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8화

이안이 나와 화동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노란 원피스가 시끄럽게 맴돌며 신경을 긁어 댔다.

“엄마, 나도 피아노 제대로 배울래!”

“제대로?”

엄마는 ‘제대로’에 의미를 부여하며 웃었다.

지금껏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되물음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피아노를 제대로 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내 외투 단추를 채워 주는 엄마의 검고 맑은 눈을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보았다.

“이안 오빠 선생님한테 배우게 해 줘. 나도 다음에는 예쁜 드레스 입고 연주회 할 거야!”

절치부심한 듯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고,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다.

“우리 딸이 큰 결심을 했네? 엄마가 그 선생님께 한번 연락해 볼게.”

아빠가 출근 준비를 위해 현관으로 나오며, 모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피아노까지 개인 교습 받으면, 사교육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유치원생이 뛰어놀 시간이 있어야지.”

아빠가 구두를 신다가 말고 나를 흘끗 보았다.

“어린이에게 놀 시간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아빠의 말도 맞아. 하지만 나는 보통 어린이가 아니야. 나는 야망 있는 어린이니까, 피아노도 제대로 배우고 싶어.”

구두를 신은 아빠가 주저앉듯 몸을 굽혔다.

“뭐? 무슨 어린이?”

기가 막혀서 웃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야망 있는 어린이.”

아빠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우리 한아 야망이 무슨 뜻인지 알아?”

“큰 꿈을 품고 이루고 싶다는 뜻이지!”

나는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고, 아빠는 당찬 대답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여보, 얘 요즘 무슨 책 읽어?”

자식 사랑이 지대하신 아빠의 걱정이 또 늘어지려고 시동을 걸었다.

여기서 딸내미가 또래보다 비정상적으로 앞서 나가는 것은 아니니, 성장과 결부되는 사회성에 관한 고민은 넣어 두라는 말을 해야 할까?

“그냥 동화책 봐. 요즘 애들 미디어 접할 기회가 많아서, 말이 빠른 편이야. 우리 때랑은 달라.”

엄마가 나의 역성을 들며, 아빠의 우려를 종식시켰다.

“갈까? 우리 딸?”

아름드리나무처럼 듬직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아빠가 나를 따뜻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응!”

시원하고 쾌적한 나무 그늘 같은 아빠와 따뜻하고 풍요로운 햇살 같은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민한아는 행복한 6세의 삶을 영위해 나갔다.

노란 드레스가 내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이모의 결혼식 날이었다.

“누나 엣뻐!”

제 누나라면 일단 기를 쓰고 달려들고 보는 한율조차도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고 감탄의 말을 쏟아 냈다.

“고마워!”

환상적인 드레스 핏에 압도당한 나머지 나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율에게 여왕처럼 싱긋 웃어 주었다.

“우리 손녀딸,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뻐요?”

손녀딸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마다치 않는 재벌가 안주인, 외할머니가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할머니! 할머니 닮아서 예뻐요!”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도 잘해?”

“할머니 닮아서!”

막내딸이 결혼하는 날, 적적한 외할머니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서 나는 아양을 떨며 방긋방긋 웃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이 어떤지 울적해 보인다.

“너는 나중에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어떻게 결혼시킬래?”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예쁜 걸 누구한테 보낸다니.”

애틋한 손길이 내 볼을 보드랍게 쓸어내렸다. 막내딸을 향한 아쉬움이 손녀딸인 나에게로 전가된 듯했다.

“나는 할머니, 이안 오빠하고 결혼할 거야. 이안 오빠하고 결혼시켜 줘!”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어린아이의 당돌함이 특효약이다.

“어머! 얘 지금 뭐라는 거야? 이안 오빠가 대체 누군데?”

이리저리 날뛰려는 한율을 붙잡고 옥신각신하던 엄마가 외할머니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응, 오늘 한아랑 같이 화동 하는 남자애 있어. 대학 선배 아들이야.”

외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발칙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녀석 이름이 이안이야?”

“웅! 이안 오빠 잘생겼어! 피아노도 잘 치고, 공부도 잘해!”

“할미가 오늘 한번 봐야겠네! 어떤 녀석이 우리 손녀딸 정신을 쏙 빼 놨는지!”

막내딸을 결혼시킨다는 아쉬운 마음이 손녀딸의 재롱에 희석된 듯, 외할머니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엄마, 근데 이안 오빠는 왜 안 와?”

엄마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수많은 인파 속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왔네.”

이안이 왔다는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검은색 슈트를 입은 이안이 제 엄마의 손을 붙들고 서 있었다.

“안녕?”

웬일인지 이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은색 실크 슈트에 보우 타이를 맨 이안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근사했다.

“한아야, 이안이가 인사하잖아. 너도 인사해야지.”

새삼스럽게 수줍어진 나는 엄마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안녕.”

조그맣게 인사를 건넸을 때였다.

“이안아.”

이안 엄마가 이안을 부드럽게 부르며 눈치를 주는 듯했다.

이안이 쭈뼛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서는 입을 뗐다.

“너 오늘 예쁘다, 한아야.”

가슴속에서 열다섯 민하나가 오두방정을 떨며 비명을 질러 댔다.

둘이 지금 뭐 함? 오늘 너희 둘이 결혼하냐?

누가 보면 얼굴만 보고 결혼하는 새 신부, 새신랑인 줄 알겠다!

“한아야, 이안이가 예쁘다고 하잖아.”

엄마가 어물쩍거리는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어, 고마워. 오빠.”

강아지풀이 말끝에 달라붙어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듯 간지러웠다.

“네가 이안이구나?”

우리 엄마와 이안 엄마, 나와 이안의 동화 같은 만남에 빌런처럼 끼어든 사람은 우리 아빠였다.

아빠가 무릎을 굽히며 이안에게 시선을 맞췄다.

“반가워. 나는 한아 아빠란다. 세상에서 한아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지.”

구차하십니다, 아버지!

나는 하마터면 마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탄할 뻔했다.

“안녕하세요, 최이안입니다.”

아빠가 내뱉은 말에서 폴폴 풍기는 뉘앙스를 인지하지 못한 이안이 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늘 우리 한아랑 좋은 추억을 만들게 되겠구나.”

과하게 친절한 말투다.

“추억을 만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보다 이안이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어머, 뭐야. 민서후 씨, 벌써 딸 가진 유세야? 우리 이안이도 내가 엄청 귀하게 키우고 있거든?”

이안 엄마가 장난스럽게 아빠를 나무라며 웃었다.

“그저 이안이와 첫인사를 나누었을 뿐이고, 별다른 뜻은 없었…….”

아빠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서후 씨가 한아한테는 좀 각별해. 언니가 이해해요.”

아빠의 역성을 들고 나선 사람은 하객과 인사를 나누기 바빴던 외할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딸한테 각별한 건 당연한 거지. 우리 민 서방 나무랄 거 하나도 없다.”

오늘 막내딸을 결혼시키는 외할아버지는 아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입장이었다.

곧 예식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장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각자의 역할을 해내느라 바빴고, 나와 이안은 호텔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화동이 입장하는 자리에 섰다.

웨딩 로드를 늠름하게 걸어 들어가는 이모부는 그 어느 때보다 멋있었다.

세월이 참 무상하구나!

여드름 자국이 듬성듬성 남아 있던 까까머리 군인 문선준이 근사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오늘만큼은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이모부와 우리 아빠를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이모부 멋지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작은 손을 이안이 꼭 붙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네 이모부는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니까, 당연히 멋지지.”

요놈 봐라?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안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천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이안의 눈동자가 새삼 이글거렸다.

아유, 너 질투하니?

오늘 우리 이모랑 결혼하는 이모부를 질투해서 얻다가 쓰게?

얻다가 쓰긴 민한아 심장 터뜨리는 데 쓰지.

어두운 대기 공간, 단둘이 손을 꼭 붙잡은 두근거리는 순간, 나는 거침없이 고백했다.

“그래도 세상에서 오빠가 제일 멋있어.”

“너희 아빠는?”

아까 인사를 건네는 아빠의 뉘앙스를 파악하지 못했을 거라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빠는 아빠고.”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말이 있는 건가 보다.

“진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이안이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웅.”

고개까지 거세게 끄덕이며 대답했을 때였다.

이안이 한 걸음 다가오는가 싶더니, 앞머리 위로 입술이 보드랍게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혀 왔다.

“오늘 여기서 네가 제일 예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벅찬 울음이 터질 것도 같았고, 바닥을 구르며 웃어 젖히고도 싶었다.

“신부 입장!”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이안은 내 손을 잡고 웨딩 로드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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