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89)
  •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5화

    우뚝 멈춰 선 나는 이안을 한없이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아홉 살치고도 키가 큰 것 같았다.

    “응?”

    나는 똑똑히 들었으면서, 무슨 뜻인지도 다 알아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 물었다.

    “오빠 뭐라고 했어?”

    겨울같이 차가운 얼굴을 한 아이가, 여름같이 뜨거운 감정을 숨기고, 봄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을처럼 풍요롭게 읊조리는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이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안은 말을 쉽게 내뱉는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린 이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었으면 됐어.”

    이안의 표정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자기가 한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토라진 것인지, 솔직한 감정을 한 번 더 드러내는 게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오빠 집 되게 좋다! 나는 오빠 집에 오고 싶어서 일찍 코 자자 했어. 밥도 잘 먹고, 엄마 말도 잘 듣고.”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서 조곤조곤 떠들어 댔다.

    “착하네, 한아.”

    다섯 살 많은 오빠라고 의젓한 목소리로 나를 칭찬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눈이 반짝거리는 이안은 나를 데리고 본인의 놀이방으로 향했다.

    “여기서 놀면 돼.”

    이안 엄마가 이안에서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방이었다.

    마치 집 안에 고급 키즈 카페를 차려 놓은 것 같았다.

    얼마 전 정웅호텔에 새로 생긴 키즈 케어 룸과도 견줄 만했다.

    “오빠는 배가 좋아?”

    창문가 장식장에는 온갖 배 모형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응. 배가 좋아.”

    “왜?”

    내가 요즘 ‘왜’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아서 관성적으로 튀어나온 말은 아니었다.

    이안이 배를 좋아하는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배 안에 탄 사람들은 전부 평등하거든. 땅 위에서 이룬 재산을 전부 배에 실을 수도 없고, 땅 위에서 가진 힘을 전부 발휘할 수도 없어. 땅에서 만난 사람도 마찬가지야. 배에 모든 사람을 다 태울 수는 없거든.”

    배 안에서도 권력 구도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이안이 하는 말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었다.

    이안의 외롭고 척박했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안은 너른 바라에 홀로 떠 있는 배를 통해서 평등과 자유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애가 왜 이렇게 성숙해?

    “오빠는 그럼 땅 위에 있는 거 안 가지고 탈 거야? 엄마랑 아빠는? 보고 싶을 텐데.”

    지금 이안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가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으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는 중이었다.

    “글쎄.”

    이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덧붙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아니거든.”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안은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아직 자신이 속한 세상에 관한 두려움이 있는 듯 보였다.

    ‘누나, 무서워! 자꾸 형아들이 내 인형 숨겨! 누나랑 같이 자고 싶어!’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아서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여기에 민하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이안이 보육원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막아 줄 누나가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안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말했다.

    “오빠, 그럼 나 태워 줘라. 해적 선장님이면 부하가 필요하잖아. 내가 오빠 부하 할게!”

    이안이 꿈꾸는 배에 올라탄다는 것은, 이안의 인생을 함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겨우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민한아는 아홉 살 최이안의 인생이 더는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큰마음을 먹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자, 이안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심각하게 묻는다.

    “너 수영 잘해?”

    “수, 수영?”

    지금 네 살짜리한테 묻는 말치고는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응. 해적이 되려면 바다와 친해져야 해. 수영도 잘해야 하고. 그래서 수영 못하면 내 배에는 못 타.”

    “그럼, 수영만 배우면 태워 줄 거야?”

    이안은 또다시 고민에 빠지는 듯했다.

    이 자식은 조그만 게 무슨 생각이 이렇게 많아?

    “일단 수영부터 배우고 와.”

    수영부터 배우고 오라니.

    조련당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영 배울게!”

    시옷 발음이 새는 내가 내뱉은 말은 ‘투영 배우께!’에 가까웠지만, 이안은 나를 기특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이안의 배에 타기 위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여섯 살이 되어서야 자유형을 떼고, 배영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팔다리 근육에 워낙 힘이 없는 탓에 아무리 발장구를 쳐 봐도 물속에서는 늘 제자리였다.

    내가 처음으로 물 위에 바로 누워서 수영했던 날 저녁, 이모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제법 성숙한 느낌을 풍기는 이모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리 차분했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서 왔구나?”

    나와 엄마 그리고 이모는 식탁 앞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모는 늘 우리 집에 오면 여자끼리만 시간을 보내자며 나를 특별히 더 챙겨 주었다.

    어린 한율에게 관심이 더 쏠리는 것을 늘 신경 쓰는 눈치였다.

    첫정은 정말 무서운 게 맞나 보다.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이모가 정말이지 너무 좋다.

    “나 프러포즈 받았어.”

    이모가 얼굴을 예쁘게 붉히며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선준이한테? 언제?”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 주말에. 선준이도 자리 잡았고 해서. 연애할 만큼 했으니까, 결혼하자고 하더라고.”

    이모의 눈시울이 붉었다. 군인 아저씨였던 까까머리 문선준이 드디어 내 이모부가 되나 보다.

    “선준이가 회사에서 일을 제법 잘 하나 봐. 네 형부가 그러더라고.”

    예비 이모부는 대학을 졸업하고, 정웅그룹에 입사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운영하셨다던 회사는 좋은 가격에 매각되었다는 게 이모의 설명이었다.

    “엄마, 아빠가 허락해 주실까?”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참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나의 엄마인 첫째 딸 정담은은 치매 걸린 할머니를 모시는 남자와 결혼했고, 나의 이모인 둘째 딸 정여은은 홀어머니를 모시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단다.

    “왜? 허락 안 해 주실까 봐 걱정돼?”

    엄마가 이모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 형부는 워낙 특출났잖아. 아버지가 조건 안 보고 허락하실 만했지. 근데 우리 선준이는.”

    “선준이가 왜? 걔가 뭐가 어때서. 착하지. 성실하지. 성격 좋지. 일도 잘하잖아.”

    “형부는 우리 나이 때 벌써 임원 루트 밟게 하려고 차출됐었잖아.”

    이모가 걱정스럽게 내뱉은 말에 엄마가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엄마의 얼굴에 드물게 거만한 미소가 고였다.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냥 네 형부가 능력이 좋아서 결혼 허락받은 거라고 생각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센 척하는 엄마는 귀여웠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이 아니라, 악당 부하처럼 앙증맞았다.

    “그럼? 아버지가 어떻게 허락하신 건데?”

    “내가 임신했다고 했거든.”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과 내가 태어난 날짜를 따져 보면 속도위반이 아니었다.

    그런데 임신은 뭐야? 혹시 어디 숨겨 둔 자식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못 들은 척 요거트만 퍼먹었다.

    “아버지가 나를 강재만한테 시집보내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셨잖아. 그래서 강재만이랑 아버지랑 네 형부 있는 앞에서 내가 임신했다고 했지.”

    “그래서? 아버지가 그걸 믿으셨어?”

    “우리 아버지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믿으셨겠어? 다만 놀라셨겠지. 정담은이 회까닥 돌아서 사고를 치려면 제대로 치겠구나, 하고 깨닫게 만들어 드린 거지.”

    어휴, 다행이다. 나한테 숨겨진 오빠나 언니가 있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었다.

    이모가 미간을 좁히고는 중얼거렸다.

    “그럼, 나도 임신했다고 할까?”

    엄마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우아하고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엄마는 강인하고 저돌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런 모습에 아빠는 아직도 껌뻑 죽는 것 같고.

    “그럴 필요 없어. 선준이 좋은 사람이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네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런 거야. 네 선택을 믿는 게 우선이야. 부모님 허락 문제는 나중이고.”

    나는 오늘부터 엄마를 무한히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마음은 확고한 거야?”

    이모가 잠시 머뭇거렸다.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해. 부모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네가 먼저 단정 지은 건 아니지?”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자꾸 형부랑 비교하게 되고.”

    자매는 평생 경쟁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모의 마음을 일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우리 아빠가 너무 잘난 탓이다.

    “나는 이모부 좋아.”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어떤 말로 이모의 결혼을 응원해야 할지 몰라서 이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모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마도 이런 응원 어린 말 한마디가 필요했나 보다.

    “아우, 우리 한아는 어쩜 이렇게 예쁘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이모는 나를 껴안고는 이마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춰 댔다.

    “이모 나 예쁘니까 그거 시켜 줘.”

    “뭐? 우리 한아 뭐 시켜 줄까?”

    “결혼식에서 드레스 입고 꽃 뿌리는 거.”

    엄마와 이모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안 오빠랑 하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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