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89)

다른 남자와 결혼해

외전. 다른 아이로 태어나 12화

“한아야!”

엄마는 나를 오른팔로 번쩍 안아 들어서 무릎에 앉히고는, 왼팔로 동생 한율을 안았다.

우리 엄마는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가녀린 몸매를 유지 중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괴력을 발휘해서는 나와 동생을 동시에 안고 달래고 있었다.

“응, 한율이 울지 마요. 괜찮아.”

다행히 길게 우는 법이 없는 한율은 금방 울음을 멈추고는 서럽다는 듯이 입을 삐쭉거렸다.

“우리 한아가 동생이랑 놀아 주려고 했어요?”

엄마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육원에서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리면, 연장자는 무조건 혼이 나는 편이었다.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건지 귀를 기울이는 선생님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우리 한아 많이 놀랐지? 동생이 갑자기 울어서.”

이제껏 놀라서 심장만 쿵쾅거렸을 뿐인데, 엄마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 한율도 나를 따라 울기 시작했다.

너는 울지 마. 왜 따라 울어? 우리 엄마 힘들게!

사고는 내가 쳤는데, 동생에게 적반하장인 나는 제법 응석받이로 자라고 있는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한유이가 일어나서. 한유이랑 놀아 주려고. 으앙!”

“응, 응! 우리 한아 마음 엄마가 알아.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했구나. 엄마가 우리 한아 속상한 거 다 알아.”

나는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예쁜 몸을 꼭 끌어안았다.

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놀란 구 실장이 침실로 달려왔다. 곁에는 증조할머니도 함께였다.

“무슨 일이냐?”

증조할머니께서 물으셨다.

“한아가 한율이랑 놀아 주고 싶었나 봐요.”

엄마가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는 중얼거리셨다.

구 실장이 한율을 안았고, 증조할머니는 내 손을 잡으셨다.

“우리 한아 할미랑 놀까?”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이 집에서 나의 높은 정신 연령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증조할머니뿐이었다.

“한아야. 왜 그랬니?”

증조할머니는 거실 소파에 나를 앉히고는 손에 떡뻥을 하나 쥐여 주셨다.

“한유이랑 놀려고.”

밍밍한 쌀과자를 한입 베어 물며 당돌하게 대답했다.

“떽! 다른 사람은 속여도 이 할미는 못 속인다.”

증조할머니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시며,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셨다.

“한유이가 나 아라?”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떡뻥을 우그러뜨릴 듯이 세게 쥐며 비장하게 물었다.

“한율이는 네 동생이니까, 너를 알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하시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이 할미를 의심하는 게냐? 요 당돌한 녀석!”

주름진 손으로 나의 통통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신 할머니는 끝내 답을 알려 주지 않으시고는 과거로 돌아가셨다.

“아가만 먹을 거야? 고모는 안 주고?”

나는 쌀과자 봉지를 집어서 할머니에게 건넸다.

당신을 고모라고 칭하실 때, 나는 할머니의 조카가 되었다. 할머니는 세상 시름을 다 잊은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모가 조카와 놀아 주듯 했다.

본래의 성격을 드러내시듯, 할머니께서는 치매에 걸리셨어도 순하고 자애로웠다.

그런데 할머니 그 남자애가 누군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을 작정이신가 봅니다?

그럼,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

“움마! 우움마!”

아빠가 떠먹여 주는 이유식을 먹던 한율은 갑자기 엄마를 찾으며 떼를 썼다.

“응, 한율아. 엄마는 지금 회의 중이셔. 엄마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이유식은 아빠랑 먹자.”

엄마 껌딱지인 한율이 울음을 터뜨리며 입을 꾹 다물고는 이유식을 거부했다.

아, 진짜 저 콩알만 한 놈이 잘생긴 우리 아빠를 괴롭히네?

나는 아빠의 손에서 실리콘 숟가락을 빼앗아서는 이유식을 듬뿍 떠서 한율의 입가에 갖다 댔다.

순간 한율이 숟가락을 ‘탁’ 쳐냈고, 소고기와 브로콜리, 당근을 갈아 넣고 만든 이유식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이놈이 진짜. 요즘 식량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데, 감히 밥을 떨어뜨려?

나의 남동생 한율은 내 기억 속에 나타나는 남자아이가 가진 것과 같은 곰 인형을 갖고 노는 천둥벌거숭이인 것 같다.

해적이 된다고 하던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기억이 분명치 않아서 원통한 한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이유식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우리 한아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동생도 잘 챙기고.”

아빠가 나를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압빠!”

나는 눈웃음을 사르륵 머금으며 웃었다.

“정말? 엄마 닮아서 예쁜 거 아니고?”

어느새 회의를 마치고 나온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곁으로 다가왔다.

“회의는 잘 끝냈어?”

아빠가 엄마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물었다.

“응. 대충. 내일 아침에 다시 점검해 봐야 할 것 같아.”

엄마는 이제 일주일에 하루는 회사에 출근했고, 나머지 나흘은 집에서 근무하며 나와 동생을 돌보았다.

아빠도 격일로 재택근무를 하며 엄마를 도왔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정웅그룹은 육아하는 임직원을 위한 유연 근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이 뽑은 가장 다니고 싶은 회사 1위에 올랐다고.

참으로 바람직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담은이 힘들어서 어떡해. 얼굴이 까칠하네.”

아빠가 엄마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말했다.

“나 진짜 얼굴 까칠해? 그래서 안 예뻐?”

“그럴 리가 있어? 정담은은 어떤 상황에서든 예쁘지.”

우리 엄마, 아빠가 또 시작이다.

아빠가 엄마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가 싶더니, 엄마의 붉고 오동통한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를 향해 입술을 쭉 내민다. 아빠는 엄마가 사랑스러워죽겠다는 듯이 커다란 손으로 엄마의 옆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고는 매우 조심스럽지 않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하아, 정말……. 엄마, 아빠의 사이가 너무 좋아도 피곤한 거구나.

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며, 단풍잎처럼 두 손을 펼쳐서 한율의 두 눈을 가려 주었다.

아직 2세 남아가 보기에는 부적절한 광경이다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한아 뭐 해?”

엄마가 달콤한 사과즙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정녕 그것을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어머니?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한율의 눈가에서 손을 거뒀다.

입술을 놓아주기는 했지만, 아빠는 엄마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휴, 우리 아빠를 누가 말려.

한율은 물만 줘도 잘 자라는 콩나물처럼 엄마 젖과 이유식을 먹고 쑥쑥 컸다.

어느덧 세상에 태어난 지 1년, 한율의 돌잔치는 나의 돌잔치만큼이나 성대했다.

나의 돌잔치는 궁궐 같은 중정에서 치러졌지만, 한율의 돌잔치는 날씨 탓에 호텔 실내 연회장에서 진행되었다.

엄마, 아빠가 한율과 함께 돌잔치 기념 스냅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구 실장의 손을 붙들고 주변을 살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정웅그룹의 임원들과 이야기하기 바빴고, 수많은 하객이 한율의 성장 사진이 전시 중인 스크린 앞에 서서 저마다 한마디씩 해 댔다.

“아들은 아주 아빠 판박이네.”

“그러게, 딸은 엄마 아빠 골고루 닮았던데.”

별로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멀리 그 남자애가 보였다. 나의 돌잔치가 있던 날, 낡은 곰 인형을 안고 있던 아이.

남색 반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흰 스타킹을 신고, 진한 베이지색 재킷을 입은 아이는 꼭 왕자님 같았다.

아이의 손에 곰 인형은 없었지만, 우물처럼 깊은 눈만큼은 여전했다.

확인하자! 쟤가 누군지!

나는 구 실장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는 남자아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한아야!”

구 실장이 나를 잡기 위해 버럭 소리쳤다. 나는 경호원과 구 실장의 손을 피해, 인파 속을 이리저리 누벼서 마침내 아이의 앞에 섰다.

“야!”

다짜고짜 외친 말에 왕자님 같은 아이의 시선이 나를 향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나도 오늘 동생의 돌잔치여서 나름 예쁘게 신경 써서 입은 참이었고, 공주님 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데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아이의 시선은 차갑디차가웠다.

“야가 뭐야.”

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나보다 어리면서. 오빠라고 해야지.”

호칭을 정정해 주는 나의 왕자님 아니 아이의 말투는 차가운 눈빛과는 달리 상냥했다.

“어? 너 담은이 딸, 한아구나! 이모는 엄마 대학 선배야. 근데 한아 왜 혼자 돌아다녀?”

이제야 나를 발견하고 달려온 구 실장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왔다.

“어휴, 한아야. 그렇게 혼자 뛰어가면 어떡해?”

어른들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했다.

아직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4세 여아인 나는 손을 쭉 뻗어서 남자아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오빠랑 있을래.”

구 실장이 입을 쩍 벌리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 엄마의 선배라는 아줌마는 웃음을 터뜨렸으며,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잡혀 있는 남자아이는 얼굴을 붉혔다.

귀엽다.

나는 찬란한 후광이 머리 뒤에서 비치는 듯한 아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한아. 오빠는?”

1