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3화

왕자님처럼 고운 얼굴을 가진 아이는 턱을 비스듬히 돌린 채,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아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흘러나오길 기다렸다.

“동생이 이름을 물어보나 보다. 대답해 줘야지. 응?”

아이의 엄마이자, 우리 엄마의 대학 선배라고 했던 여자가 무릎을 굽히며 아이의 앞에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썼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둣발만 꼼지락거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최이안.”

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최이안, 최이안이라……. 최이안.

이름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 이안 오빠구나.”

“응. 이제 ‘야’라고 하지 말고, 그렇게 불러야 해.”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나름 어른스러운 대답을 했을 때였다.

이안 엄마가 감격에 겨운 미소를 머금으며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맞아. 내 아들. 우리 아들 이름은 최이안이야.”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줌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줌마가 눈을 길게 늘이며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애써 참았다.

“너는 담은이 딸, 한아라고 했지?”

“녜.”

나는 4세 여아로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공손한 태도로 대꾸했다.

“어쩜 이렇게 대답도 예의 바르게 잘 할까.”

난생처음 보는 아줌마의 얼굴에는 애틋함이 스며 있었다.

“한아야! 너 여기서 뭐 해?”

그새 구 실장이 일러바쳤는지, 엄마가 조금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담은아, 오랜만이다.”

내가 대답할 새도 없이 이안 엄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 언니 왔어요? 한아 돌잔치 때는 내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미안해요. 전화 통화는 자주 했어도, 얼굴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야. 돌잔칫날은 워낙 바쁘잖아.”

이안의 엄마는 한없이 상냥한 태도로 우리 엄마를 대하고 있었다.

“한아야, 구 실장님이랑 같이 있으라고 했잖아. 너 혼자 돌아다니면 어떡해.”

엄마가 한복 치마를 조심스럽게 모아 쥐며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 이제 구 실장님한테 가자.”

“싫어!”

인생 2회 차, 겨우 네 살이 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이란 것을 해 보았다.

“한아야?”

엄마가 당황스럽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최이안’이라는 남자애의 정체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이 아이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안의 재킷 밑단을 와락 움켜쥐며, 아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오빠랑 있을 거야.”

고집스러운 말을 내뱉은 순간, 엄마가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담은아. 너 돌잔치 때문에 신경 쓸 것도 많은데, 한아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게.”

“언니, 그래도…….”

엄마가 선배와 내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는 듯했다.

“사진 찍을 때 갈게요.”

한 번의 돌잔치를 경험한 나는 매우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은아. 우리 이안이가 오늘 자기 이름을 말했어. 자기 이름이 ‘최이안’이라고.”

아줌마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끼어들었고, 엄마도 약간은 놀란 눈으로 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한아가 이름을 물어보니까, 우리 이안이가 대답을 해 줬어. 담은아, 돌잔치 하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이안이랑 한아랑 같이 어울리게 할 수 있을까?”

어른들이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 나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서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왕자님, 그동안 묵언 수행이라도 하셨나? 초등학교 저학년은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고, 엄마가 울면서 감동할 일은 아니잖아?

아줌마의 설득으로 나는 돌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이안과 같은 테이블에 머물 수 있었다.

“우리 한아, 몇 살이지?”

“네 짤이요!”

이안 아빠의 질문에 나는 야무지게 손가락을 펴 보이며 대답했다.

“오빠능 몇 짤이야?”

궁금한 걸 꾹 참을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좋은 나이도 아닐뿐더러, 지금 나의 온 신경은 최이안을 향해 있었기에 질문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홉 살이야. 너보다 다섯 살 많아.”

그 정도의 뺄셈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단다, 이안 오빠님아.

“오빠, 그럼 학교 다녀?”

내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아하게 물 잔을 집어 들었다.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덕인지, 이안의 행동에서는 기품이 넘쳐흘렀다.

유아용 의자에 앉은 나는 물 잔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나도 물.”

매우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안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자, 떨어뜨리면 옷 버리니까 두 손으로 들고 마셔.”

“웅.”

나는 이안이 건넨 작은 유리잔을 손에 들고 야무지게 물을 마셨다.

그런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부모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뭐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아니고, 왜 저래?

나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유아용 의자에 달린 테이블 위에 물 잔을 내려놓았다.

이안은 내 물 잔을 집어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냅킨으로 내 손에 남은 물기까지 말끔히 닦아 주었다.

9세 남아치고는 지나치게 섬세한 구석이 있는 놈일세?

또 그 모습을 이안의 부모는 감격에 겨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이안의 아버지는 상당히 후덕한 인상을 가진 아저씨였다. 둥글넓적한 얼굴은 까무잡잡했고, 눈은 작았으며, 콧방울도 펑퍼짐했다.

또 이안의 엄마는 미인이기는 했으나, 쌍꺼풀이 없고 긴 눈에 콧대가 낮아서 오밀조밀한 인상이었다.

반면 이안은 쌍꺼풀이 진하고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높은 콧대와 적당히 동그란 콧방울이 조화로운 얼굴이었다.

부모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직감적으로 이안과 부모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나이라 할지라도, 친자 관계에 관한 질문을 섣불리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내 고민이 깊어 가는 동안, 무대 위에서는 한율의 돌잡이가 한창이었다.

“자, 우리 한율이가 과연 뭘 잡을까요?”

모든 하객의 시선이 한율의 손끝에 집중되어 있을 때도 나는 옆에 앉아있는 남자아이의 정체에 관해 고찰하느라 바빴다.

“네! 우리 한율이가 축구공을 잡았습니다!”

어린 애 손에 쏙 들어가는 작은 공을 집어 든 한율은 곧장 동그란 물체를 입으로 가져가서 빨아 댔다.

쟤는 아니야. 인생 2회 차가 공이나 빨고 있을 리가.

“오빠는 뭐 잡았어? 나는 마패 잡았어.”

이안을 향해 던진 질문에 테이블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대통령 될 거야.”

어서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른 질문을 추가했다.

“오빠는 커서 뭐 될 거야?”

이안의 부모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지만, 이안은 서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해적.”

잃어버렸던 퍼즐 하나를 발견한 듯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해적? 그게 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바다를 지배하는 사람.”

대꾸하는 이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천진했다.

이 아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아이가 바로 최이안이었나 보다.

해적이 되겠다던 아이, 곰 인형을 찾아 달라고 울부짖던 아이, 혼자 자기 무섭다며 내 품을 파고들던 아이.

현재 나이 9세, 만약 민하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15세가 되었을 나이다.

15세의 민하나는 9세의 최이안을 동생처럼 돌봐줬던 것일까?

이전의 삶이 사실상 없어져 버려서 최이안을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돌잔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단했던 나는 SUV 뒷좌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안이가 그동안 자기 이름에도 대답을 안 했었대. 처음 입양했을 때는 예전 이름으로 부르라고 떼쓰고, 그랬나 봐. 근데 오늘 우리 한아한테 처음 자기 이름을 말했다고 하더라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엄마가 속삭이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한아를 꼭 동생처럼 챙겨 주더래. 그 선배가 결혼하고 오랫동안 애가 없어서, 이안이 입양한 게 벌써 4년 전인가? 아마 내가 한아 태어나기 전이었을 거야.”

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부모와 닮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어. 최이안이라는 이름에 감흥이 없었던 이유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그 아이는 다른 이름으로 정웅그룹이 후원하는 보육원에 맡겨졌을 것이다.

“잘 웃지도 않는데, 우리 한아가 오빠, 오빠 하는 게 귀여웠는지 아까 웃기도 하더래.”

이안의 삶이 딱해서 괜히 서러워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선배가 다음 주말에 한아 데리고 집에 놀러 올 수 있냐고 하더라고.”

엄마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 선배네 집에 방문하는 게 이렇게 조심스러울 일이야?

“남자애네 집에 놀러 간다고? 우리 한아가?”

아빠의 말투에서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이고, 아버님! 남자애네 집이 아니고, 엄마 선배네 집입니다요!

“서후 씨, 내 선배네 집이지!”

“아까 우리 한아가 막 오빠, 오빠 했다며? 한아한테 오빠가 어디 있어? 어딜 감히!”

나의 왕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 아빠가 복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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