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9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모와 이모부는 신혼집으로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이모의 신혼집은 한강 변에 자리한 신축 아파트였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가구, 바닥에는 번쩍거리는 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마치 미술관처럼 생활용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린아이인 나와 한율에게는 몹시 부담스러운 공간이었다.
“어서 와! 한아랑 한율이, 이모가 너무 보고 싶었어! 특히 한아!”
이모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음흉하게 웃어 댔다.
“신혼집 꾸미느라 고생 많았겠다.”
엄마가 집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는 이런 좋은 집에 살고 싶지 않은 걸까?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다는 우리 집은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책들로 가득했다.
나는 우리 집의 포근한 냄새와 오래된 감촉, 따스한 색감을 사랑했다.
하지만 돈이 많으면서도 이런 좋은 아파트를 마다하고 오래된 주택에 사는 엄마가 조금은 의아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이모의 집 안을 둘러보는 엄마를 유심히 관찰했다.
엄마의 얼굴에 일말의 부러운 감정이라도 드러난다면, 나는 아빠에게 집을 옮기자고 강력히 주장해 볼 생각이었다.
“애 하나 낳아 봐라. 여기 무지개색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다.”
엄마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우리는 애 낳아도 이렇게 무채색으로 유지하면서 살 거야.”
나도 이모를 바라보며 엄마와 닮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책이 많을수록 육아가 쉬워진다는 것을 신혼인 이모가 알 턱이 없지.
“어? 우리 한아 표정이 왜 이러지? 이모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대체 무슨 비밀을 발설하겠다고 6세 여아를 협박하시는지.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언니, 형부! 우리 결혼식 스냅 앨범 나왔거든! 이것부터 보자!”
점심은 밖에서 먹고 들어온 참이었고, 이모네 집에서는 간단하게 차와 과일만 먹기로 되어 있었다.
차와 과일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들이 분주하게 준비 중인 덕에, 이모는 발랄한 새댁의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결혼식 앨범을 들고 나타났다.
이모부는 이모의 곁에 서서 ‘내가 하는 건 다 옳아’라는 식의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 좀 봐. 나 진짜 이거 보고 기절할 뻔!”
자기애가 철철 넘치는 이모는 본인 결혼식이 기절할 정도로 좋은가 보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허! 저, 저!”
아빠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어머! 이게 언제야? 화동 대기할 때?”
엄마가 고개를 숙여서 테이블 위에 놓인 앨범에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응. 그때 우리 앞에 한아랑 그 남자애 서 있고. 나랑 아빠랑 신부 입장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
나와 이안은 총 두 번 웨딩로드에 올랐다.
신부 입장 때 한 번, 두 사람이 부부로서 행진할 때 한 번.
“그때는 너무 정신없어서 이 꼬맹이들이 뭐 하고 있는지 몰랐거든. 근데 얘 봐! 세상에 한아 이마에 뽀뽀하고 있는 게 딱 찍혔잖아.”
뭐라고?
소파에 앉아서 발끝을 달랑거리고 있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앨범으로 달려들었다.
외할아버지와 이모가 긴장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 아랫부분, 내 이마에 이안이 입을 맞추는 장면이 포착되어 있었다.
“한아야, 이거 뭐야아? 이안 오빠랑 그때 뭐 했어어?”
이모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나에게 물었다.
“몰라.”
나는 새치름하게 대답하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앨범에서 저 부분만 오려서 갖고 싶었다.
이모한테 결혼 앨범을 찢어서 나눠 갖자는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시시각각 얼굴이 어두워지는 아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엄마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신혼여행은 어땠어? 구경은 잘 했어?”
“응. 스페인 너무 좋더라. 우리 어려서 갔을 때랑은 느낌이 또 다르더라고. 한율이 좀 더 크면, 우리 다 같이 가자, 언니!”
엄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관광지 구경할 시간이 있었어?”
아빠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요, 형부. 관광지 둘러볼 시간이 왜 없어요?”
신혼인 이모와 이모부를 놀리는 질문 같았다.
“우리는 신혼여행에서 어디 둘러볼 겨를이 없었는데.”
“아우, 진짜 형부는 가끔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장난치더라.”
이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내내 잠자코 있던 이모부가 끼어들었다.
“할 건 다 하고 왔습니다.”
한율은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중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 척 과일이 먹고 싶다고 떼를 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나와 이안의 뽀뽀 사건은 잊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모네 집을 나서는 길, 이모가 나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스페인에서 이모가 사 온 선물. 한아 혼자 있을 때 풀어 봐야 해!”
이모는 눈을 찡긋거리며 귀엽게 웃었다.
이모의 눈웃음이 하도 사특해서 종이봉투 안에 악령이라도 깃든 것은 아닐까, 겁이 날 정도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한아야, 아빠랑 퍼즐 맞추기 할까?”
새삼스럽게 100조각 퍼즐 상자를 들고 말을 거는 아빠였다.
100조각 퍼즐을 맞추면서 잔소리를 하시겠다는 뜻인가?
“으응.”
하지만 아빠의 다정한 기세에 눌린 나는 얼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아빠와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서 작은 상자에 담긴 퍼즐 조각을 와르르 쏟았다.
“한아야. 이안 오빠가 좋아?”
나는 말을 아끼며 가장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퍼즐만 골라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대답을 종용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한아야. 뭐든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이면 싫다고 해야 해. 좋아하는 감정으로 정당화되는 말이나 행동은 없는 거야.”
“알아요.”
나는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퍼즐의 한쪽 모서리를 이어 맞추었다.
아빠는 6세 딸아이를 데리고 성교육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아빠의 훈육 방식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강압적인 대화가 아닌, 놀이하듯 자연스럽게 부녀간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점도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한아 자신이야. 만약에 누가…….”
하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빠의 성교육을 견딜 수 있는 딸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아빠!”
나는 퍼즐 조각 대여섯 개를 손에 들고 아빠를 마주 보았다.
“응?”
“나 궁금한 게 있어!”
“응, 뭔데?”
아빠가 무슨 대답이든 해 줄 것처럼 자상하게 되물었다.
“이모랑 이모부는 신혼여행에서 관광지 구경 많이 했다고 했잖아. 근데 엄마, 아빠는 왜 구경 못 했어?”
아빠가 당황한 듯 입을 슬쩍 벌렸다.
“엄마 아빠는 신혼여행 가서 뭐 했어?”
우리 아빠 민서후 씨는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딸아이의 기습적인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이모랑 이모부는 스페인으로 갔다던데?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다 왔어?”
아빠가 그제야 대답할 만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응, 엄마랑 아빠는 제주도.”
“아, 제주도는 구경할 게 없었어? 지난번에 나랑 한율이랑 할머니랑 같이 갔을 때는 구경 많이 했잖아.”
“응, 제주도도 구경할 거 많지.”
아빠는 점점 내가 파놓은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근데 엄마랑 가서는 왜 구경 안 했어? 구경할 시간이 없었어?”
“어, 어! 시간이 없었어.”
엉뚱한 떡밥을 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빠를 어쩌면 좋을까.
“뭐 하느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의 고요한 대치가 긴장감 넘치게 이어졌다.
“한아야! 이제 자야지! 양치질해!”
한율을 먼저 재운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어, 한아야! 아빠랑 얼른 양치질하러 가자!”
아빠가 식탁 의자에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찰나 엄마와 눈이 마주친 아빠가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엄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소리 없는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
아버지, 오늘은 소녀가 한 수 물러 드렸사옵니다.
다음 대국은 신중히 청하시옵소서!
나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빠가 너무 귀여워서 굵직하고 단단한 목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양치질을 마치고 나오자, 이번에는 엄마가 나를 불러 앉혔다.
아빠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이모가 준 선물부터 같이 풀어 볼까?”
이모가 혼자 풀어 보라고 했는데……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종이봉투를 주섬주섬 열었다.
봉투 안에는 가우디 건축물을 연상케 하는 액자가 들어 있었고, 액자 안에는 나와 이안의 사진이 곱게 자리했다.
“이모가 예쁜 추억을 한아한테 선물했구나.”
“응!”
나는 환히 웃으며 엄마를 마주 보았다.
“한아야.”
“응!”
“한아가 조금 더 컸을 때 이야기해도 되지만, 우리 한아는 엄마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해 주니까 말하는 거야.”
나는 믿음직스러운 딸의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사랑이 많은 우리 한아가 세상을 사랑으로만 바라보다가 상처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땐 네 곁에 엄마가 있다는 걸 꼭 기억해야 해.”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이의 순진한 애정을 오롯이 이해해 주는 엄마가 너무 고마웠다.
“엄마, 사랑해요.”
이전 삶에서 나에게는 없던 단어가 사랑이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넘치는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