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20화

    “누나는 이제 나랑 같이 유치원 안 다니는 거야?”

    한율이 유치원 가방을 메고 서서 울먹거렸다.

    “누나는 이제 초등학생이야. 한율이도 2년 후에는 누나랑 같이 초등학교 다닐 수 있어. 그러니까 유치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잘 먹고, 쑥쑥 크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첫 등교를 앞둔 지성인답게 동생 한율을 다독여 주었다.

    “나도 얼른 커서 학교 가야지!”

    한율은 전투적인 눈빛을 빛내며 유치원 셔틀에 올랐다.

    초등학교 입학식에는 유난스럽게도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증조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와 아빠를 비롯해 이모까지 회사에 반차를 내고 왔다고 했다.

    대체 초등학교 입학식이 뭐라고, 민한아는 이런 지대한 관심과 넘치는 사랑을 받는 건지……. 정말 피곤하다.

    이건 다 내가 사랑스럽고 귀여운 탓이니, 감당하는 수밖에.

    “한아야, 우리 한아가 벌써 이렇게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다니! 이모가 업어 키운 보람이 있어!”

    맹세하건대 나는 이모의 등에 업혀 본 기억이 없다.

    “이모는 나 업어 준 적 없잖아.”

    “무슨 소리야? 이모가 너를 얼마나 자주 업어 줬는데? 그땐 네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 하는 거지!”

    갓난아기를 눕혀 놓고, 이모부와 뽀뽀하던 이모는 기억에 있어도…… 나를 업어 줬다고 주장하는 이모는 대체 누구의 이모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한아 진짜 잘 컸다! 기특해!”

    이모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내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댔다.

    1학년 1반 교실 앞에 도착하자, 감격에 겨운 여섯 쌍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엄마의 눈시울은 오늘따라 유난히 붉었다.

    “우리 한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웅.”

    나는 서늘하고 의젓하게 대꾸하고는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학교였다.

    아유, 시끄러워.

    교실이 낯설어 울음을 터뜨린 아이, 혼자서 소리를 질러 대며 떠드는 아이, 책상 밑에 들어가서 몸을 웅크리고 키득거리는 아이까지.

    솜사탕처럼 달콤한 시절은 이제 물 건너갔다는 소리다.

    부모의 사랑에 감동하고, 다시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만 알았지,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를 다시 다녀야 한다는 계산은 하지 못했다.

    아니, 계산했다고 하더라도, 카오스에 가까운 초등학교 저학년의 교실은 다시 겪어도 낯설었다.

    “1학년 1반 친구들, 안녕하세요? 나는 여러분은 담임 선생님이에요.”

    교육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하던 엄마는 나를 사립초등학교에 집어넣었다.

    있는 집 애들이 모였다고 해도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냥 동네 공립초등학교에 다녔어도 좋았을 텐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소개하기 위해서, 6학년 학생이 우리 교실을 찾아왔어요. 모두 박수로 맞아 볼까요?”

    심드렁하게 손뼉을 치며 교실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그림처럼 멋진 최이안이 걸어 들어왔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시며 굳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6학년 1반 최이안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우리 초등학교를 소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안이 교실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멍하니 굳어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듯 입술 끝에 힘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학부모들이 옹기종기 서 있는 교실 창가로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엄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뛰어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니겠다고 떼를 부렸던 기억이 났다.

    엄마는 그래도 이 학교에 다니는 게 좋겠다며 엄정하게 굴었었다.

    나는 엄마와 닮은 미소를 머금으며 엄지를 슬쩍 추켜세웠다.

    엄마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학교는 120년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로 학교가 최초로 설립된 시기는…….”

    이안은 막힘없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나는 얼른 늠름한 모습의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최초가 뭐야?”

    아까 책상 밑에 기어들어 가 있던 남자애가 내 팔뚝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맨 처음이라는 뜻이야.”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듯 대꾸해 주었다.

    “왜 그렇게 작게 말해?”

    그럴 몰라서 묻냐?

    나도 모르게 뾰족한 눈빛으로 아이를 쏘아본 순간이었다.

    천사처럼 말간 얼굴의 남자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아름답다는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훌륭한 외양이었다.

    둥그스름하고 하얀 얼굴과 커다랗고 검은 눈의 조화가 뾰족해졌던 마음을 둥그스름하게 다듬어 대고 있었다.

    “저 오빠가 말하고 있잖아. 귀를 기울여야지.”

    “아아.”

    천둥벌거숭이처럼 굴던 아이가 순순히 대꾸하고는 얼른 칠판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밑에 들어갈 만큼 부산스럽기는 했지만, 말이 아예 통하지 않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설립은 무슨 말이야?”

    “뭘 세운다는 뜻이야. 여기선 학교가 만들어졌다는 말이고.”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고은욱이야. 너는?”

    아이가 아까와는 달리 눈치를 살피듯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나는 민한아.”

    “민한아……. 좋은 이름 같다.”

    순수한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아이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욱과 눈이 마주쳤다. 이안은 앞에서 학교에 관한 설명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교실을 울리는 가운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우리 친구 할래?”

    은욱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굳이 그런 걸 묻지 않아도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입학식 날 친구를 하자며 말을 걸어 준 은욱이 꽤 마음에 들었다.

    “웅!”

    나는 가족에게 하는 것처럼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은욱과의 첫 만남은 퍽 인상적이었다.

    ***

    같은 학교에 다니니까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학년과 6학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 전부 달라서 학교에서는 최이안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한아야! 우리 점심때 도서관 가서 책 같이 읽을까?”

    대신 고은욱이라는 껌딱지를 얻었다.

    은욱은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첫날부터 책상 밑에 기어들어 가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했듯, 은욱은 꽤 장난기가 심한 아이였다.

    그런 은욱이 내가 하는 말이라면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하루는 은욱의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서 나를 붙들고 고맙다며 울먹거렸을 정도다.

    은욱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유치원을 다섯 번이나 옮겼다고 했다.

    제어가 되지 않는 아이여서 막판에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홈 스쿨링을 했다고.

    초등학교에 들여보내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나를 만나고 은욱이 달라졌더라는 이야기를 은욱의 엄마가 우리 엄마에게 했고, 우리 엄마가 그걸 아빠에게 전하는 도중에 내가 엿들은 것이다.

    은욱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가자. 도서관.”

    은욱은 나와 함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모르는 단어는 전부 풀어서 설명해 주니까.

    점심을 먹고 은욱과 함께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하필 오늘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6학년 학생이 최이안이다.

    “안녕하세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한아 왔네. 친구랑 책 보려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최이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가 골라 줄까?”

    “웅!”

    최이안은 또래 중에서도 키가 무척 큰 편이었다.

    벌써 170cm 가까운 이안은 어른처럼 보였다.

    “어떤 책 읽고 싶어?”

    “오빠가 골라 주는 책!”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우리 고전소설이 있는 서가로 나를 이끌었다.

    이안이 골라 준 책은 ‘홍계월전’이었다.

    나는 은욱과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홍계월은 여자로 태어났음에도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장군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계월이 헤어졌던 부모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읽고 있을 때였다.

    “이안아. 너 영국 간다며?”

    눈을 글자를 좇고 있었지만, 귀는 도서관 데스크를 향해 쫑긋 곤두섰다.

    “어.”

    이안의 친구로 보이는 6학년 남자애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럼 이제 한국에 안 오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고. 너 이번에 영국 가면 언제 올지 모른다고. 너희 아빠가 유럽지사 총괄 대표로 가시는 거라던데. 좋겠다! 영국!”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몰라. 나도. 가 봐야 알아.”

    이안이 내 시선을 피하며 친구에게 대꾸했다.

    “나 화장실!”

    책을 함께 읽던 은욱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나는 책에 집중하는 척 얼른 고개를 돌렸다.

    홍계월이 부모와 만나는 장면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아야.”

    목이 메서 이안의 부름에 대꾸할 수 없었다. 은욱이 앉아 있던 자리에 이안이 앉았다.

    “한아야?”

    고집스럽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금 얼굴을 마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네가 좋아하는 책 많이 읽고. 씩씩하게 지내야 해.”

    마지막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 순간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나는 이안을 한 번쯤 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서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로 달아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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