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4화

엄마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이안이가 한아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라고 부르는 게 당연하지.”

“오빠는 무슨. 혈육 아닌 남자한테는 오빠라고 부르는 거 아냐.”

“그럼 우리 한아가 이안이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아빠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엄마가 콧소리가 섞인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나도 우리 서후 오빠한테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겠다. 혈육 아닌 남자한테는 오빠라고 부르는 거 아니니까. 그치? 서후 오빠?”

나는 한쪽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운전석에 앉은 아빠와 조수석에 앉은 엄마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았다.

한율은 돌잔치를 치르느라 고단했던지 내 옆자리 카시트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부스터에 앉아서 자는 척 시치미를 떼는 중이었다.

차는 신호 대기로 인해 멈춰 선 상태였다.

“너는 진짜.”

아빠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엄마의 목덜미를 움켜잡고는 순식간에 입술을 집어삼켰다.

혈육 아닌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는지, 그 상황을 몸소 보여 주시는 겁니까, 아버지?

나는 엄마와 아빠가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애를 둘 낳고도 저렇게 좋아 죽으려고 하니, 나에게 동생이 하나 더 생긴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한율이 앉아 있는 카시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쌍한 내 동생.

첫째는 첫째라 귀염받고, 막내는 막내라 귀염받는 법인데……. 너는 어쩌다가 둘째로 태어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게 생겼구나.

누나가 잘해 줄게, 이 천둥벌거숭이.

엄마와 아빠의 알콩달콩한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에서 플라스틱 칼을 든 아이가 해적이 되겠다며 뛰어다녔다.

***

“한아야. 인사 잘 해야 해요. 우리 한아 공손하게 인사하는 법 알지?”

“웅.”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율은 아빠에게 맡기고, 엄마와 단둘이 향한 곳은 이안의 집이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네 살 인생에 이토록 시간이 더디게 갔던 적이 없었다.

열다섯 살 민하나의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갔던 것 같은데.

학교에 갔다 오면 금세 저녁이 되었고,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런데 네 살 민한아의 하루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가 일종의 스크린 셧다운 제도를 육아에 도입하면서, 나는 태블릿 PC나 스마트폰 사용, TV 시청 등을 일절 할 수가 없었다.

PC 게임도 못 하고, 스마트폰으로 SNS도 구경 못 하고, TV로 막장 드라마도 보지 못하는 네 살 민한아의 삶이란.

“다 왔다, 한아야!”

그리도 무료한 삶을 보내던 나에게 광명처럼 최이안의 집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외가댁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꽤 사는 집이라는 것쯤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였다.

차고 앞에 서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달려와서 대신 주차를 해 주겠다며 방긋 웃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엄마는 뒷좌석에서 나를 내려 주고는 손을 꼭 잡고 웃었다.

“한아야, 이안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해. 알았지?”

“웅.”

그 아이와 사이좋게 노는 거라면, 내가 자신 있지!

차고 앞에서 연결되는 문으로 들어서자, 푸릇푸릇한 잔디밭이 펼쳐졌다.

정성스레 가꾼 정원수와 졸졸 흐르는 작은 분수가 인상적인 프랑스풍 정원이었다.

“어서 와, 한아야! 반가워!”

이안 엄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두 손을 배꼽 앞에 공손히 모으고 머리 숙여 인사했다.

“어머, 우리 한아 인사도 잘하지! 아줌마가 맛있는 아이스크림 만들어 놨어!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녜!”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안 오빠능요?”

나는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응. 이안이도 금방 나올 거야. 승마 배우러 갔다가 방금 왔거든.”

해사하게 웃은 이안 엄마는 우리를 정원 한쪽에 있는 하얀색 파고라로 안내했다.

하얀색 천이 깔린 타원형 테이블 위에는 핑거푸드와 음료가 놓여 있었고, 접시 사이사이를 예쁜 꽃이 장식했다.

보육원에서 간식을 먹으려고 하면,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 엄격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졌었다.

꽃향기 그윽한 예쁜 테이블 앞에서 간식을 먹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삶이 현실이고, 보육원에서의 삶은 아득해져만 갔다.

내가 엄마의 도움으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을 때였다.

“엄마.”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이안이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이안이 왔구나! 오늘은 어땠어? 즐거웠어?”

“네.”

이안은 이번에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한아 왔어. 지난주에 돌잔치에 가서 봤던 동생 기억하지?”

그제야 이안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처연하게 고개를 돌린 이안이 나를 보고는 연하디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기억나요.”

이안 엄마는 이안의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또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리 이안이가 동생이랑 너무 잘 놀아 줘서 엄마가 또 초대했어.”

“네, 알아요.”

지난 돌잔치에서 초대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우리 이안이도 엄마가 한아 초대했던 거 기억하는구나?”

“네, 기억해요.”

이안 엄마는 기특하다는 듯이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안은 그런 스킨십이 어색한 듯 얼굴에 고였던 생기가 금세 사라졌다.

“엄마가 아이스크림 가져올게! 잠깐만 있어!”

이안 엄마는 이안을 내 옆에 앉히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나는 얌전히 앉아서 테이블을 응시하는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응.”

“오빠랑 놀고 싶어서 기다렸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건넨 말이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기도 했다.

“응.”

오빠도 기다렸느냐는 물음을 던지려다가 말았다.

나도 이번 생에서는 무려 재벌 3세인데, 좀 도도해져야 하지 않겠어?

“오빠도 나 기다렸어?”

그런데 4세 여아의 충동은 이성적으로 조절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이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왜?”

서늘한 물음이 흘러나온 순간, 심장에 금이 가는 듯했다.

“으으아앙!”

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크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한아야!”

당황한 엄마가 내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에 젖은 시야에 잡히는 이안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안아, 우리 한아가 오빠네 집에 놀러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거든. 그래서 이안이도 한아를 기다렸다고……. 기대했나 봐.”

맞습니다, 어머니! 저 지금 까인 거죠? 아, 자존심 상해!

아빠 불러! 민서후 씨 부릅시다! 이 녀석 혼내 주라고, 우리 아빠 부르자!

아빠의 말이 맞았다. 혈육 아닌 남자에게 함부로 오빠라고 부르며 마음을 내어 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니지! 나는 아직 마음을 내어 준 적이 없다.

네 살밖에 되지 않아서 무안한 상황을 노련하게 넘길 수 있는 사회생활을 익히지 못한 탓에 울음을 터뜨린 거다.

이안은 묵묵부답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등을 다독거릴 때마다 서러움이 눈녹듯 가라앉았다.

우리 엄마, 너무 좋아.

나는 새삼 감동받은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는 오늘도 무척 아름다웠다.

“엄마.”

“응. 한아야.”

어머니와 같은 분의 딸로 태어난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뜬금없는 고백 대신에 음료가 담긴 유리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목말라요.”

“그래, 주스 마시자!”

엄마는 내 앞에 놓인 유리잔과 이안의 앞에 놓인 유리잔에 각각 사과 주스를 반씩 따라 주었다.

내가 음료를 마시는 사이, 이안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다.

“한아 왜 그래? 울었어?”

엄마가 알은체하지 말라며 빠르게 눈치를 주었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눈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이안 엄마가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유리그릇을 나와 이안의 앞에 놓았다.

내 그릇을 한 번, 이안의 그릇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내 그릇에 담긴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 더 많았다.

나는 손을 뻗어서 내 그릇과 이안의 그릇을 바꿨다.

“한아야, 왜 바꿔?”

이안 엄마가 물었다.

“오빠가 쪼꼬 더 좋아할 것 같아서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안이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더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고서 한 행동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와! 우리 이안이가 초코를 더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이안 엄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나와 이안은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엄마들은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이스크림을 반쯤 먹고, 파고라에서의 시간이 지루해질 무렵이었다.

“방에 가서 놀아도 돼요?”

이안이 물었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어깻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이안아, 동생 잘 데리고 놀아야 해.”

“네.”

나는 이안의 손을 잡고 파고라를 벗어나, 잔디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손에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나도 기다렸어.”

졸졸 흐르는 분수대 물소리 사이로 스며든 이안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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