고 몇 달을 살았는데 그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몰라. 난 강무진이라는 남자를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해요.”
“모르면 알아 가면 되잖아. 어려운 것도 아닌데 도망을 쳐?”
턱을 잡은 그의 손을 쳐 냈어도 하나로 연결된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버둥거리는 그녀를 붙들며 무진이 한숨을 작게 내쉬며 물었다.
“우리 결혼에 누가 뭐라고 하던가? 그래서 그래?”
시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자 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누가 뭐라고 했든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진 씨를 신경 쓰지 않아요. 그냥 다 싫어져서…….”
“푸흡.”
그의 참으려는 웃음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시현의 곡선을 따라 잘록한 허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결혼이 싫다고 끝나는 게 아닐 텐데. 그냥 이혼 합의서를 내게 던지면 정리될 줄 알았어?”
“…….”
“싫어졌으면 당당히 앞에서 말하면 될 걸, 갈 데가 없어서 호텔에 있는 건가?”
결혼 자체를 무를 수 없는 지경에 이혼 합의서가 아니면 헤어질 방법이 없잖아.
즉흥적인 결혼인 걸 당신도 알면서 우리 사이에 무엇이 남았다고 이러는 건데.
할 말이 있어도 대놓고 하지 못하니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어려웠다.
사랑하게 될 줄 몰랐기에 분위기에 떠밀려 결혼했지만, 그와 급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버틸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질려서 버리게 될 장난감이 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는 결혼하면서 그녀가 알아야 할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 또한 비슷하게 숨긴 게 있었기에 추궁하지 않고, 싸움을 걸지 않은 채 조용히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내서 다그친단 말인가.
시현은 무진의 물음에 간신히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쉬고 싶어서 호텔에 있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그렇군.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야반도주하듯 짐을 챙겨서 사라져 놓고. 변명이라고 그럴싸하게 하지도 못하네.”
“그만 가요.”
“안 돼. 아직 난 끝을 못 봤거든. 아내의 환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내쫓김을 당하기도 싫어.”
하나로 연결된 채로 말도 참 잘하는 무진을 빤히 바라보며 버둥거려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다시 시현의 턱을 잡고 잔인하게 말했다.
“이걸 원해서 결혼했는데 이혼이 쉽겠나? 아직 강무진의 아내니까 참고 즐겨. 당신도 한 번으로는 만족 못 하잖아.”
잠자리에 환장한 여자처럼 말하면서도 그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혼이 쉽지 않다면서 비꼬아서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참고 즐기라니.
그런 말이 얼마나 모순인지 모르는 걸까?
얄밉게 말하는 그에게 쏘아붙이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을 스스로 탓하고 있었다.
바닥까지 내던져 망가지기 전에 손을 떼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그녀를 미친 듯이 찾으려 다녔다는 뉘앙스로 말할까.
뭐든지 제멋대로 휘두르는 그에게서 벗어날 생각에 시현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가요. 이런 식으로 날 가지려는 거 정말 정떨어지게 싫어요.”
“날 쫓아내려고 막말하지 마. 어울리지 않아.”
시현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아내의 환대는 받고 가야지. 날 만족시킬 수 있지?”
아주 잠깐 숨 돌리듯 몇 마디 주고받고는 그가 다시 그녀를 꿰뚫으며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즉흥적인 결혼 이후 그에게 완전히 적응했는지 반응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야릇하고 음란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지금 네 표정이 날 미치게 해.”
“거짓…… 읏.”
그가 뒤로 물러나나 싶더니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온몸이 맹렬한 자극에 짜릿함으로 떨렸다.
시현은 바들바들 떨며 손을 뻗어 무진의 팔을 꽉 잡았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사실대로 말해.”
거칠게 밀어붙이면서 나직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시현에게 들리지 않았다.
“왜 그딴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군. 우선 회사로 와. 날 엿 먹인 것은 천천히 두고 보지.”
시현은 들썩이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었지만, 점점 아득한 곳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혹여 다시 만나게 되면 태연하게 마주할 거라고 마음먹었는데.
역시나 강무진 앞에서는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강렬한 쾌감에 시현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
어쩌자고 도망을 쳤을까.
그의 할머님 비서라는 분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말했으면 진즉 끝났을지도 모른다.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귀국해서 다른 일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여러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건만, 무진의 말대로 회사에 출근해야 할 거 같았다.
그녀가 취업한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지만, 그는 호텔에 들이닥쳐 욕망을 해결하고 갔다.
호텔에서 격렬하게 몇 시간을 놓아주지 않더니 새벽녘에 사라져 버린 나쁜 놈.
“내가 먼저 도망쳤으니 나쁜 건 난 가.”
조용히 혼잣말하며 정리한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국에 갈 때와 떠날 때 하고 비슷한 처지인 게 여행 가방 하나로 확실해졌다.
호텔에 며칠 더 있어도 되는데 미리 짐을 정리해서 이사할 곳을 찾아봐야 했다.
시현은 가방 옆에 놓인 메모지를 힐끔 보다가 손으로 가져가 갈기갈기 찢었다.
[또 사라져 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어디에 가든 무슨 상관인데!”
괜히 소리 한번 크게 내지르고는 털썩 침대에 앉았다.
돈이 필요해서 강무진이 내민 손을 잡은 계약에 코가 꿰어서 이 모양이 되었다.
제안만 받아들였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즉흥적으로 해 버린 결혼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강무진이 누구인지 알게 된 날은 비참했다.
복잡한 거 없다며 거액을 두고 간 그분의 성의를 무시하면 후환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가 속인 게 분명한데도 시현은 반박은커녕 도망쳤다는 것에 죄인이 되어 버렸다.
“도망치다가 잡히면 다 박살 낼 거니까. 또 해 봐.”
새벽녘에 그가 나직이 그녀의 귀에 속삭인 말을 떠올리자 시현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힘자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숨 막히는 삶을 바라는 게 아닌데, 남자를 잘못 만난 탓이리라.
시현은 원망하고 탓하고 싶은데 그를 사랑하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현은 1년 전, 강무진을 만난 것을 떠올리고 인상을 구겼다.
미국 대학원에서 졸업을 반년 남긴 시기에 일생에서 단 한 번, 호기를 부린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금세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됐어. 취업도 했고 출근 전에 그에게 걸린 건 어떻게 되겠지.”
백야 그룹의 최대 주주이자 승계받을 강무진에게 반기를 들어 봤자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투자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마음 졸였던 것을 생각하니 퍽 나쁘지 않았다.
강무진과 돈 봉투를 주고 간 분의 싸움에서 힘없고 약한 자신이 터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은 세상살이의 진리가 아니던가.
동생이 제대할 때까지만이라도 버틸 수 있기를 바랐다.
“후유…….”
쉴 새 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딩동딩동.
호텔 객실에 벨을 누를 사람이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천천히 문 앞으로 가서 밖을 살폈다.
어제는 강무진이 다녀가더니 체크아웃을 한다는 게 벌써 귀에 들어갔는지 그분의 비서가 왔다.
시현은 밖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문을 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낸 모양입니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더니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는 정 비서를 따라갔다.
자리를 권하지 않아도 여행 가방 옆의 의자에 앉는 비서를 보며 시현은 죄지은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분의 비서는 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옆에 놓인 여행 가방을 힐끔거리며 싸늘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물었다.
“오늘 호텔을 나간다는 것은 완전히 떠나겠다는 건가요?”
“…….”
“혹시 강무진 님께서 한국에 온 걸 알고 버티는 거라면 끝이 좋지 않을 거예요. 그분께서 알아듣게 말씀하셨을 테니 신경 안 써도 되는 거 맞나요?”
시현은 그분이 원하는 말을 해야 할지, 무진이 요구한 것을 들어줘야 할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둘 다 무서운 것은 사실이고 어떻게 보면 양쪽에서 돈을 받은 것이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돈 받고 꺼지라고 했고 한쪽은 애인으로서 잘하기를 바라는 게 다른 점이었다.
비서의 물음에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비서의 가방에서 또다시 봉투가 꺼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