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7화

“이안이가 올해 열한 살이라고 했나?”

웬일인지 아빠가 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응, 한아보다 다섯 살 많으니까.”

엄마는 한율과 퍼즐을 다 맞췄는지 손뼉을 쳐 대며 대꾸했다.

“그럼, 일단 이안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봐.”

아빠의 수가 빤히 읽혔다.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은 중2 못지않은 반항기를 자랑하는 나이였다.

그러니 이안 쪽에서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는 눈치였다.

“고맙습니다! 사랑해, 아빠!”

나는 귀염을 떨며 아빠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 한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나는 엄마, 아빠, 한율이, 증조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 이안 오빠!”

마치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듯 줄줄이 읊자 아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묻는다.

“남자 중에서는 누가 제일 좋아?”

“압빠!”

6세 딸내미의 립 서비스에 민서후 씨의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그럼 아빠는 여자 중에 누가 제일 좋은지 말해 달라는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말기로 하자.

보나 마나 아빠는 엄마와 나를 두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가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지는 아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금물이다.

“평생 아빠만 제일 좋아해야 해.”

아빠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간지럼을 태우며 말했다.

아이고, 아버지. 그게 지금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이안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오랜만에 이안을 만나러 간 장소는 광화문 근처에 자리한 소규모 공연장이었다.

“이안 오빠가 피아노를 연습을 엄청 열심히 했대.”

엄마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말해 볼 생각이었는데.

오늘 이안은 피아노 연주회를 위해 수많은 관객 앞에 설 예정이다.

이안의 연주가 기대되기도 하고,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

연주가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으려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발표를 위해 우리 친구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아낌없는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안을 포함한 여러 아이를 가르친다는 피아니스트가 먼저 무대에 나와서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엄마는 내가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집에 들였지만, 나는 피아노 연습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무거운 건반을 누르는 게 너무 고됐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연노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프로그램북을 보던 엄마가 중얼거렸다.

“얘는 우리 한아랑 동갑이네.”

그럴 때가 있다. 엄마는 아무 뜻 없이 나와 나이가 같다고 말했을 뿐인데, 뜻 모를 경쟁의식이 발동해서 비뚤어지고 싶은 순간 말이다.

나는 신경이 거칠고 예민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나와 동갑이라는 여자애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허? 꽤 하네?

리스트가 작곡했다는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는 아이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연주를 마친 아이는 관객의 박수를 받고는 쑥스러운지 무대 뒤로 뽀르르 달려나갔다.

귀여운데…… 이상하게 거슬리네?

나는 엄마가 ‘한아와 동갑’이라고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지루한 연주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엄마, 이안 오빠는 언제 나와?”

“응, 이안이는 제일 마지막에 나와.”

좀이 쑤셔서 앉아 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자꾸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만 했다.

의자 위에서 몸을 거의 무너뜨린 채로 널브러져 있을 무렵, 무대 위에 이안이 나타났다.

“이안 오빠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엄마에게 알은체했다.

그런데 이안이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관객석을 흘끗거렸다.

내가 왔어! 내가 왔다고!

마음 같아서는 손이라도 크게 흔들어 주고 싶었다.

턱시도를 차려입고 보우 타이를 맨 이안은 왕자님 그 자체였다.

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이안이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안이 연주하는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다.

묵직하고 감미로운 도입부를 지나서 기습적으로 기교를 쏟아부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이안은 완전히 연주에 몰입한 것처럼 보였다.

와, 진짜 잘한다.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안의 삶이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아이의 곁을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단순히 이안의 고독함을 달래 주기 위해서 끌리는 걸까?

나는 어린아이답게 이안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을 드러내곤 했지만,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겨를은 없었다.

어른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이안을 좋아한다는 소리도 했지만, 그건 이안을 만나기 위한 연막이었다.

연막 좋아하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질 뻔했다.

6세 민한아는 11세 최이안을 만날 때마다 반하고 있었다.

이전 생과는 상관없이, 이번 생에서 새롭게 피어난 감정이었다.

열다섯 민하나로 살았던 궤적이 무색하게, 열하나 남자애한테 마음을 빼앗기다니.

연주회가 모두 끝나고 나서, 나와 이안은 공연장 로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빠!”

나는 한달음에 이안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빠 진짜 잘하더라!”

평소처럼 이안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웃었다.

“어, 고마워.”

그런데 이안의 반응이 평소답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은 탓일까?

이안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나에게 시선조차 건네지 않았다.

“오빠, 무슨…….”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이안 오빠!”

등 뒤에서 날카롭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둣발 소리가 탁탁탁 이어졌고, 아까 노란 원피스를 입고 리스트의 곡을 연주하던 여자애가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오빠, 실수 없이 진짜 잘하더라. 나는 긴장해서 페달을 너무 세게 밟았는데.”

“무대에 서면 긴장할 수 있지.”

나는 모르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였다.

“이따 선생님하고 저녁 먹는 레스토랑에 올 거지?”

“응, 부모님하고 같이 갈 거야.”

이 말은 나와 이안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는 글렀다는 뜻이다.

“나도 부모님하고 같이 가려고.”

여자애가 살랑살랑 몸을 흔들 때마다 머리핀 위에 앉은 나비 장식이 예쁘게 흔들렸다.

최이안! 대답해! 나야, 저 나비야?

나는 괜히 서러워지려고 해서 잠시 숨을 참아야만 했다.

“근데 얘는 누구야?”

여자애가 나를 흘끗 보며 물었다.

“응, 동생.”

하마터면 나는 열다섯 민하나가 널리 배우고 익힌 쌍욕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동생? 동새앵? 내가 왜 그냥 동생이야?

“아, 그렇구나. 오빠 이따 봐! 이따 꼭 내 옆에 앉아야 해!”

여자애의 엄마가 부르는지, 자기 할 말을 시끄럽게 쏟아 낸 여자애가 쏜살같이 달아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남색 원피스와 남색 구두가 오늘따라 더 칙칙해 보였다.

나도 노란색 입을걸.

“너는 뭐?”

이안이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응?”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금세 마음이 풀린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너 할 말 있었던 거 아냐?”

“응. 우리 이모가 결혼하거든. 근데 화동이 필요하대. 내가 드레스 입고 꽃을 뿌릴 건데……. 오빠도 같이할 수 있어?”

이안만 만나게 해주면 어떻게든 설득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피아노를 잘 치는 노란 드레스 때문에 주눅이 든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묻고 있었다.

“화동?”

“어.”

“결혼식 때 신랑 신부 앞에서 걸어가는 애들?”

“어.”

이안이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생각 좀 해 보고.”

이안다운 대답이었다.

단숨에 거절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근데 너 왜 울어?”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냐.”

나는 이안의 손을 뿌리치고는 이안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자, 놀란 엄마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엄마, 집에 가자. 나 너무 피곤해. 여기 사람이 너무 많아.”

복잡한 마음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우리 한아 피곤하구나. 공연장에서 2시간 가까이 견뎠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이안 엄마가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나와 동갑인 여자애는 연주까지 했는데도.

기분이 더더욱 가라앉아 버렸다.

그래도 이안의 부모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이안에게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이안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엄마의 차에 오른 순간, 서러워서 울음이 폭발했다.

“한아야, 왜 울어?”

“너무 힘들어서.”

분명 열다섯의 기억이 있는데도, 6세 여아의 감정이 감당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결국, 카시트에 앉아서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한아야. 일어나 볼래?”

눈을 떠 보니, 패밀리 침대 위였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침대 위에 앉았다.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깨운 거라고 생각했다.

“이안 오빠가 한아한테 전화를 했네. 받아 봐.”

엄마가 내 앞에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나는 손등으로 얼른 눈두덩이를 비비고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이안이.

“응.”

아까의 서러운 기분이 되살아나면서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 그거 할게. 화동.

“진짜?”

- 응. 그리고.

이안이 뜸을 들였다. 나는 긴장을 억누르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나 그 여자애 옆에 안 앉았어. 끊는다.

내 심장 박동도 끊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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