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21화

“엄마는……. 이 사진을 또 여기에 뒀네.”

2층 거실 콘솔 위에 나와 이안의 화동 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사진이 보이지 않도록 액자를 엎어 버렸다.

집에 온 은욱이 이 사진을 본다면 놀려 댈 게 뻔했다.

“한아야! 은욱이 왔다!”

1층에서 엄마가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응!”

나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자, 교복을 입은 은욱이 나를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가 된 은욱은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내 껌딱지로 살고 있다.

너는 질리지도 않냐?

“왔어?”

“응. 어디서 해?”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은욱은 사뭇 긴장한 얼굴이다.

“2층에서. 올라가자.”

은욱은 우리 엄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내 뒤를 따랐다.

2층 거실 한가운데에는 둥그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은욱이 의자 하나를 빼고 앉으며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책과 필기도구를 꺼냈다.

“선생님은 언제 오셔?”

모범생 은욱은 정체 모를 과외 선생님 때문에 긴장한 눈치다.

“곧 온대.”

뭐 그런 거로 긴장을 하는지.

우리는 영재고 입시를 앞두고 집중 과외를 시작할 참이었다.

병아리 같은 은욱이 나를 어미 닭처럼 따라다니던 시절부터, 엄마들끼리도 친해졌다.

우리는 학원을 함께 다니고, 과외를 같이 하고, 가끔은 주말도 같이 보냈다.

“너는 근데 지겹지도 않냐?”

나는 의자를 빼고 앉아서 테이블 위에 엎드리며 물었다.

“뭐가 지겨워?”

순진한 얼굴로 웃는 은욱에게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사래를 칠 때였다.

“한아야! 선생님 오셨네?”

엄마가 과일과 음료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고, 그 뒤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온 과외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따라쟁이 은욱도 나와 비슷한 인사를 그에게 건넸다.

“안녕?”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말투가 묘하게 익숙하다.

엄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내 눈치를 흘끗 보았다.

열여섯의 반항기가 시시때때로 발현되는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엄마에게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왜? 뭐?

엄마는 나의 태도를 지적하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입으로는 웃고 있었다.

“책부터 볼까?”

과외 선생님이 우리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그가 손을 뻗어서 내 책을 집어 가는데, 연한 향수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겼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인데도 심장이 약하게 두근거렸다.

나는 내가 푼 문제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과외 선생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쉼표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 반듯한 이마, 우뚝 솟은 콧대와 쌍꺼풀이 속으로 조금 말려 들어간 기다란 눈까지.

당장 아이돌로 데뷔한다고 해도 손색없을 얼굴이었다.

운동을 많이 했는지 어깨가 무자비하게 넓었고, 그의 손에 들린 두꺼운 문제집이 안쓰러워 보일 만큼 손도 컸다.

내가 과외 선생님의 용모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 은욱이 내 팔꿈치를 툭 쳤다.

아, 왜?

나는 또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그만 봐.

은욱도 입 모양으로만 답했다.

은욱이 뾰족한 눈빛으로 나와 과외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별 참견을 다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이 문제부터 한번 풀어 볼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수학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과외 선생님의 신변에 관한 질문은 둘 다 굳이 하지 않았다.

엄마들이 알아서 좋은 선생님을 구했을 거라고 믿을 뿐이었다.

과외 선생님도 잡담 한 번 하지 않고, 2시간 동안 꼬박 우리에게 수학 과외만 했다.

선생님이 가고 나자, 은욱이 한숨을 몰아쉬며 툴툴거렸다.

“너, 선생님 얼굴 좀 그만 봐!”

“내가 선생님 얼굴을 얼마나 봤다고 그래?”

은욱은 잔뜩 화가 난 것처럼 거칠게 가방을 챙겼다.

대문까지 은욱을 배웅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대며 달아났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아야, 선생님 어땠어?”

엄마가 2층으로 향하는 나를 붙들고 물었다.

“잘 가르쳐.”

“그게 다야?”

조금 놀란 투로 엄마가 물었다.

“응. 뭐가 더 있어야 해?”

엄마가 뭘 바라고 저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는 발끈하고 말았다.

발끈하고 후회하고, 짜증 내고 후회하고, 신경질 부리고 후회하고.

나는 하루에 골백번도 더 후회할 짓을 하는 열여섯이었다.

“아니야. 올라가서 쉬어. 아빠 오시면 저녁 먹을 거니까, 내려오고.”

“어.”

나는 괜히 발을 쿵쿵거리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콘솔 위에 엎어 두었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액자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이안의 모습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너무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이안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부모님을 따라 영국에 간 이안과는 그 후로 연락이 끊겨 버렸다.

한동안 가끔 엄마가 소식을 전해 주곤 했지만, 그마저도 듣지 못한 지 오래다.

그저 내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이안을 아주 많이 좋아했었고, 이안이 떠나서 서러웠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나는 액자를 다시 예쁘게 세워 두고는 방으로 향했다.

***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와 은욱은 나란히 영재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는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함께 합격 사실을 확인한 은욱은 울음을 터뜨렸다.

“너 우냐?”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물었다.

은욱이 교복 셔츠 밑단을 들어 올려서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에 영재고 합격한 거면 나한테 감사해야지!”

은욱이 억울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네가 그냥 일반고 간다고 했으면, 이런 개고생은 안 했을 거 아냐. 너만 붙고, 나는 떨어질까 봐 내가 얼마나…….”

“너 나랑 경쟁하냐? 나만 붙고, 너는 떨어질까 봐 그렇게 걱정했어?”

나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는 은욱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부터 키가 쑥쑥 커 버려서 이제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뭐, 경쟁? 하아……. 됐다.”

은욱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다 같이 저녁 먹는댔어. 그때 보자.”

“야! 뭔지 말해 주고 가! 그런 걱정은 왜 하고 살아? 경쟁이 아니면 뭔데?”

나는 앞서 걷는 은욱을 향해 소리쳤다. 플라타너스 근처에서는 매미 소리가 울렸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려고 했다.

무더위 속에서 슬쩍 짜증이 나려는 순간이었다.

“너랑 같은 학교 다니고 싶으니까!”

은욱이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은욱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는 며칠 동안 이어졌다. 은욱의 부모와 함께 밥을 먹고, 우리 식구끼리 먹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먹고, 이모와 먹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넘치는 사랑이 감격스러우면서도, 나에게 쏠리는 관심에는 또 짜증이 났다.

모순된 감정을 이어 나가는 사춘기의 삶이란 참 고달팠다.

또래 친구들은 누구한테 고백했네, 사귀네, 헤어졌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럴 시간에 책이나 한 자 더 봐라.

나는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굴며, 첫사랑을 유치한 감정놀음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한아야. 선생님 와 계셔. 얼른 올라가 봐.”

잠시 중단되었던 수학 과외가 영재고 수업 대비를 위해 재개되었다.

“은욱이 오면 올라오라고 해.”

“오늘 은욱이는 치과 가야 해서 못 온대.”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2층으로 향했다.

“안녕하…….”

인사를 건네려다 말고, 계단참에 우뚝 멈춰 섰다.

과외 선생님이 콘솔 앞에 서서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가우디 건축물을 연상케하는 액자를 집어 들고는 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 사진 엎어 놨어야 했는데!

미간을 팍 찡그렸을 때였다.

“이게 사진으로 남아 있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숨을 죽였다.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2층 거실 창을 통해 초가을의 햇살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 보는 집 안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내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가 은욱과 함께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련하고 포근한 눈동자가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가슴속에 꼭꼭 묻어 두고, 절대 나오지 말라고 다그쳤던 감정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이안, 오빠?”

목소리가 이리저리 떨렸다. 그가 약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진짜 이제 알아본 거야?”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굳었다.

“얼른 문제집 들고 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업을 종용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가 시키는 대로 문제집을 들고 수업에 임했다.

눈으로 수학 문제를 좇고, 손으로 풀이 과정을 적고는 있었지만, 가슴이 끊임없이 울렁거려서 죽을 맛이었다.

과외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가 묻는 말에 고갯짓으로만 답했다.

수업을 마친 그는 여느 때처럼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는 집을 나섰다.

그가 떠난 2층 거실이 휑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몹시도 가라앉아 버렸다.

충동적으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나무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한아, 어디 가?”

“엄마 나 잠깐만!”

엄마에게 대충 소리를 질러 대고는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멀지 않은 공원 앞에서 그가 걷고 있었다.

“잠시만.”

나는 차오른 숨을 고르며 그를 불러세웠다.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한국엔 언제 왔어요? 왜 왔어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군대 가려고.”

“군대 갔다가 다시 영국 가요?”

그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 열심히 공부할게요! 지금보다 더 예뻐질게요! 그러니까 다른 언니들 만나고 그러지 마요.”

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나 진지해요!”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대꾸했다.

“은욱이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다음 주에 보자.”

어릴 적 첫사랑 최이안이 돌아왔다.

소꿉친구 고은욱이 나를 좋아한다.

열여섯 민한아의 인생은 새로운 페이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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