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6화

두어 달에 한 번 겨우 이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안의 엄마, 아빠도 워낙에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또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이안을 입양했다던 이안 엄마는 아이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특히 교육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서 이안은 주말에도 승마며, 골프, 펜싱 등을 배우러 다니느라 바빴다.

“누구랑 뭘 하고 싶다고?”

이모가 두 손을 곱게 포개어서 식탁 위에 올리고는 그 위에 턱을 괴고 물었다.

“이모 결혼식 때 나도 드레스 입고 꽃 뿌리는 거.”

나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누구라앙?”

결혼하는 건 이모인데, 왜 내가 더 수줍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이안 오빠랑.”

이모가 엄마를 흘끗거렸다. 엄마는 이모에게 전권을 위임하듯이 입술을 찍 늘리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안 오빠가 누군데에?”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아드을?”

굳이 엄마의 친구가 아니라 선배라는 정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표현에 숨겨진 강렬한 분위기를 이모가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아, 이안 오빠랑 우리 한아가 이모 결혼식에서 턱시도랑 드레스 입고 나란히 꽃 뿌리는 걸 하고 싶은 거구나!”

이모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나도 이모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한아야. 너 그거 알아?”

이모가 대뜸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는 이모가 장난을 치는 줄도 모르고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결혼식장에서 그런 거 하면, 나중에 둘이 정말 결혼해야 해. 우리나라에는 그런 법이 있거든.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아, 진짜!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6세 유치원생으로만 보시나?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눈을 부릅떴다.

“네가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래. 우리나라에 첫사랑 법이라는 게 있거든. 거기 14조 3항에 보면 엄마 친구 아들과 이모의 결혼식에서 화동으로 입장한 경우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

우리 이모가 거짓말을 진심으로 정성 들여서 하고 앉았다.

노력이 가상해서 놀란 척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리고는 실소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손뼉을 쳐 대며 폭소했고, 이모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나는 꼭 드레스 입고! 이모 결혼식에서! 꽃 뿌리기 할 거야! 이안 오빠랑!”

웃음을 멈춘 엄마가 진지한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엄마가 저런 눈으로 볼 때는 겁이 난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잘못했는데 깨닫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으니까.

“한아야.”

“웅.”

나는 겁먹은 것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빠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이모가 있지도 않은 법을 끌어와서 놀리던 때와는 무게감이 다른 장난이었다.

아니,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아빠는 여전히 내가 이안을 오빠라고 부르는 걸 못마땅해 했다.

“아까 엄마가 그랬잖아. 내 선택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나는 내 선택을 믿어!”

이모가 옆에서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모전여전이다! 우리 한아가 엄마의 기개를 쏙 빼닮았구나!”

나는 턱을 약간 치켜들고는 조금은 거만한 눈빛으로 엄마를 응시했다.

“그건 네가 분별력을 갖춘 어른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 너는 겨우 여섯 살이야. 네가 조른다고 해서 뭐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단다. 그리고 이모의 결혼식이잖아.”

엄마는 나를 엄마 못지않은 여성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 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덕분에 나는 영재 내지는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6년의 인생을 살아왔다.

엄마는 내가 머리만 좋은 사회 부적응자로 자랄까 봐 걱정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저 혼자 똑똑한 줄 알고 설치는 인간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법이니까.

내가 그런 망나니가 되지 않도록 엄마는 나를 현명하게 단속했다.

“이모, 내가 이모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가해도 될까요?”

나는 공손한 존대로 이모에게 물었다.

“아우, 예뻐! 우리 한아, 예뻐서 미치겠다! 당연히 해도 되지! 근데 이모도 한아 아빠 무서우니까, 한아가 허락받아 와야 해!”

우리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처제인 이모에게도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러니까 이모가 대신 허락을 맡아 주기를 바랐는데, 결국 아빠와의 독대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일요일 아침, 나는 아빠와 거실에 마주 앉았다.

“우리 한아가 아빠한테 할 말이 있다고?”

“웅.”

엄마는 부녀간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려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율과 퍼즐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아빠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앞머리를 보드랍게 쓸어넘겨 주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와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주는 안정감은 나를 언제나 큰 사람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이모가 결혼한대.”

나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는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응, 아빠도 엄마한테 들었어.”

“그래서 내가 특별한 방법으로 이모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고 싶어.”

딱 부러지게 말하는 딸애의 총명함이 기특하다는 듯이 아빠의 눈동자에 애정이 일렁거렸다.

“우리 딸, 이모 결혼식을 어떻게 축하해 주고 싶은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대꾸했다.

“드레스 입고, 이모가 걷는 길에 꽃을 뿌려 줄 거야.”

아빠가 입을 조금 벌리더니 사뭇 감동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모가 결혼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거구나, 우리 한아가.”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이 너른 품에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아빠의 품에서는 엄마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마치 부드럽고 싱그러운 나뭇잎이 나를 포근히 감싸는 듯한 숲의 향기였다.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열매를 내어 주고, 그늘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웅. 이모 결혼식 내가 축하해 줄 거야.”

“근데 혼자서 그걸 하겠다는 거야? 한율이랑 같이 하기엔 너무 어린가?”

아, 아버지! 그걸 어떻게 남동생이랑 해요? 끔찍한 소릴!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아빠에게 말했다.

“한율이 말고! 이안 오빠랑 할래!”

“뭐어?”

아빠가 내 등허리를 잡으며 거리를 벌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아빠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이안이랑 뭘 하겠다고?”

“나는 드레스 입고, 이안 오빠는 턱시도 입고. 이모 결혼식 축하해 줄 거야.”

“안 돼.”

아빠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너 나중에 커서 분명히 후회할 거야.”

“커서 후회를 왜 해?”

나의 어른스러운 질문에 아빠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결혼식 사진이랑 영상은 오래도록 남는 기록물이야. 너랑 이안이 모습도 당연히 찍히겠지. 그걸 나중에 네가 사랑하게 될 남자한테 보여 줄 때는 뭐라고 할래?”

아이고, 아버지!

어릴 적의 추억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되겠지.

그런데 아빠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아빠가 그렇게 나오신다면, 나도 더 세게 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 아빠의 결혼을 반대했을 때, 엄마가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이안 오빠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일 것은 아니지만.

“이모가 그러는데, 첫사랑 법이라는 게 있대. 결혼식에서 꽃 뿌리기를 같이하면 나중에 무조건 결혼해야 한대. 그럼 어차피 나는 이안 오빠랑 결혼할 거니까, 상관없어. 이안 오빠랑 나의 좋은 기억이 되는 거잖아.”

“뭐? 무슨 법?”

아빠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되물었다.

“이모가 그러는데, 첫사랑법 14조 3항에 보면 엄마 친구 아들과 이모의 결혼식에서 화동으로 입장한 경우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댔어.”

나는 입술을 가늘게 맞물리며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아빠를 응시했다.

그러자 아빠가 잠시 멍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아빠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응?”

“처제 오늘부터 우리 집 출입 금지라고 전해 줄래?”

때론 웃으면서 하는 말이 더 살벌할 때가 있다.

“어휴, 정여은 불쌍해서 어쩌나. 조카들 얼굴도 못 보러 오고.”

엄마가 한술 더 떠서 우는 시늉을 해 댔다.

“그리고 한아야. 너 이안이한테는 물어본 거야? 이안이도 하고 싶대?”

아빠의 물음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이안 오빠부터 만나게 해 줘. 내가 설득할게. 나는 오빠 설득할 자신 있어!”

아빠가 고개를 젖히곤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정담은 딸 아니랄까 봐, 얘도 꽂히면 무조건 직진이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뭐야? 지금 내 욕 한 거야?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겠어? 한아랑 한율이가 지금 우리 옆에 있겠어?”

엄마가 조금 토라진 듯이 물었다. 그러자 아빠가 약간은 당황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좋아서 그러지, 좋아서.”

나는 아빠의 변명을 물고 늘어져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좋으니까, 이안 오빠부터 만나게 해 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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